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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북학론'이 시대적 임무 다하고 도서관 서가에서 휴식을 취하려면 …
그의 '북학론'이 시대적 임무 다하고 도서관 서가에서 휴식을 취하려면 …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6.12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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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10강. 이승환 고려대 교수의 ‘박지원과 조선 그리고 근대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은 2017년 ‘문화의 안과 밖’이 잡은 주제다. 지난 3일(토) 진행된 1섹션 철학/사상의 마지막 강연 차례는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과)의 ‘박지원과 조선 그리고 근대’였다. 연암 박지원에 관한 주류적 담론은 고전산문 즉 국문학 범주에서 그간 축적돼 왔다. 그렇다면, ‘동양철학’ 전공자인 이승환 교수의 시선으로 읽어낸 연암 사상의 근대적 의미는 어떤 형태일까. 이 교수는 과연 주류 국문학계의 해석을 넘어 어떻게 연암 사상을 현재화했을까. 주요 대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버려두고 떠나가기, 친숙한 것으로부터 결별하기, 낯선 타인의 눈으로 나를 돌아보기, 내가 속했던 자리를 외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내가 매달리며 살아온 세상을 높은 곳에서 대붕의 눈으로 조망해보기 등은 관점 전환을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 2001년 6월, 한국을 방문한 로티(Richard Rorty)와의 대담에서 김우창 교수는 ‘지성인에게 여행이 주는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로티는 “이런 식으로 교수와 작가들이 교류하는 일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 사람들의 낯선 행동 방식을 이해하도록 해서 자기 나라의 사람들을 계몽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여행하고 글 쓰고 하는 일을 통해 코스모폴리턴적인 범지구적 지성을 창조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박지원에게 연행이 주는 의미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자족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서, 심지어 당시 유럽인들조차 계몽군주가 지배하는 선진 문명으로 여기던 청의 문물을 관찰하고 체험하는 일은 폐쇄적인 울타리에 갇혀 살던 그에게 무엇보다도 기다려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박지원의 연행 당시, 18세기 후반의 청은 건륭제의 치세가 이어지던 때로 산업혁명 직전까지 지구상에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시기 유럽의 계몽적 지식인들은 청의 정치 제도와 문물을 이상적인 것으로 동경했으며, 이를 수용해 근대로 도약하는 자원으로 삼고자 했다. 지성사에서는 이를 ‘東學西被’의 시대라 부른다. 동양의 학문이 서양을 뒤덮었다는 의미다.

박지원의 사행길은 원래 목적지가 연경이었지만, 건륭제의 70수 축하연이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거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연경에서 열하까지 400여 리를 서둘러서 달려가야만 했다. 박지원은 열하에 도착해서 청나라 사람뿐 아니라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지에서 온 외교사절들과 접할 수 있었으며 라마교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열하 노정은 조선의
사행 역사에서 매우 드문 경험이자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과 사유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박지원의 지적에 의하면, 폐쇄적인 울타리를 벗어나는 초월적 경험을 해보지 못한 고루한 지식인들은, 서로 자기가 더 높이 날 수 있다고 자랑하는 메추라기와 비둘기처럼, 중화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조선이야말로 청나라보다 우수한 문명국이라고 으스대는 과대망상증에 도취돼 있다.

대붕의 눈으로: 세계관의 전환 

조선 선비들이 청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긍심의 저변에는 華夷論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화이론은 중화(華)와 주변민족(夷)을 문명/야만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문화-정치학적(culturalpolitical) 개념 틀이다. 조선이 망해버린 명을 대신해 소중화로 자처하게 된 이래, 화이론은 청에 대한 적대적 우월감을 내세우는 근거가 됐고,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는 강상 윤리와 예교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화이론은 기본적으로 문화-정치학적 개념이지만, 과학적으로는 天圓地方의 우주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북벌론의 허구성에 실망하고 있던 박지원은 청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게 되면서 화이론을 부정하는 마음을 한층 강하게 굳히게 된다. 박지원의 화이론에 대한 부정은 북학파 선배인 홍대용에게 빚진 바가 크다. 홍대용은 천문학을 위시해서 자연과학에 박식했는데, 그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천원지방’의 우주론을 부정하고 地圓說과 地轉說을 주장했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虛子와 實翁의 가상적 대화를 통해 지원설과 지전설을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허자 왈: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 하였는데, 지금 선생께서 ‘땅의 體는 둥글다’ 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실옹 왈: “심하구나, 그대의 아둔함이여! 만물이 형체를 이룸에 다 둥글 뿐 모난 것이 없는데 하물며 땅이랴! 달이 해를 가릴 때는 일식이 되는데, 가려진 체가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체가 둥글기 때문이며, 지구가 해를 가릴 때 월식이 되는데 가려진 체가 또한 둥근 것은 지구의 체가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지구의 거울이다. 월식을 보고도 지구가 둥근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 그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어리석지 않겠는가?
하늘 가득 별이 있는데 각각의 세계가 아님이 없다. 별들의 세계에서 본다면 지구 또한 하나의 별에 불과하다. 한량없는 세계가 허공에 펼쳐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우주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말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별들의 관점(星界)에서 지구를 보면 지구 또한 하나의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천문학적 인식은 ‘천원지방’이라는 중세적 사유에 젖어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청천벽력과 같은 주장이었을 것이다. 홍대용은 지구중심설을 부정하는 데서 나아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중화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까지 이른다. 지원설과 지전설을 통한 지구중심설의 해체는 자연스럽게 화이론을 지탱해주던 심상-지리적(mentalgeometrical) 고정관념의 해체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제 지구의 둥근 형태에서 ‘하나의 중심’을 논할 수 없다면, 지구의 모든 곳이 각기 중심이 될 수 있으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 있는 개개인의 자리들이 모두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별들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봄으로써 ‘중심’과 ‘주변’의 구분은 없어지고, ‘화’와 ‘이’의 구분도 해체되며, ‘자’와 ‘타’의 구분도 사라지게 된다. 단일한 중심의 해체는 필연적으로 다중심성(multicentricity)을 배태하기 마련이며, 그간 절대의 지위를 누려왔던 ‘하나의 중심’은 수많은 ‘중심들’ 중의 하나로 상대화되고 만다.

9만 리 상공에서 地界를 내려다보면 지계의 모든 곳이 다 중심이 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나라가 우열의 차이 없이 평등하기 마련이라는 상대주의적 인식은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박지원의 「초정집서」와 「민옹집」 등의 저작에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탈중심화(decentralization) 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홍대용이 자연과학자의 시각에서 다소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필치로 중세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있다면, 박지원은 문필가의 재기를 동원해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인 필치로 절대주의를 조롱하고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펼치고 있다. 훗날 신채호는 「지동설의 효력」이라는 글에서,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1807~1877)가 김옥균(1851~1894)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중세적 우주관의 붕괴와 중화중심적 세계관의 해체가 곧바로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는 지성사적 흐름을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다.

연행에서 돌아온 박지원에게는 두 가지 뚜렷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하나는 사대부-지식인 계층의 관념적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낙후된 경제 현실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의 조건 즉 이용후생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흐른 지금,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풍요로운 삶의 조건은 아마도 기대 이상으로 실현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지원이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면 그는 다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발상을 내놓을 것인가?

박지원이 오늘에 살아 있다면

18세기의 박지원은 바퀴 달린 수레를 제작해 한양에서 의주까지 달려가서 압록강을 건넌 뒤, 다시 압록강 너머에서 요동 벌판을 거쳐 연경까지 단숨에 달려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한양에서 의주까지 가는 길은 철책으로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경의선(총연장 499㎞)은 개통(1906년)된 지 이미 100년이 넘었건만, 동포 간의 골육상쟁으로 철로는 녹이 슨 채 방치돼 있는 중이다.
 
만약 박지원이 살아 있다면 그는 다시 우리에게 대붕이 되어 9만 리 창공으로 비상하라고 권유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박지원이 살아 있다면 그는 서울에서 출발해서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까지 한숨에 달려갈 수 있는 고속열차를 놓자고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울에서 출발해서 나진·선봉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모스크바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 열차를 놓자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한 철도망이 건설된다면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유통 경제의 활성화는 대단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박지원이 가졌던 두 가지 문제의식 중 첫 번째 사항, 즉 집권 사대부 계층의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일이 선결적으로 요청된다. 남북한 상호 간에 끊임없이 적대감과 대결 의식을 조장하려는 지배 권력의 시도는 인민 전체의 이용후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그저 집권 세력의 정권 안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불과할 따름이다. 실현 불가능한 북벌론을 퍼뜨리며 위기의식을 조장했던 효종과 노론 일파가 그랬듯이…….

한반도를 관통하는 경의선의 재개통, 서울-베이징 간 직통 열차의 개설, 부산에서 출발해서 서울과 나진을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는 유라시아 횡단 열차의 구상은 정치적·이념적 선동에 흔들림 없이, 오직 이용·후생 즉 순수한 경제 논리만 가지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상만 제대로 실현된다면 박지원이 주창했던 북학론은 그 시대적 임무를 다하고 도서관 서가에서 평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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