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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시대 여행작가가 쓴 ‘열대의 초대장’
빅토리아시대 여행작가가 쓴 ‘열대의 초대장’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4.11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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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반도』 이사벨라 L. 버드 비숍 지음, 유병선 옮김, 경북대출판부, 444쪽, 25,000원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 一八九三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會員이다 /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 내시, 外國人의 종놈, 宮吏들뿐이다 그리고 / 深夜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 闊步하고 나선다는 이런 奇異한 慣習을 가진 나라를 /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 天下를 호령한 閔妃는 한 번도 장안 外出을 하지 못했다고……”(김수영, 「거대한 뿌리」(1964),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모더니스트이자 그것의 초극을 위해 질주했던 시인 김수영의 시편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이름, 이사벨라 루시 버드 비숍(1831~1904). 순종적 여성상을 미덕으로 삼던 빅토리아 시대에 단신으로 지구촌을 누비며 무려 열다섯 권의 책을 저술했던 여행작가인 비숍은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기도 했다. 비숍의 일대기를 쓴 이블린 케이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통통하고 단단한 몸집을 한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었으며, 언제나 자신의 건강과 외모와 능력을 의심했다. 그녀가 가진 것은 단 한 가지, 모험이 가득한 여행에 대한 열정이었다.”

시인 오봉옥은 김수영이 “비숍의 책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8)을 읽고 어떤 자각이 있어 쓴 시가 이 작품”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자각’은 전통에 대한 것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이렇게 어느 순간 한국 시문학사에, 나아가 문화사와 지성사에 얼굴을 드러냈다. 김수영이 읽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백년 전 한국의 모든 것』은 이인화가 1994년에 번역했다. 이 책은 2000년 정치학자 신복룡 교수에 의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로 재번역됐다. 중국 여행기인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2005)도 소개됐고, 버드의 일정을 따라 일대기를 재구성한 이블린 케이의 『이사벨라 버드: 19세기 여성 여행가 세계를 향한 금지된 열정을 품다』(2009)도 번역돼 있다. 이제 여기에 경북대출판부에서 내놓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 반도(Golden Chersonese and the way thither)』(유병선 옮김, 이하 『황금 반도』)가 더 보태졌다.  

말레이반도 풍경까지 담아낸 여행서의 고전

『황금 반도』는 비숍이 187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 25일까지 두 달간 홍콩, 광저우, 사이공, 싱가포르를 거쳐 당시만 해도 유럽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말레이반도 서안의 말레이 왕국 숭에이 우종, 슬랑오르, 페락을 탐사하고, 생동하는 필치와 뛰어난 통찰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여행서의 고전(1883년)이다. 김용훈 경북대출판부 기획편집실장은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오늘의 말레이시아에 관한 인상이 버드의 황금반도를 알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입을 모은다”고 말한다.

책을 옮긴 유병선은 이 책의 미덕이 여전히 각별하다고 지적한다. “우선 19세기 후반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영국 제국주의 팽창의 현장을 목격한 흔치 않은 사료라는 점”을 꼽았다. 1870년대 후반은 영국의 식민지 전략이 18세기 후반 페낭 점령에서 시작된 ‘거점 지배’에서 말레이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영역 지배’로 이해하던 무렵이었다. 버드는 짧은 일정에도 영국 식민지 관료와 말레이 술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중국인과 인도인 등 아시아계 이주자와 말레이 민중의 삶이 어떠한지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제국주의적 글쓰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적지 않다는 문제도 있지만,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역사와 정치’가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유병선은 “역사상 버드만큼 세상 구석구석을 두루 여행하고, 지금도 읽히는 뛰어난 여행기를 많이 남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추켜세운다. 

또 하나 특기할 대목은, 번역자인 유병선의 지적처럼, 이 책은 ‘열대 예찬’이자 ‘열대로의 초대’라는 점이다. “버드는 정글을 살피면서도 ‘이름 모를 꽃’ 따위로 무성의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나무와 풀과 새와 곤충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6년 전인 1873년 하와이에서 반년을 더 머물면서 열대의 풍부한 식생과 원주민의 삶을 탐사하며 익힌 경험과 지식이 바탕이 됐다고 한다. 아울러 정글은 일출을 어떻게 환호하는지, 황홀한 열대의 일몰은 어떻게 어둠을 한달음에 달려오게 하는지, 밤의 꽃향기는 해풍을 타고 어떻게 흩어지는지, 이슬은 밤새 열대의 자식들을 어떻게 보듬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세밀화처럼 펼친다.” 그래서 옮긴이는 “이보다 근사한 황금 반도로의 초대장을 어디서 찾겠는가”라고 감탄한다.

사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메타포’가 일종의 제국주의적 인식 기계라는 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비숍은 그의 발길과 눈이 닿는 곳마다, 서구적 지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읽어내고 명명한다. 열대조차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여행기는 제국주의적 글쓰기의 한 전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의 깊숙한 곳에 이르면(그리고 이런 대목이 곳곳에 별처럼 빛을 내고 있다), 이 제국주의 시선이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것임을 이내 알아챌 수 있다.

23개의 편지, 제국주의적 글쓰기의 이면

“갑자기 번개가 쳤다. 푸른색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찰나였다. 우리가 거스르는 강의 양편엔 30~45미터 높이로 자란 거목의 가지들이 서로 맞닿아 하늘을 갈고 있다. 강물은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흐른다. (중략) 이들 교목 아래에는 거대한 고사리류와 각종 난초, 그리고 진하고 달콤한 향기의 꽃을 피우는 관목들이 밀림의 바닥을 가득 채운다. 아, 나의 독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직접 보아야 하는데! 밀림의 모든 게 너무나 경이롭다. 글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文才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찰스 다윈은 열대 지역(그리고 그런 열대)을 방문한다는 건 새로운 행성을 방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참으로 적절한 비유를 든 바 있다. 이 새로운 경이의 세계는 무척이나 매혹적이고, 애타게 하며,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까닭에 나를 절망하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본 것을 독자들도 볼 수 있게 할 재간이 없이 때문이다! 자연의 풍요와 常夏의 더위 속에서 나는 지금 1월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 영국에는 서리 내린 땅 위에서 나무와 풀들이 시든 채 삭풍을 맞고, 앙상한 가지와 엉성한 솔잎의 소나무들이 겨울밤 차가운 별빛 아래 흔들리고 있을 테다.”

모두 23개의 편지로 이뤄진 이 책은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을 가득 담고 있다. 비숍의 눈을 따라가면 마치 그와 함께 여행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인문지리학자의 통찰력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책이다. 덧붙인다면, 김수영은 시 「거대한 뿌리」에서 비숍 여사가 1893년에 조선을 방문한 것으로 썼지만,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비숍은 1894년에 조선을 찾았다고 썼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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