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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복사에 '반값교재' 극약처방 … "잘 만들면 뭐합니까?"
불법복사에 '반값교재' 극약처방 … "잘 만들면 뭐합니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3.16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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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_ 학술출판이 미래를 만든다: ① 학술출판이 놓인 현주소

빠르게 전환한 디지털환경 속에서 ‘학술출판’의 자리가 계속 위협받고 있다. 학술전문서는 시장에서 점점 위축되고 있다. 불법복제, 북스캔, 베끼기 출판, 출판사의 정당한 노력에 대한 보상 시스템의 부재, 정부의 정책적 방임 등이 손꼽히는 장애물이다. 학술 전문서와 대학교재 등 질 높은 출판 콘텐츠를 확보해야할 시기임에도 안팎의 장애와 싸우는 한국 학술출판 상황은 안타깝기만 하다. 학술출판이 살아나야 지식과 문화의 지평이 두터워질 수 있다. <교수신문>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학술 출판이 처한 현주소, 문제점, 그리고 대안을 모색하는 ‘학술출판이 미래를 만든다’(총 10회)를 격주로 싣는다.

 

 

 

 

 

 

3 월 신학기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출판가에서다. 뜻밖이라고 썼지만,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대학교재를 내놓는 한 출판사에서 극약처방을 던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북스가 ‘반값 교재’를 출시했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신학기마다 대학가엔 불법복사가 난무합니다. 서너 과목마다 사야 하는 교재는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강의자들도 불법인 줄 알지만, 학생들 사정을 고려해 대부분 침묵합니다. 학교 안팎의 복사집도 쉬쉬하면서 동참합니다. 불법복사는 출판사 경영은 물론 저자의 저술 의욕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들의 설명은 이어진다. “강의자가 맘 편하게 권하면서도 학생은 정당하게 (교재를) 살 방법이 필요합니다. 커뮤니케이션북스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값교재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내놓은 ‘반값 교재’는 물론 단행본 책의 형태 그대로는 아니다. 제본하지 않은 낱장 출력물이지만 가격은 절반이고,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합법교재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반값양심교재는 불법 복사가 판치는 대학가에 새로운 문화가 될 것”이라고까지 기대한다.
 
확실히 이 ‘반값양심교재’는 눈물 나는 극약처방이다. 그러나 여기엔 책값만 효율화하면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어서 조금 불편하다. 표지도 없고, 제본하지 않아 낱장으로 공급하며, 워터마크를 넣어 불법 복사를 차단하며, 저자에게 저작권료를 주는 합법 출판물이며, 서점과 낱권 판매 없이 출판사 공동구매로만 판매하는 ‘반값 교재’. 아이디어는 기막히지만, 과연 이것이 침체일로의 한국 학술출판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반값교재, 그 극약처방의 배경

어쩌면 이들의 반값교재 출시 배경에서 학술출판의 침체 요인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학가가 불법복사의 온상이 됐다는 지적, 경제적 이유에서 학생들이 교재 구입을 회피한다는 것, 교수들이 이런 사정을 알지만 학생들 주머니를 생각해 침묵한다는 것. 그래서 그 결과 “불법복사는 출판사 경영은 물론 저자의 저술 의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10월 김진환 한국학술출판협회장은 공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2016년 2학기 서점매출이 10~20% 정도 감소했다고 합니다. 대학구내서점 사장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대학교재류의 책을 주로 출판하고 있는 학술도서 출판사들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2018년이 되면 인구절벽에 이를 것이라고들 합니다. 출판계에서 학생수의 감소는 시장의 자연감소를 의미합니다. 학생수가 감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학정원도 감소하게 되고 매출하락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대학교재를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들을 가장 힘들게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불법복사입니다. 이런 고충을 언론에도 호소해보고, 정부에 탄원서도 제출해 보고, 대학총장님들에게 협조도 요청해 봤습니다. 하지만 불법복사는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다가 그나마 학술출판사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았던 ‘우수학술도서지원사업’도 취지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세종도서’라는 명칭으로 변경돼 시행되면서 불만을 사고 있다. 학문적 가치가 높은 책이 많이 출간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자는 취지는 사라지고, 대중서를 지원해서 예산의 효용성을 높이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게 출판계의 지적이다.

학술 출판사들을 옥죄는 환경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디지털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디지털복제가 무한 가능해졌고, 북스캔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복사기법도 등장했다. 물론 북스캔 업자들은 그에 따른 저작권료를 ‘저자’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하지만, 책의 탄생에 공동 책임을 나눠 갖는 출판사들은 여기서도 배제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 출판인은 이렇게 푸념까지 한다. “책을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잘 만들면 뭐합니까? 학생들은 교재로 구입도 않고, 교수들은 모른 체하고, 곳곳에서 불법 복사합니다. 아예 파일 통째로 넘겨주는 곳도 있어요. 정부도 뒷짐지고 나 몰라라 하고 있고요.”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내놓은 「출판산업 실태조사(2013~2015)」와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의 「2016 저작권보호 연차보고서」의 두 데이터는 ‘無言의 사실’을 증명해준다. 출판사업체 매출 규모를 살펴보자. 학술/전문서의 경우, 2012년 2천375억1천700만원, 2013년 2천237억6천300만원, 2014년 2천185억5천100만원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불법 복제물 시장규모는 2012년 675억원, 2013년 736억원, 2014년 1천145억원, 2015년 1천418억원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 지표들 속에 ‘대학가의 불법복제’가 포함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출판계는 교재 구매율이 수강생의 30% 이라하고 예상한다. 커뮤니케이션북스측은 “우리 출판사에서 공동구매를 하지 않는 수업의 경우 그 수치에 근접하고 있다. 교재 출판사마다 경영이 악화됐고, 저자의 저술 의욕도 약화했다. 결국 양질의 교재를 재생산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2010년 이후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명강의는 있어도 명교재는 없는 대학 강의

대학가에선 신학기마다 ‘명강의’, ‘명강사’를 강조한다. 賞도 만들어서 치켜세운다. 강의가 반드시 책이라는 ‘교재’를 통해 전달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재’ 없는 명강의를 생각하기도 어렵다. 강의를 강조한다면, 교강사만큼이나 교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게 옳다. 최근에 출간된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는 강의를 통해 어떻게 한 권의 고전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智를 일궈가는 이들이었다보니 스승의 강의를 노트에 옮겨 적어야 했다.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흘러 하나의 지성사적 사건이 됐다. 이 책을 번역한 김성도 고려대 교수의 말이 여운 깊다.

“오늘날의 대학인을 향해 발화하고 싶은 메시지 또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흠모(admirer)’다. 스승 소쉬르의 숨결 하나 놓치지 않고 소쉬르가 남긴 모든 말씀을 옮긴 콩스탕텡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 갖고 있던 막연한 존경을 넘어 흠모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흠모할 때, 그에게는 이런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활력과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이점에서, 학생이 교수를 평가해 그것을 점수화시키는 21세기의 대학의 환경에서 기능성과 효율성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심오한 깨달음과 정신적 교류, 초인적인 학구열 등의 미덕을 경험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대학에서의 강의에는 정보와 지식 그 이상의 것이 있고, 그것은 모종의 성스러움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싶다.”

대학 안에서조차 방치된 대학교재는 한국 지성계의 우울한 초상이다. 제값을 주고 책을 사기보다는 편하게 낱장 복사를 뜬다거나, 디지털로 통째로 출력해서 강의실에 들어서는 한, 그리고 이러한 학생들의 낡은 관행을 모른 척 눈감아주는 건 ‘知性의 자기부정’이며, 장차 사회로 진출할 이들에게 일찍부터 ‘불법’을 경험하게 하는 비교육적·비인간적 처사다. 학술교재의 소멸, 혹은 증발은 출판사와 저자의 의욕을 꺾는 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늦었지만 학술출판에 우리가 좀더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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