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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내 인생의 선생님들 / 강계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생물과학)
[원로칼럼] 내 인생의 선생님들 / 강계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생물과학)
  • 교수신문
  • 승인 2001.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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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6 17:57:30
내 나이 만 여섯 살 때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몇 해 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퇴직하기까지 한번도 학교를 정식으로 떠나 본적이 없다. 게다가 내가 늘 만난 사람들도 학교를 근거지로 아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학생이나 선생이며 그 중에는 감명을 주어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이 새겨진 선생님들이 있다.
세계 2차 대전 말엽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가족은 공습을 피해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 다닌 시골 학교의 담임 선생님은 일본사람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학교를 오고 갈 때마다 운동장 옆에 있는 일본 신좌에 절을 하도록 시켰으며, 교실마다 신좌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시간마다 참배케 했다. 그러나 우리 담임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수업시간이나 학교를 드나들 때 별로 참배하지 않았다. 또 우리 반의 일본 애들 서넛 명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한국학생과 조금도 차별을 하지 않아 재미있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얼마 후 선생님은 군대에 입대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군정과 새 정부 출범 그리고 남북분단을 거치면서 좌익과 우익의 사상적 갈등과 사회 혼돈 속에 6·25를 맞게 됐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정규적인 학교 공부보다는 정치적 갈등에 궤를 같이 하고 있어 일상이 사상논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좌경학생들이 기말시험을 백지동맹으로 유도했고 우익사상에 철저하던 교장 선생님은 가담자 전원을 퇴학시키는 것으로 맞섰다. 이러한 혼란 중에도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학교에 남게 하려고 애쓰시던 영어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일본 여자와 결혼했으나 해방 후 부인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혼자 지냈다. 당시 시골에서 영어 공부한 사람이나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선생님은 6·25가 나서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전 학년 영어교재와 너무나도 많이 사용해 너덜너덜 헤어진 영한사전을 갖고 다니시면서 전교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지금도 그 선생님 덕에 영어를 혼자 배워서 가르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감명을 주신 선생님들도 많다. 특히 2학년에 올라가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신 한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일 하게 되었는데 연구실에는 많은 기자재가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기자재 관리를 나에게 맡기셨는데, 기자재가 비싸고 새 것이라서 나는 덮개를 씌워 보관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때때로 타 대학이나 외부 손님이 방문했을 때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그 장비들을 학생들과 다른 학과 선생님들에게 완전히 공개하여 마음대로 쓰게 하고 빌려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때부터 연구실에는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드나들게 되었고 연구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대학교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덮개 씌운 새 기계를 보면 그 선생님이 “그것은 일하지 않은 증거야”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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