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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체 필법 돋보이는 秋史의 ‘편액서첩’ … “글씨 자체가 佛像”
예서체 필법 돋보이는 秋史의 ‘편액서첩’ … “글씨 자체가 佛像”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7.03.21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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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50. 무량수불(無量壽佛)

조선시대의 명필은 石峯 韓濩(1543~1605)와 圓嶠 李匡師(1705~1777), 秋史 金正喜(1786~1856)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필적은 여러 형태로 전해지는데 簡札, 扁額, 書帖, 屛風, 上樑文, 佛經, 金石文 등으로 확인된다. 書體 또한 행서체, 예서체, 초서체, 해서체, 전서체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 金正喜 宗家 遺物 「金正喜肖像」보물 제547-5호

추사 김정희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서화가다. 왕실의 외척으로 태어나서 문과에 급제하고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해 수도인 燕京에 체류하면서 考證學의 최고 권위자인 翁方綱, 阮元과 교류하며 친분을 맺었다. 김정희는 이 시기에 이미 북학파의 수장인 박제가의 제자로서 고증학으로 학문의 방향이 세워진 상태였다.

문과급제 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 조정의 관리를 역임하는 동안 김정희는 17년간의 유배생활(고금도 유배 6년, 제주도 유배 9년, 함경북도 북청 유배 2년)을 겪는 험난한 정치역정을 맞기도 했다.

김정희의 학문은 고증학을 바탕으로 金石學에 독보적인 업적을 이뤘는데 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禮堂金石過眼錄』과 같은 훌륭한 저서를 남기게 됐다. 또한 불교학에도 전념해 白坡와 草衣 등 여러 승려와 교류했으며 노년에는 과천 봉은사에 머물며 올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예술분야에는 이미 20대에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시대별 서체를 익혀서 고대의 隸書體에 書道의 근본이 있음을 깨닫고 중국의 서체를 모방한 단계를 넘어서 추사 김정희 만의 독창적인 필체를 연구했다. 결국 김정희는 말년의 제주도 유배기간 중에 서투른 것 같으면서도 맑고 고아한 뜻의 졸박청고(拙樸淸高)한 秋史體를 완성했다.

▲ 사진① 편액서첩

(사진1)은 최근에 필자가 실견한 조선후기의 편액서첩으로 희귀본이다. 가로 26cm, 세로 27cm로 절첩본의 형식으로, 펼치면 여러 장의 편액용 글을 확인할 수 있다. 阮堂 金正喜를 비롯해 丁學敎, 尹杏農 등의 작품도 있으며 같은 시대의 여러 필적이 모여 있다(사진2~3). 이중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것은 阮堂의 작품인 ‘無量壽佛’이다(사진4).

▲ 사진② 정학교의 작품(위) 사진③ 윤행농의 작품(아래)

무량수불은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는 수명을 지닌 부처로 阿彌陀佛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머물고 현재까지 설법하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염원을 품은 부처다. 이 부처를 염하는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말기 대중의 생활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현재도 대부분 사찰의 극락전이나 무량수각에 아미타불이 모셔진다.

▲ 사진⑤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위) 사진⑥ 예산화암사 무량수각현판(아래)

김정희는 자택의 경내에 華嚴寺라는 가족의 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불전을 공부했으며 말년에는 삭발하고 봉은사에 기거할 정도였다. (사진4)의 ‘무량수불’은 평소 불교에 심취한 김정희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 보인다. 隸書의 법도에 충실하고 글자의 필획이 절묘하며 기름지고 두터우며 기운찬 필법이 돋보인다. 나무를 깎아서 목조불상을 만들거나 청동을 주조해 금동불상을 만들지 않아도 글씨자체가 造成된 불상인 것이다.

해남 大興寺의 ‘無量壽閣’(사진5)은 秋史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원교 이광사의 현판에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그 일화란 이런 것이다. 원래 해남 대흥사 대웅전에는 원교 이광사가 쓴 현판 ‘大雄寶殿’이 걸려있었는데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가 “저런 것도 글씨냐”라며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이 써준 ‘무량수각’ 현판을 달게 했다. 유배가 풀린 8년 후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린 추사는 전에 떼어냈던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대웅전에 걸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의 현판은 다른 건물에 붙이게 했다. 자신의 오만했던 행동을 유배생활동안 깨달았다는 것이다.

▲ 사진④ 무량수불(완당)

예산 華巖寺의 ‘無量壽閣’(사진6)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인 1846년에 화암사 중창에 부탁을 받고 써 보낸 것으로 유배 전에 대흥사에서 쓴 것보다 필획이 간결하고 기름기가 없으나 힘이 있고 명료해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 김정희가 그린 자화상

(사진4)의 ‘無量壽佛’은 해남 대흥사에서 쓴 ‘무량수각’(사진5)과 서체의 기운찬 필획과 둔중함이 일맥상통해 제주도 유배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가로 81cm, 세로 34cm로 두꺼운 한지에 진한 묵으로 완성했다.

추사 김정희는 모든 서체에 능숙했으나 특히 예서체의 작품이 더욱 뛰어나며 가장 예술성이 높다. 특히 현판글씨에서 추사체의 가장 큰 특징과 예술적 완성도를 느낄 수 있다. 
조선 말기에 학문, 문학, 예술, 불교교리에 선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추사 김정희는 굴곡진 생의 여정을 겪으면서도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을 바탕으로 연구해 후세에 길이 보전될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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