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빈’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 최고의 변종예술가로 나치에 낙인찍혀
‘모던 빈’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 최고의 변종예술가로 나치에 낙인찍혀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4.1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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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6. 오스카 코코슈카
▲ 코코슈카(메인으로 크게). 미네아폴리스 예술 학교 객원교수로 있던 시절, 담배를 피고 있는 코코슈카를 얼 슈베르트가 담았다. 1957. ⓒ Universitüt für angewandte Kunst Wien, Oskar Kokoschka-Zentrum. 출처=http://www.leopoldmuseum.org/en/exhibitions/50/kokoschka-the-self-in-focus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는 193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코 프라하로 망명했다. 나치는 코코슈카를 변종예술가 중 최고의 변종예술가로 낙인찍으며 히틀러 예술의 敵 넘버원(Nr. 1)으로 등급을 매겼다. 나치는 독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코코슈카의 작품 417점을 압류하고, 그 중에서 작품 8점을 1937년에 개최된 뮌헨 변종예술 전시회에 진열했다.

독일에서 변종예술 전시회가 열리던 1937년, 코코슈카가 망명해 있던 프라하에서는 ‘오스카 코코슈카 연맹’이 결성됐다. 이 연맹은 나치 독일 藝術觀에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망명 예술가 단체로, 모임과 전시회 개최 등을 통해 그들의 예술관을 확립하고 활동하는데 창립 목적을 두고 있었다. 독일에서 나치 문화정책에 입각해 당시의 시대적 흐름인 작품들을 변종예술로 낙인찍으며 비방하는 것에 대항해 비록 독일에서 쫓겨났지만 사실상 독일을 대표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모임을 갖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본인들의 예술을 내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도 오랫동안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체코로 망명을 떠나온 지 4년이 지난 1938년, 체코와 나치 독일제국간에 ‘주데텐 위기’가 발생하자 코코슈카는 프라하에서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 서부지역에 속해있던 땅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에는 20세기 초반 당시 350만 명 정도의 독일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히틀러가 이 지역을 독일에 합병시키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토분쟁이 ‘주데텐 위기’다. 독일은 주변의 땅을 합병해 가는 과정에 있었고, 체코는 ‘주데텐 위기’가 발생하자 군대동원령을 선포하며 맞대응했다.

▲ 코코슈카의 자화상

영국 망명 중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센터 집행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오스트리아 망명단체인 ‘자유 오스트리아 운동(Free Austrian Movment)’과 ‘젊은 오스트리아 (Young Austria)’와 긴밀한 접촉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코코슈카가 활동했던 단체가 말하자면 이들의 망명 산하 단체인 셈이었다. 코코슈카는 망명신문에 글들을 기고했고, 미술 전시회 등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모임뿐만 아니라 ‘자유 독일 문화연맹’의 의장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망명 중이던 1941년, 망명지 런던의 한 공습 지하 대피소에서 올다 팔코브슈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영국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폴페로로 거주지를 옮겼다.

30여년 영국 국적 … 1975년에 고국 오스트리아 국적 회복

영국 망명 중 그림 「붉은 계란」(1941)과 「합병―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42)가 탄생했다. 코코슈카는 이 그림의 수익금을 ‘자유 오스트리아 운동’ 단체에 기부했다. 망명 중 끊임없이 망명활동을 지속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후인 1946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했고, 1953년 영국 국적 소유자로 고국 오스트리아로 귀환하지 않고 스위스로 이주했다. 2차 대전 이후 스위스의 취리히와 바젤에서 최초로 거대한 전시회를 개최했다. 스위스로 이주했지만 고국에서도 활동은 했다. 1953년 오스트리아 소재 잘츠부르크에서 프리드리히 벨츠와 공동으로 ‘잘츠부르크 인터내셔널 하계 미술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1963년까지 원장을 지냈다. 30여년 정도 영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1975년에야 고국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했다.

▲ 「합병-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53년 스위스 레만 호(일명 제네바 호) 호반에 위치한 도시 몽트뢰(Montreux)로 이주한 후 유럽 각국은 물론 수많은 유럽 이외의 나라들을 여행했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망명기간이 아니라, 전쟁이 막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던 시기에 망명지였던 영국국적을 취득해 30여년 정도 소지했다가 말년에 가서야 조국의 국적을 회복했고, 조국의 이웃나라인 스위스에 정착해 결국에는 1980년 스위스 몽트뢰에서 94세로 영면했고 그곳에 묻혔다. 지금까지 스케치 해본 것이 망명을 떠나면서부터 영면하기까지의 오스카 코코슈카의 인생경로였다. 오스카 코코슈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20세기 유럽의 풍경인 독일 망명 지식인과 관련해 오스카 코코슈카에 대해서는 무엇을 물어야 할까.

첫 번째로 떠오르는 질문이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인에 관한 문제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인이라 해도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던 시절 독일 공공기관의 현직에 있었거나 정치활동 등으로 인한 나치의 반대파였다면 당연히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오스카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망명을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1934년이라는 년도에 관한 문제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에 머물던 대부분의 나치 반대파 지식인들이나 유대인들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도망치듯 나치 치하를 떠났기 때문이다. 셋째로 코코슈카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저명한 표현주의 화가였기 때문에 표현주의와 나치 예술관과의 충돌문제다.

이 정도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면 더 이상 질문을 열거할 필요도 없이 오스카 코코슈카의 망명원인에 대해 작업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단순히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을 염두에 두고 글이 나아가할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코코슈카는 무엇보다도 표현주의 화가였고, ‘모던 빈(Wiener Modern)’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 두 표제어가 위의 질문들에서 이끌어낸 사항들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대표적인 ‘모던 빈’화가로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1890~1918)를 꼽는데, 클림트는 유겐트슈틸 (Jugendstil) 화가이고, 코코슈카와 실레는 표현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그런데 화가들의 연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클림트와 실레는 1918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즉 나치가 소동을 벌이던 1933년 이후의 망명과는 별도의 인물이다. 그러니 이들 대표적인 화가들 중 코코슈카만이 망명을 떠난 모던 빈 화가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글은 자연스럽게 망명을 떠난 ‘모던 빈’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에 대한 주제로 압축이 된다. 주제가 설정 된 후에는 망명의 원인, 망명 기간 중의 예술 활동 등을 추적하게 되는데, 망명의 원인은 ‘모던 빈’과 ‘표현주의’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모던 빈’ 출신이란 이유로 히틀러의 증오 대상이 되다

히틀러 나치가 코코슈카와 같은 화가를 변종 예술가로 지목한 표면적인 이유는 표현주의 화가라는 사실 때문이지만, 그 이면을 잘 살펴보면 ‘모던 빈’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틀러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화가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고, 코코슈카보다는 3살 아래로 동년배로 증오의 감정이 깔려있었다. 게다가 나치와 ‘모던 빈’ 출신의 증오의 감정은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의 본산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뛰어난 학자들 중 대다수를 보면 유대인 혈통이 득실거리고 있던 곳이 당시의 현대화된 도시 빈이었다. 

‘모던 빈’을 설명하기 이전에 코코슈카와 빈, 그리고 표현주의와 코코슈카의 관계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코코슈카의 선조는 프라하에서 금세공을 하던 가족이었고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에서 대리점상을 운영했다. 코코슈카는 수도 빈을 둘러싸고 있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화가가 한 살 때 부모님이 가족을 이끌고 빈으로 이사했다. 수도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한 격이었다. 코코슈카는 빈으로 이사해 빈에서 자랐다. 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던 코코슈카는 1905년부터 1909년까지 빈 소재 미술직업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림을 배우던 시절 구스타프 클림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 감명을 받았다. 클림트로부터 성적인 것, 병적인 것, 인간 실존에 관련 된 것, 죽음 등을 배웠다. 그런데 현대건축의 이정표를 놓은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의 지도를 받기시작하며 당시 지배적인 유겐트슈틸을 이미 일찍부터 탈피했다. 기괴하고도 왜곡 같은 표현주의 수법을 이미 사용하는 법을 초창기부터 익혔다. 수채화처럼 엷게 칠하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마르지 않은 물감을 긁고 휘저어서 선이 가득한 수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인간 이미지에 대한 관습을 타파했다. 이러한 모든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강한 정신분석의 영향이었다.
 
표현주의란 ‘표현’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expresso’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20세기 초반 유럽 미술계에 나타난 ‘표현예술’을 지칭하는 데서 출발했다. 폴 세잔느, 앙리 마티스, 빈센트 반 고흐 같은 미술가들이 ‘표현예술’을 사용한 화가들이었다. 표현주의는 쉽게 말해 표현적 측면이 미학적, 객관적인 측면보다 강하다는 데 무게를 두는 예술양식이었다. 영혼의 표현에 주력했고, 인상주의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유희를 벗어나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표현주의를 주도한 사람들은 1875년부터 1895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 화가, 조각가들인데, 이들 세대들은 독일 제국 탄생과 깊은 연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 대도시 경험, 빌헬름 2세 치하(1888~1918)를 겪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예술사적 흐름에서 코코슈카의 경우는 빈의 표현주의에 속하는 화가다.

말러의 미망인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기도

▲ 미망인 알마 말러와의 사랑을 표현한 「바람의 신부」(1914)

구체적으로 코코슈카의 작품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 1910년에 그린 「헤르바르트 발덴 초상화」를 보면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대머리 얼굴에 모던을 짙게 풍기는 안경을 쓰고, 다양한 색상으로 얼룩진 얼굴피부는―그 중에서도 회색빛 바탕의 빨간 색깔이 선명한―마르지 않은 물감을 긁고 휘저은 수법을 사용한 작업 과정이 확연히 드러난다.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풍이다. 신경과민적으로 선을 그어대고 긁어대며 신체를 왜곡한 모습이 선연히 드러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뜩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심사의, 신경과민적인, 아니 더 나아가 병적인 현대인의 모습이 절절히 드러나고 있다. 불안하게 윤곽선을 흐리게 하고, 어떤 곳에서는 강력한 물감을 쓰며 현대인의 잠재의식과 무의식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코코슈카는 평생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초상화를 그린 주요 목적은 현대인들의 예민한 상태와 신경과민증, 그리고 단순한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의 외양을 그린 것 같지만, 인간의 내적 힘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기 위해 찌그러지고 특이한 외양을 그렸다. 초창기 표현주의 수법의 초상화는 그림 선생님이었던 로스의 중개로 잘 팔려 나갔다. 구매자는 대부분 독일 박물관이었다. 1910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표현주의 잡지 <폭풍 (Der Sturm)>에 리브레토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을 발표했다. 코코슈카는 화가이자 문인이었다. 표현주의 운동을 화폭과 연극으로 실천한 예술가였다. 베를린에서 빈으로 다시 돌아와 1911년부터 1914년까지는 미술직업학교의 조교를 지냈다.

▲ 코코슈카가 사랑한 미망인 알마 말러

1911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말러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1912년부터 동거에 들어갔고, 1913년에는 알마 말러와 이탈리아 여행도 했다. 3년간의 격정적이고도 소유욕에 불탔던 관계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났다. 알마 말러와의 격정적인 관계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그림, 드로잉, 판화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를 위해 「바람의 신부」를 그렸고, 「폭풍」을 색칠해 나갔다.

코코슈카에게 알마 말러는 ‘거무스름한 절벽 너머로 /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 바람의 신부’였다. 소유하려고 했고, 결혼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매혹적인 여인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바람의 신부일 뿐이었다. 알마 말러와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그림 그리기도 전과는 다르게 엷은 채색을 점차 사용하지 않고, 활력 넘치는 터치로 진한 물감을 두텁게 바르면서 그림 표면에 평평한 면에 그림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浮彫를 만들어 넣었다. 평평한 그림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랑의 혹이었고, 쓰라린 아픔이었다.

이제 오스카 코코슈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던 빈’에 관해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모던 빈’은 오스카 코코슈카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수많은 지식인들과도 관련된 중요한 대목이다.

‘모던 빈(Wiener Moderne)’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하던 대략 1890년부터 1910년 사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문화적 지적 사회적 분위기 및 생활을 말한다. 1890년이라는 해는 코코슈카가 4~5세 때이고, 1910년이라는 해는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24~25세 때다. 코코슈카는 전형적인 ‘모던 빈’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모던 빈을 대표하는 화가로 예술계에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오스트리아 도나우제국이 몰락해가기 이전의 빈 분위기는 철학, 회화, 건축, 음악, 문학의 최고 전성기였다. 수학, 의학, 경제학, 법학도 마찬가지였다. ‘모던 빈’은 문화와 학문의 융성기였다. 빈은 학문과 예술을 주도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모던 빈’의 정신이었고,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모던 빈’은 자연주의에 반대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내걸며 탄생했다. 빈의 세기말 풍경이었다. 파리와 베를린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빈의 분위기는 특히 독특했다. 2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거주하던 1900년 빈에는 경제적으로나 지적인 상류사회가 운집한 중부 유럽 문화의 용광로였다. 현재 빈의 인구는 200만 명이 되지 못한다. 그 당시가 100년이 지난 현재보다도 더 활발하고 화려한 대도시였다.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 시온주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뒤엉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1914년 통계를 보면 빈 전체 시민의 9%가 유대인이었고, 이들은 예술이나 학계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칼 크라우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프레트 폴가가 유대교를 믿고 있었다. 아방가르드가 수입됐고, 프리드리히 니체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담론의 중심에 서있었다. 베를린과 빈의 문화가 끊임없이 교류했다. ‘모던 빈’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897년의 ‘빈 분리파’ 창립이었다.

보수우파가 득실거리는 사회에 대한 염증으로 망명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세계적인 철학자, 심리학자, 사회과학자, 자연과학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에른스트 마흐는 철학, 물리, 과학이론으로 명성을 날렸다.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에서 중요한 업적을 쌓았다. 루트비히 볼츠만, 프란츠 브렌타노, 루돌프 카르납, 에드문트 후설, 칼 포퍼가 ‘모던 빈’의 철학자였다. 법학자로는 한스 켈젠과 안톤 멩거가 있었고, 저명한 경제학자로는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칼 멩거, 루트비히 폰 미제스, 요셉 슘페터가 활동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심리분석으로 심리학 분야의 혁명을 일으켰고, 1899년에는 세기적인 저서 『꿈의 해석』이 출간됐다. 수학자로는 쿠르트 괴델, 한스 한, 칼 멩거, 리하르트 폰 미제스가 있었다. 알반 베르크,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부르크너,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폰 베버른이 음악 분야의 ‘모던 빈’ 출신이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망명을 떠난 이유는 구체적인 위험현실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보수 우파가 득실거리기 시작하는 빈 사회를 보며 앞날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예감은 변종예술가 중 최고의 변종예술가로 낙인찍히며 히틀러 예술의 적 넘버 원으로 등급 매겨지는 현실로 나타났다. 코코슈카는 망명 활동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붉은 계란」과 「합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통해  망명 지식인의 비판의식이 잘 대변되고 있다. 「붉은 계란」 그림 배경에는 프라하가 불타고 있고, 식탁 의자에는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종이로 된 철모를 쓰고 있다.

‘합병’이라는 제목의 그림도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떠올리면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코슈카는 그림을 통해 그의 방식대로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예술가의 본분이, 망명 지식인의 본분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코코슈카는 예술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왜 코코슈카가 2차 세계대전 후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30년 동안 망명지에서 취득한 국적을 소유하며 이웃 나라에 머물렀는지, 80여세가 돼서야 고국의 국적을 회복했는지 등의 말 못할 사정은, 말하지 않은 사정은 그림을 보듯이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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