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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총장은 장식품이 아니다
대학총장은 장식품이 아니다
  • 교수신문
  • 승인 2003.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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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지난 2002년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일들이 많았다.

6월의 월드컵 4강 신화는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한껏 올려 주었다. 붉은 악마의 열띤 거리응원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두 여중생의 죽음에 항의하는 촛불 시위 역시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는 국민적 자존심의 표출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국민의 위대한 질서의식과 수준 높은 공동체의식을 내외에 과시했다.

국민의 노무현 대통령 선택도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다. 국민참여경선제부터 시작된 일련의 정치실험이 한국을 바꿔 놓았다. 위대한 한국민의 높은 정치의식을 세계에 과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제 한국은 잘 사는 나라, IMF 외환위기를 짧은 시간에 극복한 나라를 넘어, 세계에서도 앞선 역동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로 평가받게 됐다. 뜻깊은 2002년이었다.

역동적이었던 한 해를 정리하면서, 나는 나의 지난 총장생활도 함께 돌아보았다. 어느덧 총장으로 취임한지도 3년이 흘렀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고단해서야 어떻게 총장 일을 하나 하고 푸념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꼭 그렇게 바빴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까닭없이 바쁜 ‘총장’ 자리

물론 대학은 옛날의 대학이 아니다.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마당에, 대학 총장이라고 예전처럼 권위나 지키고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대학의 사회적 역할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고, 대부분의 대학들이 ‘열린 대학’을 지향하는 오늘날에, 총장의 역할 역시 지성의 상징이나 학교 관리자 역할로 안주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이니 만큼, 대학 총장의 할 일이 그만큼 많아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하고 이해된다 하더라도, 내 보기에는 구태의연한 관행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일이 주어지는 경우도 허다해 보인다.

예컨대, 대학 총장들은 각종 기관장들 모임에 툭하면 불려 나간다. 지역의 각종 행사에도 의전상 초청 받아 나가는 경우가 많다.
지역사회의 각종 기구의 장을 맡아달라는 부탁도 많다. 대표가 아니면 고문이니, 자문위원이니 하는 직책으로라도 참가해 달라는 경우가 허다하다. 총장 생활 3년이지만, 나도 내가 어떤 기관과 기구들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모두 기억해 내기 힘들 정도다.
물론 대학 총장으로서 당연히 역할을 맡아야 하는 분야도 있다. 지역사회에서 대학과 대학 총장이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많아지고 있기도 하다. 지역사회가 대학에 요구하는 역할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경우는 꼭 대학총장이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총장에게 부탁이 쏟아지기도 한다. 하는 수 없이 응하다 보면, 꼭 필요하지 않은 바깥일들에 지칠 때도 있다.

‘명성’보다 ‘전문성’ 존중해야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남아 있는 권위주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열정이 있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맡으면 족할 일을 꼭 대학 총장이 맡아야 한다고 조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대학 총장을 무슨 행사나 기구의 모양이나 내주는 장식품 쯤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볼 때면 답답하기까지 하다. 지난 대선 때도 그랬다. 지역의 TV 토론이나 신문의 경우, 그 분야의 전문가가 진행도 하고 패널도 하고 분석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을, 방송국에서는 대학 총장 중에서 진행자나 패널을 찾으려고 한다.

왜냐고 물으면 토론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란다. 토론의 격이야 토론의 질을 높임으로써 올라가는 것이지, 진행자와 패널의 직책이 높아야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신문사들도 총장 명의의 기고글을 실어야 무게가 있다는 사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전문가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왜 총장이 해야 하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보수적인 대구에서의 경험인지는 몰라도 우리도 이제는 권위주의적인 사고와 문화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전문가가 활동할 수 있게 하고 전문가를 대접하는 사회가 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난 대선이 우리 국민에게 준 또 하나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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