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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사학의 공공성을 말한다 ⑤
[기획칼럼] 사학의 공공성을 말한다 ⑤
  • 교수신문
  • 승인 2003.0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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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협의회(또는 대학평의원회, 교수평의원회 등, 이하 교협)의 법적 기구화를 둘러싸고 교수사회와 대학집행부, 심지어 교육당국간에는 커다란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대학 내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효율성 못지 않게 학내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반영하는 민주적인 과정이 매우 중시되기 때문에 교수사회는 교협의 법적 기구화를 대학의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반면, 교육당국이나 대학의 집행부 측은 주로 교협의 활동을 전자가 독점해왔던 대학운영이나 학사행정의 고유권한(?)에 대한 침해로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또는 교수들의 집단적 이기주의 산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교무위원회가 대학집행부의 들러리로 전락한 상황에서 많은 교수들이 학내의 주요 사안을 교협을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집행상의 애로를 오히려 해소해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반면, 재단이나 총장을 중심으로 한 대학집행부는 의사결정과정을 복잡하게 해 대학운영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교협 활동에 대한 삐딱한 시선들

그 결과 일반 사회의 커다란 흐름에 발 맞추어 일부 대학에서 교협이 대학 내의 중요한 의사결정기구로 자리 매김하고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아직까지 교협이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임의단체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러한 평행선은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가. 문제는 교협의 의결 기구화를 요구하는 교수사회의 주장을 교수집단의 이기적 행동으로 몰아부칠 만큼 현재 우리의 대학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구성원에 따라 인식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 많은 대학 구성원들은 대학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

위기의 근원은 대학과 사회의 ‘관계의 역전’에서 비롯한다. “사회는 시속 1백km로 가는데 대학은 10km로 가고 있다”는 ‘토플러’의 비유가 아니더라도 대학이 사회보다 뒤쳐졌거나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은 동의를 한다.

대학의 위기는 우리나라 대학만의 문제는 아니나 특히 학문의 식민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그 사정은 더 심각하다. 교육시장 개방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대학 및 학문의 붕괴 위기를 걱정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하나의 제도로서 대학은 산업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반면, 사회는 급속하게 탈산업화하고 있다. 탈산업사회의 화두 중 하나가 ‘중심의 해체’, 즉 ‘다원화’다. 그리고 다원화 흐름은 대학도 예외일 수 없다. 대량생산체제의 산업사회는 표준화나 평준화로 상징된다. 그리하여 대학은 산업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전문화된 표준적인 인간을 양성해 왔고, 게다가 국가 주도로 산업화를 한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이 ‘표준’의 내용을 국가(교육당국)가 정해 왔다. 최근 대학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것이나 심지어 교육인적자원부의 해체까지 거론되는 연유도 국가 주도의 공교육이 갖는 폐해와 관련을 갖고 있다.

교수사회 황폐화되면 미래는 없다

대학과 교육 환경의 다원화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는 교육부가 겉으로는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내세우면서도 자신들이 제시한 ‘표준’을 따르지 않을 경우 행·재정적 자원을 매개로 일선 대학에 간섭하는 것은 대학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다. 사실, 학교운영 및 학사운영에 대한 교육부의 간섭 배제는 교수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집행부를 포함한 대학구성원 모두가 공감하는 일이다.

이처럼 교협의 의결 기구화, 법적 기구화 문제는 단순히 교수사회의 차원에서나 혹은 대학집행부나 교육당국의 입장에서 접근할 성질이 아니다. 위기에 처한 대학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의 요구에 부합해 만들어진 서구, 특히 미국식 대학모델을 이식해 운영해온 우리 나라 대학의 경우 중층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독자적 요구에 부합하는 대학의 상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이 과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교육당국이 이 과제를 풀어갈 수 없다는 것은 교육관료들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집행부가 할 수 있는가. 결국은 교수사회의 몫일 수밖에 없다.

다양성이 위기를 푸는 열쇠

교수사회 외부가 갖는 교수사회에 대한 신뢰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교수협의회를 법적기구화 한다고 해서 단기간 내에 대학사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학사회에 대한 이해관계자들간의 힘의 균형을 통한 상호견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교수사회가 대학사회 변화의 주변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가 소망하는 대학은 존재할 수 없다. 혹시라도 교수사회의 파편화가 대학집행부나 교육당국의 이해 실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나라 대학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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