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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에게 무엇이었던가?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에게 무엇이었던가?
  •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 승인 2017.07.0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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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도서관과 작업장: 스웨덴,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 옌뉘 안데르손 지음 | 장석준 옮김 | 책세상 | 351쪽 | 18,000원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과는 달리 자본주의 비판과 현실 정책을 서로 결합하는 전망을 찾아야 한다. 안데르손이 결론에서 강조하듯이 유토피아와 현실 정치가 서로 만나는 지평으로서 ‘잠정적 유토피아’(E. 비그포르스)를 구체화해야 한다. 

 

영국 조기총선 결과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영국 내 대다수 언론이 급진적인 당대표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의 참패를 장담했다. 노동당 안에서마저 토니 블레어나 고든 브라운 전 총리를 따르는 중견 의원들은 마치 코빈과는 다른 당 소속인 양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러면서 선거 참패 이후의 당권 투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은 지지율을 크게 늘렸다. 비록 집권은 못했지만, 득표율이 40%를 넘었고 1위인 보수당과의 격차가 2%에 불과했다. 급진 사회주의자 코빈 대표가 당세를 블레어 정부 초기 수준으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투표일 다음날부터 언론은 부랴부랴 코빈 노선을 재평가하면서 이구동성으로 “한 시대가 끝났다”고 진단했다. 마거릿 대처의 시대(신자유주의)가 종식됐다는 뜻이기도 하고, 블레어의 시대(제3의 길)가 마감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한때 21세기 사회민주주의의 표준형이 될 것처럼 보였던 ‘제3의 길’은 이제 다름 아닌 그 본산,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만큼이나 경멸의 대상이다. 총선 이후 노동당 내 블레어파 모임인 ‘프로그레스’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경제전문기자이자 코빈 지지자인 폴 메이슨(국내에 그의 최근작 『포스트자본주의』가 소개됐다)이 쏟아낸 날선 발언에서 이런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메이슨은 왕년의 제3의 길 논객들 앞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노동당은 이제 [신노동당이 아니라] 좌파 노동당이다. 이제 여러분은 신자유주의를 끝장내겠다는 총선 공약에 동의할지 아니면 당을 떠날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사망 선고는 아직 이를지도 모른다.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판 제3의 길을 내건 에마뉘엘 마크롱이 기존 좌우 정당들을 뒤흔들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탈리아에서는 블레어를 따라 배우겠다는 마테오 렌치가 국민투표 패배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집권 민주당을 주도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제3의 길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더구나 제3의 길이 남긴 자취 역시 의외로 깊고 넓다. 이 노선을 밟고 일어선 최근의 급진 좌파 흐름에서조차 제3의 길의 일정한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가령 영국 노동당의 이번 총선 공약집은 ‘국민교육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교육 정책에 큰 비중을 뒀다. 노동당이 공약한 대로 제조업을 재건하려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체득한 시민을 육성하는 교육 서비스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따라서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투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 영역을 산업정책 차원에서 이렇게 중요시하는 것, 복지를 투자 측면에서 정당화하는 것 모두 블레어 시기에 정착된 새로운 양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제3의 길을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굴종한 사회민주주의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것이 제3의 길의 가장 중요한 맹점이자 한계임은 분명하지만, 이 노선에는 이런 얼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신진 이론가 옌뉘 안데르손은 2010년도 저작 『도서관과 작업장』에서 제3의 길의 또 다른 얼굴을 조명한다. 그것은 정보화 이후 등장한 지식자본주의 국면에 부응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정초하려던 시도였다. 안데르손이 처음부터 못 박듯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시도였지만 말이다. 

안데르손의 접근법은 두 나라 진보정당의 사례를 서로 비교 검토하는 것이다. 하나는 이 책 제목에서 ‘도서관’으로 상징되는 스웨덴 사회민주당이고, 다른 하나는 ‘작업장’으로 상징되는 영국 노동당이다. 

이야기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는 1980년대에 노동당 안팎의 좌파 지식인들이 대처 정부가 초래한 변화를 해석하느라 바빴다. 이는 이제까지의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신시대’가 열렸다는 논의로 발전했다. 이 토론에 참여했던 젊은 논객들이 1990년대에 지식정보사회론의 핵심 주창자가 됐다. 

블레어를 중심으로 한 신노동당 집행부는 이들의 논의를 열렬히 수용했다. 신노동당은 영국이 지식자본주의 시대에 다시 세계의 ‘작업장’으로 부상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지식경제에 필요한 경쟁력을 확보해서 과거 1차 산업혁명 당시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국민이 남보다 더 나은 지식, 능력, 기능을 갖추려고 경쟁해야 한다. 이제 국가의 역할은 근로 연계 복지나 교육 정책 등을 통해 사람들이 이런 경쟁에 뛰어들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반면 스웨덴 사회민주당에게 친숙한 비유는 ‘도서관’이었다. 19세기 말에 사회민주당은 노동자 교육운동과 함께 성장했다. 이 운동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빈곤층이나 벽촌 주민에게 책 읽을 기회를 열어준 순회도서관이었다. 사회민주당은 지식정보화 물결 속에 필요한 것이 이런 순회도서관 같은 노력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국가의 역할은 시민이라면 누구나 지식사회에 필요한 능력을 습득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두 당이 지식정보화에 주목한다는 점은 비슷해도 이렇게 강조점의 차이가 컸다. 신노동당의 담론에서 지식은 경쟁재다. 반면 사회민주당의 담론에서 지식은 공공재다. 이러한 기본 관점의 차이로부터 두 당의 여러 정책상의 차이들이 가지를 뻗어 나왔다. 영국 쪽이 대체로 자유주의로 수렴한 데 반해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평등과 연대의 전통이 끊임없이 강조됐다. 

안데르손은 영국 노동당이든 스웨덴 사회민주당이든 애초 출발 자체는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서 어긋난 게 아니었다고 본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사회주의의 이상과 그 실현 방도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재구성했다. 제3의 길도 시작은 그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제3의 길은 이전의 사회민주주의적 수정주의가 유지했던 핵심 원칙을 망각하거나 폐기했다. 그것은 현실 정치의 요구를 항상 유토피아적 이상에 따른 현존 자본주의 비판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탈자본주의 유토피아가 사라진 곳에는 결국 자본주의의 유토피아가 들어섰다. 경쟁과 능력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신노동당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오늘날 지식자본주의 논의는 ‘제4차 산업혁명’ 논란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화 이후의 자본주의에 주목한 제3의 길의 출발점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과는 달리 자본주의 비판과 현실 정책을 서로 결합하는 전망을 찾아야 한다. 안데르손이 결론에서 강조하듯이 유토피아와 현실 정치가 서로 만나는 지평으로서 ‘잠정적 유토피아’(E. 비그포르스)를 구체화해야 한다. 

과거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잠정적 유토피아로서 완전 고용과 보편 복지에 바탕을 둔 사회국가를 시의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세계사에서 가장 앞선 진보정치의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지식정보화의 가능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유토피아적 지향에 따라 21세기 사회국가의 구체적 해법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도서관과 작업장』은 가장 최근에 전개됐던 진보정치 재구성 시도를 비판적으로 돌아봄으로써 전 세계 진보세력이 직면한 이 시급한 공통 과제를 분명히 확인시켜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진보신당 부대표를 지냈다. 정의당 부설 미래정치센터부소장으로 있으며, 지은 책에는 『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의 적록서재』 등이 있고, 옮긴 책에는 『국가 대 시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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