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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영화제작자의 망명과 귀환이주에 나타난 영욕의 독일영화사
전설적인 영화제작자의 망명과 귀환이주에 나타난 영욕의 독일영화사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10.19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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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23. 에리히 폼머

                                                   

1966년 5월 8일 에리히 폼머(Erich Pommer, 1889-1966)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모션 픽쳐’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독일에서는 단지 소수의 언론만이 한 전설적인 영화인의 타계를 세상에 알렸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1966년 5월 16일 자 <슈피겔>지다. 1929년 ‘우파(Ufa)’사에서 「푸른천사」(감독 조세프 본 스텐버그)를 제작했고, 당시 무명이었던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1901-1992)를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독일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에리히 폼머가 운명했다는 기사가 아주 미미하게 <슈피겔>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폼머는 1933년 독일을 떠났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군정 영화고문장교로 뮌헨에 머물렀으며 1954년 할리우드에서 「아이들, 엄마들, 그리고 한 장군」(감독 라즐로 베네덱)을 제작했다는 두 세문장이 기사 내용의 전부였다. 특별한 코멘트도 없었다. 기사라기보다는 에리히 폼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고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짧고 밋밋한 기사내용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로스앤젤레스 모션 픽쳐 병원’, ‘우파 (Ufa)사’, ‘푸른천사’, ‘마를레네 디트리히’, ‘독일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할리우드’로 이어지는 토포스(τ&#972;πο&#962;)의 변증법적 사슬을 보며 에리히 폼머가 얼마나 깊이 映畵史와 관련된 인물인지를 직감하게 된다. 더구나 독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짧고 무관심한 듯한 언론의 태도는 불성실하고 미흡하다기보다는 에리히 폼머라는 한 개인과 그와 관련 된 영화역사 주변에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하는 궁금증까지 자아내게 한다.

 

 

 

 

 

 

 

 

 

 

 

'모션 픽쳐(Motion Picture)’란 말마따나 ‘활동사진’으로 영화를 의미한다. 언제부터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을 내건 병원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이름을 접하며 아련하게나마 영화의 기원을 떠올리게 되고 이 병원이 캘리포니아에 소재한다는 소식은 세계영화의 메카가 역시 ‘할리우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파(Ufa)’사는 독일을 대표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映畵社로 독일 映畵史와 맥을 같이한다. 어찌 보면 ‘우파(Ufa)’의 역사가 곧 독일의 映畵史다. 「푸른천사」는 1930년 ‘우파(Ufa)’사 작품으로 당시 흥행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푸른천사」 여주인공 역할을 계기로 은막의 스타가 되며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배우이다.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 이전에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1905-1990)와 함께 할리우드 은막의 여왕으로 세계의 관객을 매혹시킨 전설적인 배우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영화계 실력자

이러한 흐름과 배경의 한 가운데에 있던 인물이 바로 에리히 폼머였다. 폼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영화 제작자였다. 흘러간 과거에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독일영화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독일 출신 영화제작자이다. 1913년부터 1955년까지 40여 년간 20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무성영화의 고전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감독 로베르트 비네, 1920)과 「메트로폴리스」(감독 프리츠 랑, 1926), 유성영화의 고전인 「푸른천사」(1930)가 그의 작품이다. 이 영화들은 폼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파(Ufa) 映畵社’의 대표적인 제작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에리히 폼머는 ‘우파(Ufa) 사’와 떼려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제작자였고, ‘우파(Ufa)사’ 역시 폼머 없는 영화 작품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리히 폼머야 말로 독일 映畵史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독일 映畵史는 영화의 태동과 더불어 시작한다. 독일의 막스 스클라다노브스키와 에밀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는 1895년 12월 28일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최초로 상영한 것보다도 약 2개월 전인 1895년 11월 1일 베를린 ‘겨울 가든 궁전’에서 수많은 관람객이 모인 자리에서 ‘비오스코프’로 짧은 영화를 상영했다. 비오스코프는 1초당 8장면을 촬영하여 연속되는 동작의 착시 효과를 자아낼 수 있던 카메라였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보다는 비용이 많이 들고 실질적이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영화 기술을 발휘했다는 것은 독일 쪽으로 보았을 때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자 영화발전의 초석이었다. 하여튼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의 선구적 작업은 영화사가 됐고, 1895년 비오스코프가 특허권을 취득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오락이 탄생했다. 에리히 폼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6세가 되던 해였다.

뤼미에르 형제보다 빨랐던 영화 상영

에리히 폼머는 1889년 7월 20일 힐데스하임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가 콘서브공장을 인수하며 괴팅겐으로 이사했다. 괴팅겐에서 김나지움을 다닌 폼머는 1905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에 의해 베를린에서 최초로 비오스코프 영화가 상영 된지 10년이 지난 때였다. 베를린에서 상인수업을 마친 폼머는 1907년 프랑스의 영화 제작 및 배급회사인 ‘고몽’사 베를린 지점의 영화 판매상 및 대리인이 되었다. 당시 나이가 18세였다. 그러한 다음 1910년까지 ‘고몽’사 빈 지점의 지점장을 맡았다. 영화인생을 영화 상인으로 출발한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12년에는 고몽사와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스 회사 ‘에클레어’ 사로 이직해 ‘에클레어’ 사 빈 지점 대표가 돼 중앙유럽과 동유럽을 담당했다. 1913년부터는 베를린에서 ‘에클레어’ 사 총 대리인이 되어 중앙유럽,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를 담당했다. 그해 결혼과 함께 ‘에클레어’ 사 총지배인인 마르셀 반달(Marcel Vandal, 1882&#8211;1965)과 공동으로 ‘빈(비엔나)-작가-필름’ 영화사를 창립했다. 영화사 창립 후 폼머의 주도하에 1915년까지 5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1913년이라고 하면 당시 에리히 폼머의 나이 24세이고, 1915년이면 26세이다. 20대 중반의 그 젊은 나이에 영화제작의 선구 역할을 한 것이다. 폼머가 이렇게 영화제작에 뛰어 든 것은 개인적인 열정도 있었겠지만 당시 독일 사회는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공인되지 않은 자그마한 영화기술이 그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가 도래하며 새로운 촬영기법 발달은 다양한 문화현상을 초래했다. 영화 붐을 일으킨 것이다. 문학이나 연극, 미술전시회나 고전적인 오페라 관람객을 밀어내며 서서히 영화관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하급문화가 고급문화로 대체되며 대중문화로 변모한 것이다. 초반의 영화관객은 저급한 사람들의 집합장소였다. 영화를 비하하는 말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하지만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대세였다. 새로운 촬영기법의 발달로 새로운 문화현상을 열기는 했지만 전문가들에게는 문제로 다가왔다.

우선 새로운 촬영기법의 발달은 상류계층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신기술은 빠른 속도로 낡아빠진 기술로 전락해 갔고, 자질구레한 단편영화는 소시민이나 노동자들의 연말연시 특선 상품이 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영화관을 찾는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해 영화제작자들은 새로운 노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화 줄거리를 늘리고 문학에서처럼 영화를 예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사이 개념으로 문학의 영화화였다. 이렇게 하여 1910년 이후부터 예술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파울 베게너(Paul Wegener, 1874-1948) 감독의 1913년 공포영화 「프라하의 학생」이 대표적인 예이다. 뒤이어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 1892-1947),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 같은 감독이 예술영화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예술로 확장된 영화계
1914년에 이미 독일 전역에는 2,500개의 영화관이 있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 관객 수는 1300만 명에 달했다. 영화의 인기는 대중매체로서 연극, 문학, 미술을 앞질러 갔다. 1930년에는 영화관이 35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영화는 유일무이하게 독일국민들이 공동으로 즐기고 새로운 문화 활동에 탐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현상이었다. 1914년 이전에는 외국영화들도 많이 수입됐다. 특히 덴마크와 이탈리아 예술영화가 상승세를 탔다. 어차피 무성영화이기 때문에 외국어 문제는 없었다. 그냥 보고 느끼며 자막에 뜨는 대화나 해설을 읽으면 됐다. 계속해서 여러 나라들의 외화도 수입됨으로써 프랑스, 미국, 소련 같은 다양한 나라들의 문화를 독일인들은 대리 체험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영화산업은 서서히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이면에는 영화의 가치를 인정한 국가가 영화 제작소들을 법으로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1915년 2월 에리히 폼머는 ‘에클레어’ 사의 프랑스 자본으로 ‘데클라(Decla)’ 영화사를 설립한다. ‘데클라 (Decla)’란 ‘독일(Deutschland)’의 De와 ‘에클레어(Eclair)’의 cla 합성어로 모험영화, 탐정영화, 멜로드라마, 3류 애정영화, 사회 풍속도 영화, 단편영화 시리즈물 등을 제작했다. 이러한 영화 제작물들로 ‘데클라’ 사는 가장 실험을 즐기는 독일 제작 영화사들 중의 하나로 발전하게 된다. 폼머는 영화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에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전투에 참전해 복무했고, 1916년 부상당한 채 베를린으로 귀향한다. 귀향해서는 상이군인 신분으로 독일육군이 심리전을 위해 설치한 ‘사진과 영화부서(Bufa)’에서 근무한다.

1919년 ‘데클라’ 사와 ‘마이네르트’ 영화사는 합병하여, 마이네르트는 제작 최고책임자를, 폼머는 해외지부장 역할을 분담한다. 합병을 하기는 했지만 ‘데클라’ 사는 명예욕이 발동했다. 폼머는 프리츠 랑 감독을 기용하여 최상급 ‘데클라-모험영화’와 로버트 비네 감독의 세계최상급 ‘데클라-영화물’을 제작해 냈다. 독일영화가 세계시장을 제패하기 위해서는 수출가능한 양질의 우수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을 폼머는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국제적인 성공으로 이를 증명해 보였다.

1920년 6월 ‘데클라’사와 ‘도이치비오스코프’사는 ‘데클라-비오스코프 Decla-Bioskop’사로 합병한다. 이로써 ‘데클라-비오스코프’는 독일 내에서 ‘우파 (Ufa)’ 다음가는 최대 규모의 영화사가 된다. ‘우코 필름’과 ‘루소 필름’이라는 명칭의 자회사까지 설립한다. ‘우코 필름’에서는 저명한 감독 빌헬름 무르나우(Wilhelm Murnau, 1888-1931)와 프리츠 랑에 의해 베를린 잡지에 연재된 연재소설을 영화화했다. 참고로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발돋움한 프리츠 랑도 에리히 폼머가 영화계에 데뷔시킨 영화감독이다. 무르나우는 무성영화시절 독일의 뛰어난 영화감독으로 표현주의에서 영향 받은 심리적 영상처리와 당시에는 혁명적인 카메라 작업과 영화 몽타주 작업은 영화가 새로운 매체를 여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인물이다. ‘우코 필름’은 도스토옙스키 등 저명한 세계문학을 영화화 했다.

이러한 작업 등을 통해 에리히 폼머는 그의 휘하에 당대 독일 최고의 영화 팀을 집합시켰다. 무르나우, 프리츠 랑, 로버트 비네, 칼 프렐리히(Carl Froelich, 1875-1953), 프리츠 벤트하우젠(Fritz Wendhausen, 1890-1962) 등 감독과 테아 폰 하르보, 칼 마이어(Carl Mayer, 1894-1944), 로베르트 리브만(Robert Liebmann, 1890-1942) 등의 시나리오 작가가 폼머와 함께 작업을 했다. 칼 프로인트, 칼 호프만, 빌리 하마이스터 등 카메라맨과 발터 뢰리히, 로베르트 헤를트 등의 무대장치가가 그의 영화사에서 일했다. 이 당시에 제작된 대표적인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스타일 및 영향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그로테스크한 표현주의 기법으로 세계적 명성
무성영화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기본적으로 대표적인 표현주의 영화이다. 그림과 무대장치에서 특이하게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함으로써 유명세를 더했고, 그려진 빛과 어둠이 대비되며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표현주의 작품임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특히 무대장치가인 헤르만 바름(Hermann Warm)과 발터 뢰리히의 작업은 표현주의 영상을 만드는데 특별한 기술을 발휘했다. 이 영화로 인해 영화 스타일에서 ‘칼리가리즘(Caligarismus)’이라는 개념이 탄생했고, 독일 영화는 이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33년 이 영화는 독일에서 상영이 금지됐고, 1937년에는 변종예술로 지목됐다. 당시의 어느 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영화는 표현주의 영화로 영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미며 특히 판타지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1921년 11월 ‘우파’사는 ‘데클라-비오스코프’를 인수한다. 그리고 1923년 에리히 폼머가 ‘우파’사의 회장단이 되고 동시에 ‘유니온(Union)’ 사와 ‘메스터(Mester)’ 사의 지도부에도 오른다. 이로써 에리히 폼머는 명실 공히 ‘우파’사 전체 제작업체들의 수장이 된다. 당시 ‘우파’사에서 제작 된 영화들이 프리츠 랑 감독의 명화 「마부제 박사」(1922)와 「니벨룽겐」(1924)이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의 영화사가 곧 에리히 폼머의 작업결과에 의해서 쓰이던 시절이다. 폼머가 곧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영화사였다. 하지만 ‘우파’사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높은 제작비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 책임은 고스란히 에리히 폼머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 제작비가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비용인 600만 마르크가 소요되자 1926년 ‘우파’사는 에리히 폼머의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았다. 독일에서 일자리를 잃게 되자 폼머는 미국의 ‘파라마운트(Paramount Pictures)’로 직장을 옮겨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잠시 MGM에서도 일했다.  

그러던 중 1927년 말 ‘우파’사는 폼머를 다시 불러들인다. ‘우파’로 복귀한 폼머는 미국에서 배운 새로운 조직과 기술을 독일에 도입한다. 당시 폼머를 다시 독일로 불러들인 인물은 루트비히 클리취였다. 클리취는 영화산업의 거물 경영자로 미개발된 독일의 영화 산업에 대한 선전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리려던 발상의 선구자였다. 미국에서 다시 복귀한 후 계속해서 저명한 작품들이 제작됐다. 그리고 ‘우파’사 최초의 유성영화도 제작했다. 그의 콘셉트로 제작한 영화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1930년 불후의 명작 「푸른천사」가 개봉됐다.

「푸른천사」는 요셉 폰 슈테른베르크가 감독하고 하인리히 만의 소설 &#56194;&#56404;운라트 교수&#56194;&#56405;(1905)를 칼 추크마이어가 각색한 영화이다. 늙은 교사역에는 에밀 얀닝스가 맡았고, 클럽의 여가수는 말르레네 디트리히가 맡았다. 저명한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인데, 소설의 작품성보다는 흥행을 전제로 한 영화예술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해 오히려 원작자 하인리히 만을 비판한 격이 됐다. 광고에는 ‘에리히 폼머 제작사의 에밀 얀닝스 영화’로 선전 됐지만 말레네 디트리히가 세상의 스타로 떠오른 것이 그 예이다. 예를 들면 비판적인 작품성보다는 여성의 육체를 표출함으로써 독자가 아닌 새로운 매체의 새로운 관객들 겨냥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우파’사는 에리히 폼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33년 3월 29일 해고를 했다. 영화제작자로 최고의 정점에서 해고를 당하고 망명의 길에 오른 것이다. 프랑스로 망명한 다음 프리츠 랑, 알프레드 히치콕 등의 감독 등과 영화를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유럽이 어수선해지자 1939년 할리우드로 옮겨 영화제작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심장병 때문에 영화사에서는 일할 수 없게 되자, 경제적으로 곤궁하여 부인과 함께 사기공장에서 노동까지 했다.

미군 영화검열 장교로 독일 귀환
1946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리히 폼머는 미군 최고급 영화검열 장교로 독일에 귀환했다. 미군정에서 그의 직책은 독일에 머물던 영화인들을 ‘탈 나치화’시키고 ‘재교육’ 시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영화 스튜디오를 재건하고 영화를 검열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저명한 독일 영화제작자가 아니라 미군정과 밀접히 연결돼 있는 점령군 장교였다. 이를 바라보는 독일인들의 감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뮌헨과 같은 보수적인 도시는 더 적대적 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독일 역사의 슬픔이기도 하다. 과거사를 청산하는 자나 청산을 당하는 자나 가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리히 폼머는 귀환 후 독일에서도 영화제작을 했지만 1956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에서 사망했고, 그를 기리는 영화학교는 지금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베를린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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