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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니다 … 깨달음은 상태에서의 수행이 佛法의 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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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17.04.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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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3강. 원영상 원광대 연구교수의 ‘선과 일본 불교의 성격’
▲ 원영상 원광대 연구교수의 '선과 일본 불교의 성격'

지난 15일(토) 오후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4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3강은 원광영 원광대 연구교수의 ‘禪과 일본 불교의 성격’이었다. 패러다임을 주제로 첫 강연을 ‘선불교’에, 2강을 ‘종교개혁’에 배치한 것의 연장선임을 알 수 있다.
강연자로 나선 원영상 교수는 원광대 원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사상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원광대 연구교수이자,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으로 있다. 원불교 교무로 법명은 益善이다. 공저서로 『한 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 『일본문화사전』, 『동아시아불교, 근대와의 만남』,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 등이 있고 그밖에 카시와하라 유센의 『일본불교사 근대』 등을 공역했다. 2014년 제3회 전법학술상을 수상했다.
원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일본 불교의 특징으로 ‘천태종의 종합 불교에서 파생된 불법승삼보의 분화’를 지적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오늘날 서구세계에 ‘선(Zen)’을 알린 게 바로 ‘일본 선 불교’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그의 전개과정에 주목한 대목이다. 과연 어떤 내용일까. 일본 선불교와 문화, 근현대 일본의 선 사상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사진·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일본 선불교와 문화

일본의 선 사상의 특징은 토착화돼가는 신불교들이 보여주듯이 선택과 집중의 專一 사상이라는 점이다.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종파가 조동종이다. 조동종은 현재 일본 불교 전체에서도 제2위의 교세이며, 선종계에서는 영향력이 가장 크다. 임제종과 황벽종은 중국 선의 노선을 그대로 따랐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후자는 임제종 계통이지만, 후대에 분화돼 독자적인 종파가 됐다. 임제종은 공안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선택했으며, 황벽종은 고성불과 같은 염불을 통해 선정일치(禪淨一致) 혹은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길을 걷는다.

도겐이 일본에서 중국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대승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을 가지고 있는 부처임에도 왜 수행을 해야만 되는가에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1223년 송나라로 건너가 마침내 조동종의 천동여정(天童如淨)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중국에서 첫 번째 놀란 것은 典座의 교훈이었다. 선방의 직책 가운데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직책인 이 전좌의 노승이 한 여름에 반찬거리를 구입하러 나온 것이다. 도겐은 이 전좌에게 왜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느냐고 묻자, “내가 하지 않고 누가 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리고 왜 이런 더운 때에 하느냐고 하자,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거기에서 크게 깨친 것이다.

그리고 조동종 洞山良价의 법손인 여정 선사의 지도로 수행을 하여 마침내 지관타좌의 선을 체득했다. 지관타좌는, 온 심신을 쏟아 오직 좌선하는 것 외에는 불법을 체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 묵조선(默照禪)의 선법을 말한다. 『正法眼藏』에서 도겐은 “참선이라는 것은 심신탈락이며, 지관타좌로 시작해서 얻는다”고 한다. 1227년 4년 만에 귀국한 도겐은 교토의 建仁寺에 주석하며 조동선을 널리 알린다.

이 지관타좌는 중세 일본 불교의 전일, 선택의 사상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하나로써 모든 것을 밝히는 선 사상이 된 것이다. 그것은 본증묘수(本?妙修)의 사상에서 잘 드러난다. 즉, 수행을 깨달음을 향한 과정이나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고 본래 깨달은 상태에서의 수행 그 자체가 불법의 행이자 묘수임을 설한다. 말하자면 화두를 드는 공안선을 배척하고 오직 좌선 한길에 깨달음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수행에서는 오직 일심이 일체법이자 일체법이 일심이며 산하대지의 마음은 오직 산하대지일 뿐이라고 한다. 즉, 한 마음이 모든 우주를 소유하는 동시에 온 우주도 한 마음에서 나오며, 산하대지를 떠나서는 산하대지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일본 특유의 본각 사상과도 깊이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각 사상은 이원 상대의 현실을 不二 절대의 세계로 보는 것으로 현실을 철저히 긍정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이는 『대승기신론』의 본각 사상을 일본의 천태가 중심이 돼 발전시켰으며, 일본밀교 사상의 체계화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중세에 이르러 심화되고 신도와 예능을 비롯한 일본의 다양한 문화 현상의 근저를 이루는 사상이 됐다.

다음의 특징으로는, 일본의 선종은 국가 권력과 밀접한 종파와 이와는 반대로 국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세력으로도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주로 5산 10찰에 해당한다.

후자는 단연 조동종이다. 이러한 종파 혹은 사찰은 임하(林下)라고 한다. 조동종은 천동여정이 도겐에게 권력과는 멀어지라고 하는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권력과는 일절 담을 쌓았다. 대표적인 예가 제자 겐메이(玄明)에 대한 일화다.

가마쿠라 막부의 5대 실권자인 호조 도키요리(北?時?)로부터 사찰에 2천석의 토지를 기증하고자 하는 寄進狀을 얻은 수좌 겐메이가 기쁜 마음으로 도겐에게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 도겐은 “더럽다”고 하고, 겐메이를 파문시켰다. 그리고 그가 앉아 수행하던 자리를 뜯어내고, 그 자리의 아래에 있는 흙마저 파내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여정 선사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킨 것이다. 그가 깊은 산속의 영평사로 들어간 것도 국가 권력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었다. 조동종은 이후 막부가 중국의 제도를 본떠 제정한 5산 10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민중 가운데에서 선을 전파해 전국적으로 고르게 뿌리를 내렸다.

이것은 육조 혜능이 신수와는 다르게 당시 수도와는 먼 남쪽에서 선을 전파하며, 국가 권력과 거리를 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법난에 처했을 때, 결국 선의 명맥에 의해 불법이 다시 살아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깊은 의미를 도겐 또한 중국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탈권력화의 사상은 도겐만이 아니라 임제종 내에서도 하나의 전통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파들이 있었다. 임제종의 대응파 계통인 대덕사파와 묘심사파다. 이들 유파는 막부에 의해 결정되는 5산 10찰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선불교가 일본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5산이 중심이 된 5산 문학을 기반으로 건축, 시, 서, 건축, 정원, 연극, 다도, 화도에서 선의 정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러한 예술분야는 5산의 문화에 의해 확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무사도를 비롯해 직업관이나 사생관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근현대 일본의 선 사상

미국을 필두로 서구에 선을 전파한 것은 일본이다. 오늘날 선이라는 말이 영어권에서 일본발음인 Zen(한국은 Seon, 중국은 Ch?n)으로 알려진 것은 이처럼 일본에 의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이다.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그에 대해 ‘근대 일본 최고의 불교학자’라고 평한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본 불교와 근대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선과 전쟁의 문제다. 이 문제를 말하기 전에 근대 일본 불교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제의 부활과 국가신도를 통해 중앙 집권 국가를 확립하고자 희생양으로 불교를 삼았다. 불교는 신불 분리 정책과 폐불훼석을 겪으면서 약 30%가 축소됐다. 그러나 불교의 근대화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교단의 개혁, 불교학의 장려, 포교 방식의 개혁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 권력과의 결탁 또한 만만치 않아 1895년 청일전쟁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의 대외 전쟁에 파견된 군대를 지원하기 위한 戰時敎學을 세웠다. 한마디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 종파의 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인 정토진종의 진속이제(眞俗二諦)의 교학이다. 불법과 국가의 윤리가 상의상자하는 도리이므로, 국가의 일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다. 일련종 또한 왕불명합(王佛冥合)의 일련주의를 내세워 국가와 불법이 서로 의지해 있다는 것으로 국립계단(國立戒壇)의 완성을 위해서는 국가의 대외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했다.

선종 또한 전쟁선(戰爭禪)의 전시교학을 내세워 전쟁을 독려하는 한편, 무사도와 선의 결합을 통해 전쟁 그 자체를 선수행이라고까지 왜곡시켰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왜곡된 교의 아래 전쟁터에서 죽어간 것이다. 13세기 가마쿠라 막부의 장군 호조 도키요리가 임종 때에 좌탈임망한 것처럼 무사들이 선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 자체는 불교의 불살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그런데 조동종의 오랜 역사인 국가 권력과의 거리 두기가 근대에 명확히 나타난 것은 대역사건의 죄목으로 36세에 사형된 우치야마 구도(內山愚童, 1874~1911)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러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의 민주주의적 물결이 일던 소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시대에 활동하던 조동종 승려였다. 당시 일본은 국가의 지원 하에 자본주의가 번창하는 가운데 수많은 농민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도시 빈민의 속출, 쌀값 소동, 파업 등의 노동 쟁의와 같은 많은 사회 문제가 대두됐다. 자본에 의한 침탈로 피폐된 농촌의 농민들은 소농으로 전락해 소작 쟁의를 일으키는 등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1910년 천황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로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가 체포됐다. 그중 주모자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를 비롯한 26명이 기소됐다. 다음 해 1월 24명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12명을 제외한 12명에게 판결 6~7일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여기에 우치야마 또한 연루됐다는 이유로 사형됐다. 대역 사건에는 이외에도 정토진종, 임제종, 진언종 등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이 연루됐다.

우치야마에 대해서는, 농민의 고통은 천황을 비롯한 부자, 대지주에게 있다는 『無政府共産』이라는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한 것을 이유로 삼았다. 이 저술에서 그는 반전사상은 물론 소작료나 세금의 납부 거부, 징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1904년, <평민신문>의 「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기고에서 “나는 불교의 전도자로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차법평등무고하(此法平等無高下), 일체중생적시오자(一切衆生的是吾子)라고 하는 이것이 나의 신앙의 입각지인 금언인데, 나는 사회주의가 말하는 바 앞의 금언과 완전히 일치함을 발견하여 마침내 사회주의의 신자가 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진리 앞에 불성의 내적 평등성과 사회주의의 사회적 평등 사상이 일치함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불법을 전하는 승려로서 불타의 입장을 대신해 고통 속의 민중이야말로 자신의 자식이라고 본 것이다. 1993년에는 우치야마에 대한 교단의 명예 회복이 이뤄졌으며, 그의 사후 100년이 된 2011년에야 비로소 조동종은 「참회와 평화 실현을 향한 서원」이라는 담화를 통해 참회하고 사죄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선불교와 관련해서 최근 등장한 학문적 경향으로서 비판불교 사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주도한 마쓰모토 시로(松本史朗)는 1989년 『연기와 공: 여래장사상 비판』을 통해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불타의 연기설에 대해 基體說(dh?tu-v?da)에 해당하는 여래장은 차별과 부정의를 낳으므로 이것은 불교 본래의 성격과는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는 여래장 사상은 토착적인 애니미즘적 사고나 민속 종교가 이론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우메하라 다케시가 일본 사상에 깃든 무정물의 ‘성불’이나 ‘和’를 강조하는 것을 안이한 찬양 일변도의 일본주의라고 보고 비판한다. 이를 통해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근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불교의 기본 요소인 ‘무념무상’, ‘직관’, ‘불립문자’와 같은 개념들이야말로 여래장이나 본각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말 또한 해탈될 자아가 있다고 하는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비불교적이며 반불교적인 것이라고 한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아이디어가 해탈될 자아를 전제하는 일종의 기체설이라는 보는 것이다. 결국 선 사상의 철학적 기반인 여래장의 장(garbha)의 담론을 베다식의 아트만 이론으로의 회귀라고 본다.

이에 동조하는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 또한 1989년의 『본각 사상 비판』, 1990년의 『비판불교』를 통해 본각 사상의 비불교적인 점을 주장하고 선, 교토 철학, 『유마경』의 不二 사상 또한 비불교적 사상이라고 한다. 하카마야 또한 마쓰모토의 기체설 비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는 불타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아트만에 대한 대응으로 확립된 연기의 법칙이며, 불교의 도덕적 요청에 대해 무아로서 행동하는 것, 그리고 연기에 입각한 신앙, 언어, 그리고 지혜의 사용이 요구된다고 한다. 후자의 저술에서는 마쓰모토처럼 국가의 관계 속에서 종교가 和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똑같다고 하는 무비판적인 수용과 굴종적이고 감상적인 관용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和를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비폭력적인 반전의 자세라고 한다.

결국 천황제마저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비판하게 된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자 향후에도 대두될 수 있는, 국가주의에 종속될 여지가 있는 종교적 자세에 대한 강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도 결국 비판적인 견지에서 시비를 가린 뒤에 수용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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