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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주의 강화·시민운동 성숙, 사회통합 가져온다
헌정주의 강화·시민운동 성숙, 사회통합 가져온다
  • 정상호 서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7.05.2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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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한국시민사회사: 산업화기 1961~1986』 정상호 지음 | 학민사 | 445쪽 | 25,000원

 

제3공화국 헌법은 ‘다른 나라 헌법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규정’이자 ‘제헌헌법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었던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삭제했다. 그것의 삭제는 곧 헌법정신이자 사회질서로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가 폐기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유신헌법은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못 박음으로써 시민사회의 가능한 활동 공간 및 성격을 규정했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시기인 산업화 단계(1961-1986)를 ‘시민사회사’의 관점에서다루고 있다. 여기서 ‘시민사회사’의 의미는 국가나 시장이 아닌 시민사회를 기본 개념으로 한 역사적 접근을 뜻한다. 또한, 기존의 연구가 법령과 정책, 조직에 미친 국가의 결정 원인 등 투입(In Put)을 강조했다면, 시민사회사 연구는 국가의 정책 결정과 집행이 시민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는 산출(Out Put) 및 환류(Feedback) 중심의 연구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국제비영리조직분류(ICNPO)’를 채택함으로써 비교 국가 분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이 책은 제도와 조직, 이념과 생활 등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 ‘한국 시민사회 제도사’는 헌법과 법률이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시민사회의 발전 방향 및 토대가 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제3공화국 헌법은 ‘다른 나라 헌법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규정’이자 ‘제헌헌법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었던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삭제했다. 그것의 삭제는 곧 헌법정신이자 사회질서로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가 폐기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유신헌법은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못 박음으로써 시민사회의 가능한 활동 공간 및 성격을 규정했다. 둘째, 산업화단계의 권위주의적 국가는 다양한 집단들을 ‘사회단체등록에관한법률’이나 ‘기부금품모집규제법’, ‘사회복지사업법’과 같은 법률이 부여한 광범위한 인·허가권을 통해 조직화했다. 등록의 인·허가에서부터 세부 활동에 이르기까지 임의로 개입할 수 있었던 광범한 규제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단체의 자율적 압력활동과 감시활동은 억제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의 국가와 단체의 관계를 살펴보면 1987년 민주화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민주화는 단체의 설립과 활동에 대한 허가제에서 등록제로의 일대 전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국제비영리조직 분류 적용해 시민사회 생태계 복원

2부 ‘한국 시민사회 조직사’에서는 국제비영리조직(ICNPO) 분류를 적용해 국내 연구로는 처음으로 산업화 단계 한국 시민사회의 생태계를 복원했다. 이 책에서 확인된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민간(<시민의 신문>)이나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수는 대략 8천개에서 1만여 개에 달한다. 이 중 대략 90% 정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설립된 것이고, 단지 10% 정도만이 민주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사회단체의 범주별 분포와 중요한 특징을 보면, 해방 이전이나 이승만 정부에 이미 설립된 유형은 사회서비스단체와 여성단체, 국제단체였다. 사회서비스단체나 국제단체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한국전쟁 이후 구호사업에 정부를 대신해 민간 및 외원단체가 적극 나설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반대로 문화예술, 사업자단체 등은 박정희 정권의 본격적인 산업화 정책 이후 대거 출현했다. 한편 전두환 정권에서는 보건의료단체의 비중이 높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 보건의료단체의 증가는 의료보험제도의 확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부 ‘한국 시민사회 생활사’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을 살펴보고 있다. 가장 오래됐고, 지명도가 높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민간의 모금사업은 ‘대한결핵협회’가 지난 65년 간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발행해 온 크리스마스 씰 판매다. 연말연시면 학생과 공무원, 군인을 중심으로 작고 예쁜 크리스마스 씰을 붙이는 모습은 지금과 같은 인터넷(SNS)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각종 국민성금은 적지 않은 부작용도 낳았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불우이웃성금, 재해의연금, 방위성금, 보훈성금 등 준조세적 성격을 갖는 성금이 무려 20여개가 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법」이 제정(1999.3)되면서 민간주도의 공동모금사업으로 전환됨으로써 일단락됐다. 한편, 급격한 인구 증가 및 도시화를 배경으로 나타난 ‘100만인 서명운동’은 매우 창의적이고 독특한 집단행동이었다. 특히 북한 문제나 납북 또는 재일교포의 문제는 국민적 공분을 얻기가 쉬워는 ‘100만인 서명운동’의 단골 주제였다. ‘100만인 서명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재야나 시민사회단체, 야당이 주도한 집합행동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재야와 야당이 유신체제의 폭압이 가중되자 그동안 산발적으로 벌려 왔던 민주투쟁을 개헌이라는 목표로 집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 전략으로 채택했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었다. 한편, ‘동아일보 격려광고 운동’과 ‘KBS 시청료 거부운동’은 엄중한 시국 속에서 창의적인 운동방식이 시민들의 참여를 효과적으로 견인하였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4부 ‘한국 시민사회 이념사’에서는 산업화시기의 시민사회를 지배했던 배타적인 세 가지 이념, 즉 자유민주주의와 성장주의, 그리고 친미노선의 확산 과정과 역할을 살펴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는 자유민주주의가 지배 이념이자 저항 이념으로 적대적 양진영에 의해 동시에 사용됐다(자유민주주의 對 자유민주주의). 이 시기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유력한 이념은 성장주의였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성장주의에 맞선 유력한 이념은 분배와 내포적 발전을 강조했던 민족경제론과 대중경제론이었다. 필자는 이 시기에 형성된 두 이론은 당대 이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개혁 진영의 사회경제 비전과 상상력에 지속적이고도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고 있다. 

생태복지국가·이성적 다원주의 사회로

끝으로 이 연구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규정했던 이념으로서 친미주의를 살펴보고 있다. 해방 이후 광주항쟁이 있기까지, 그리고 사드 이슈가 대통령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2017년 현재까지도 친미가 근본적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반미의 무풍지대’에 있다고 진단하며, 토건국가를 넘어서 생태복지국가로, 친미반공국가를 극복하고 ‘이성적으로 구성된 전반적 이념의 다원성으로 정의되는 이성적 다원주의’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결론: 한국 시민운동의 뿌리를 찾아서’에서는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 사회운동과 신사회운동의 이분법적 도식을 한국사회에 적용할 때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화운동은 시민운동의 인적 풀로 작용했다. 필자는 민주화운동이 1990년대에 들어 시민운동이 번성할 수 있는 인적 기반, 특히 재정적으로나 운영상 애로가 많았던 초창기 국면에서 시민운동이 터를 잡을 수 있도록 후견인 역할을 했음을 다양한 경험적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사회가 당면한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과잉 ‘이념화’라는 과제를 해소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첫째는 헌법의 기본 가치와 원리에 대한 공동체의 합의 수준을 제고시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 헌법의 논쟁 지점인 전문(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제1조(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119조(②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에 대한 높은 수준의 합의가 필요하다. 둘째는 진보든 보수든 시민단체의 자율성과 독립성, 투명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결국 헌정주의의 강화와 시민운동의 성숙이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 사회통합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으로 책을 마쳤다.

 

정상호 서원대·사회교육과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정당과 이익집단, 시민사회와 관련한 다수의 연구가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시민의 탄생: 한국인들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 『NGO를 넘어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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