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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성찰과 에세이의 미적·형식적 완결성 중시했다
주제 성찰과 에세이의 미적·형식적 완결성 중시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4.26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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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에세이, 어떻게 선정했나?

‘시간’을 주제로 한 2016 학술에세이 공모전에 비해 응모작이 적었다. ‘공존’이란, 시의적이고 구체적인 주제였음에도 웅모작이 적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전년도에 비해 수량 면에서 비록 적긴 했지만, 사유의 폭은 좀더 확장됐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심사는 <교수신문> 학술에세이팀에서 2심에 올라갈 작품을 △주제성찰 △독창성 △완결성을 척도로 이에 걸맞은 작품 15편을 추려냈다. 2차 심사는 <교수신문> 서평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안재원(서울대·서양고전문헌학), 이연도(중앙대·철학) 교수와 최익현 <교수신문> 편집국장이 함께 진행했다. 2심은 3월 28일 저녁 7시부터 세 시간동안 진행됐다. 미리 각 편을 받아본 두 교수와 본심에 올라갈 10편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학술에세이는 사실 어떤 형식이 확정된 글쓰기라고 할 수는 없다. 아카데미즘과 에세이의 자유로움이 결합된, 여전히 실험적인 형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응모작은 지나치게 아카데미의 논문 형식에 쏠렸거나, 그 반대편으로 한없이 달아나는 글들이 주를 이뤘다. 2심에 넘길 작품 선정은 그래서 더욱 어려웠다. 

2심에선 어떻게 읽어냈나?

안재원: 내용과 관련해서, ‘공존’ 개념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입각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글이 없었다. 응모된 글들에 나타난 공존 개념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피상적이거나 지엽적이었다. 사실, 한국 인문학의 담론 공간에서 ‘공존’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내지 저술을 찾아볼 수 없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어쩌면 이는 당연한 실정일 것이다. 글들의 형식과 체계와 관련해서, 응모자들이 글을 자유롭게 그리고 도전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라는 응모 조건을 참고 문헌이나 전거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각주 없이 쓰는 것이 자유로운 글은 아니다. 자체적인 논거를 확보해야 하거나 전거를 밝혀야 한다. 응모된 글의 상당수는 생각의 사변적인 흐름을 글로 옮겨놓은 것을 자유로운 글쓰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연도: 학술에세이라는 형식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논문(주석을 중시한)과 신변잡기식 에세이 글이 많았다. 본인의 학술적 의견을 에세이 형식으로 자유롭게 전개하는 것이 이 공모의 취지인데, 아쉬움을 느낀다. 글의 응모 또한 상당히 제한된 분야에 국한돼 있어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인간과 기계’, ‘세대간’, ‘남북간’, ‘남녀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에 대한 투고는 드물었다. 젊은 학술연구자의 시야가 제한돼 있는 듯싶어, 아쉬움과 함께 위기의식도 들었다. 눈에 띄는 수작이 없어, 대상 없는 최우수작을 선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최종 심사진에 건의한다.

최익현: 지난해의 경우 응모작이 인문사회과학에 편중돼 있었는데, 올해는 조금 확장된 느낌을 줬다. 이공계 석사과정 대학원생의 도전 같은 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안재원·이연도 교수도 지적했듯, 위기가 고조되는 우리 현실의 문제, 즉 남북 문제, 양극화 문제, 세대문제, 인공지능과 미래 노동 등에서부터 인문학과 과학 등 좀더 깊숙한 담론을 사유하는 노력은 부족했다. 또한 ‘학술에세이’ 형식과 관련, 2016 학술에세이 수상작을 의식한 글쓰기들이 많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나, 그렇더라도 사유의 노력이나 접근은 자신만의 색채를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점도 조금 아쉬웠다. 논의 끝에 좀더 자신의 사유를 끌고 접근해간 작품 10편을 고르는 데 합의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거대한 공포에 누가 저항하는가: 수용소 사회의 바깥을 향하여 △공존, 나와 남의 경계를 넘어 △공존, 변이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 △공존의 시대, 현대예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록말살형과 역사에의 욕망: 공존의 권리를 역사화하기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선은 흐릿해진다 △문화 앙상블 △시(詩)인간으로 함께 살다 △‘의도된 예외상태’의 재구성: 예외상태 해소를 통한 공존, 공존을 통한 예외상태 해소의 기획 △자살생각, 부재에서 열리는 급진적 가능성의 세계(가나다 순)

그러나 본심에 넘기진 못했지만, 지면을 통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아쉬운 작품들도 있었다. 「에이즈, 점유권, 그리고 전개도-은유를 통해 살펴본 공존의 의미」는 에이즈 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다룬 글이다. 에이즈 환자를 사회적으로 격리 혹은 배제시켜서는 안 되는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 “에이즈 감염자의 위치는 점유로 인한 물권적 청구권을 가진 당사자의 위치와 매우 유사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삼아 논지를 전개한다. 이 비교가 적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에이즈 감염자의 공존 문제는 물건의 관점이 아닌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논의이기 때문이다. 

「연옥의 순례길에서 건저 올린 공존의 철학」은 글 자체에 있어서는 완성도가 높다. 다만, 글이 너무 전문적이라는 점이 아쉽고, 제목에 언급된 ‘공존의 철학’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다. ‘나가면서’의 “즉 인류 전체의 온전한 안녕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적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는 것이 『제정론』의 평화라면 개개인의 역사와 잘잘못을 들추면서 개개인의 영혼의 구원이 궁극적인 화합으로 나아간다는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 『신곡』에서 얘기하는 평화다”라는 언명에서 공존에 대한 고민의 흔적으로 찾을 수 있겠으나, 이런 언명만으로는 단테가 말하는 ‘공존의 철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의 정치적 평화와 개인의 내면적 평화가 어떻게 공존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도 좀더 설득이 필요한 대목이었다. 

「정치 문제의 비정치적 해법: 공동체 확산을 통한 앙골라 전후 극복」은 앙골라의 분쟁 역사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인류애와 같은 감정에 대한 호소를 담은 글이다. 이 감정이 공존의 논리적 혹은 실질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 글에는 감정에의 호소만 있다. 공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하게 됐는지에 대한 해명이 없어 아쉬웠다. 

「철학과 자연과학의 공존의 방향」은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제기하고자 시도된 글로 보인다. ‘철학과 과학의 연속적인 관계’ 맺음을 위해서라고 한다. 글의 입론은 뭔가 새로운 주장을 기대케 하는 것인데, 글의 결론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빠지지 않은 통합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한국의 자생적 철학을 생산할 수 있는 길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방법은 자연과학과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로 끝난다. 통합과 공존에 대한 당위만 강조될 뿐, 글이 약속한 어떤 새로운 철학적인 방법론이 제시된 것은 없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최종심

이렇게 넘어온 10편을 <교수신문> 논설위원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송우 부경대 교수, 철학자인 김진석 인하대 교수, 그리고 제1회 학술에세이 최우수상 수상자로, 화쟁사상을 문학연구에 접목해, 그 사유를 넓혀가고 있는 이도흠 한양대 교수가 최종심사를 맡았다. 7일부터 11일까지 에세이 전편을 각자 검토하고, 서로 의견을 수합하는 방식으로 심사했다. 최종심은 역시 고민이 가장 첨예한 자리다. 

내공 깊은 최종심 심사위원들의 의견 조율 끝에 결과가 나왔다. 대상작 없이 최우수상을 1편, 우수상을 3편으로 뽑기로 결정했다. 최우수상에는 「거대한 공포에 누가 저항하는가: 수용소 사회의 바깥을 향하여」를,  우수상에는 「기록말살형과 역사에의 욕망: 공존의 권리를 역사화하기」, 「시(詩)인간으로 함께 살다」, 「자살생각, 부재에서 열리는 급진적 가능성의 세계」을 선정했다. 

최익현 기자 bukha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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