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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저항운동의 새로운 전략과 오래된 전통
시민적 저항운동의 새로운 전략과 오래된 전통
  • 김민혁 미국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 승인 2017.05.23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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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대학은 지금_ 약자들의 저항과 외침에 주목한 논의들

고단했던 미국에서의 박사과정 1년차를 무사히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열 네 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여러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이번 봄 학기 내내 공부하고 고민했던 시민적 저항운동의 한 모습을 이 영화가 담담하고도 인상 깊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보다 정확하게는, 이 영화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의 싸움은 복지수급권 심사를 담당하는 거대한 관료적 시스템에 대항한 늙고 가난하고 병들고 컴퓨터 사용에도 서투른 한 시민이 벌이는 외롭고 가망 없는 싸움에 가깝다. 하지만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가 복지수급권 심사관과의 불합리한 언쟁을 마치고 나와 관청의 벽에 검정색 스프레이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내가 굶어죽기 이전에 나의 (질병수당 항고심사에 관한)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라고 자신의 주장을 작성하고 그 앞의 공간을 당당히 점유하는 장면은 상당히 낯설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점유와 외침을 통한 저항

공적인 공간에 대한 점유와 국가폭력(혹은 폭력적 국가시스템)에 대한 외침이라는 두 가지 저항의 방법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스템 내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시민적 저항운동의 동력이다. 탐욕적인 금융자본과 그에 결탁한 정치권력에 맞서서 시작된 2011년의 월가 점령 운동(Occupy Wall Street)은 물리적 의미에서의 공간인 즈카티 공원을 실제로 점유함과 동시에 명령문 형태의 구호를 통해 금융자본에 대해 분노하는 일반 시민들의 억눌려왔던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확산됐다. 유사하게,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 역시 흑인의 생명권이 부당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미국사회의 현실과 이를 방조하고 묵인하는 미국 국가권력의 폭력적 실상을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라는 호소력 있는 구호를 통해 폭로하고 다양한 층위의 저항운동을 조직해내는데 성공했다.

로는 이러한 외침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생하기도 한다. 2010년 겨울, 스물여섯 살의 과일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지방 관리에게 모욕과 수모를 당한 뒤 분신자살을 한 사건은 대규모의 국민적 시위를 촉발시켰고 마침내 튀니지의 권위주의 정권을 붕괴시켰다. 나아가 이 사건은 ‘아랍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반정부 시위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바누 바르구(Banu Bargu)는 최근에 발표된 논문 「부아지지는 왜 자신의 몸을 불살랐는가? 운명의 정치와 치명적 정치」(Constellations, 2016)에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을 통한 저항의 행위가 기본적인 존엄과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한 개인의 자기파괴적 방식을 통한 직접적 정치적 행위였다고 해석한다. 

탈-집중화된 리더십과 다양한 목소리의 존중

오늘날의 시민적 저항운동들의 공통적인 특성들을 지목한다면 탈-집중화되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통한 의사결정과 조직운영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월가 점령운동의 경우 중요한 의사결정들을 시위 참여자들의 총회(General Assembly)를 통해 결정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구성원 누구나 총회에서 제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제안이 받아지기 위해서는 90퍼센트 이상의 찬성(super-majority)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평적 의사결정과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통한 조직의 운영은 기성 정치권이나 기존 정치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관점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 월가 점령운동은 실무조직(working group)들의 구성원도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방식을 통해 조직 내의 권한의 집중을 방지하도록 노력했다.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 역시 과거의 흑인 민권운동이 보여 왔던 남성-성직자 중심의 리더십 모델을 거부하며 보다 참여적이고 그룹 중심의 리더십을 지향해왔다. 그 중에서도 흑인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흑인 민권운동 내에서 가려져 왔음을 명확히 밝히며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은 이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대변할 것임을 운동의 중심적 목표 가운데 하나로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탈-집중화된 리더십과 저항운동 내의 다양한 목소리의 존중은 오늘날의 저항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지향점이자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알게 된다. 

에드워드 스노든, 그리고 바클라브 하벨

이밖에도,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국 국가안전보장국 내부고발 사건을 다룬 윌리엄 슈얼만 (William Scheuerman) 교수의 최근 논문 「시민 불복종으로서의 내부고발: 에드워드 스노든의 경우」(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2014)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저항운동가이자 전직 대통령 바클라브 하벨의 저항이론의 정치이론적 함의를 분석한 페트라 굼플로바 (Petra G?mplova) 교수의 최근 논문 「바클라브 하벨과 함께 저항운동을 새롭게 생각하기」(Constellation, 2014)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싶다. 

위의 논문에서 슈얼만 교수는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사례를 통해 정당한 시민불복종의 범위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졌던 부분은 스노든이 주장한 ‘정당하게 재판받을 권리’에 관한 부분이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한 내부고발자를 과도하게 처벌하는 미국의 사법제도의 특성은 폭로이후 러시아로 망명해 본국 소환을 거부하는 스노든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사유로 봐야 한다고 슈얼만 교수는 해석한다. 법률을 위반하는 시민불복종을 현행 법률로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는 이와 관련된 이론적 논의의 가장 중심에 있는 주제인 만큼 다양한 사례 검토와 논쟁을 통해 기존의 시민불복종 이론이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읽힌다. 

하벨의 저항이론에 관한 굼플로바 교수의 논문은 현대사회에서 탈-정치화, 소비자화 되는 일반시민들의 경향성에 대응해 하벨이 제시한 ‘진실 안에서 살기(living in the truth)’의 비전이 기여할 수 있는 정치적 의미를 상세히 살피고 있다. 하벨이 그의 유명한 에세이 「권력 없는 자들의 힘(The Power of the Powerless)」(1978)에서 진실 안에서 살기로 결심한 한 청과물 상인의 결단을 통해 묘사했듯이, 지배권력의 거짓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도덕적 성찰을 통한 주체적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 집합적이고 정치적인 저항의 과정에 선행해 이뤄져야 할 필요성과 그 함의는 오늘날의 맥락에서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시민적 저항운동과 관련된 최근의 흐름들 및 논의들은 점점 더 마비돼가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화하는 국가시스템에 대항해 보다 유연하고 포용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직접적 정치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의 목소리를 중심에도 울려 퍼지도록 하는 개별적 혹은 집합적 저항의 방식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저항을 통한 정치참여는 인류의 정치사에 있어서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점점 더 바깥으로 밀려나는 취약한 개인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상황에서도 약한 위치에 놓은 다수의 사람들은 새롭고 효과적인 저항의 수단을 매순간 발전시키고 있다. 

김민혁 해외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다양한 정치·사회적 제도들을 활용해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을 강화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적 거버넌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민주주의 이론과 공공정책 분야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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