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의 삶을 살다 간 자유인의 肖像
경계인의 삶을 살다 간 자유인의 肖像
  • 박선욱 시인 겸 작가
  • 승인 2017.02.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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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윤이상 평전: 거장의 귀환』 박선욱 지음 | 삼인 | 608쪽 | 30,000원

1967년 겨울, 서대문구 현저동의 독방 안에서 윤이상은 엎드린 자세로 오선지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살을 에일 듯한 추위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필을 놀려 신들린 듯이 악보를 채워 나갔다. 그는 곱은 손을 호호 불며 희극 오페라 「나비의 꿈」을 쓰고 있었다. 그는 왜 희망이 사라진 감옥 안에서도 곡을 완성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을까? 이 물음이 글을 밀고 나아가게 했다. 필자는 이 장면을 묘사하는 데 무척 많은 공을 들였다. 이 대목이 윤이상의 삶과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가늠쇠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의 흐름에 입각해 예술가로서 고뇌하는 장면을 소설적인 문체로 그려내고자 했다. 평전 작업은 한 인물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니다. 그 인물이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숨 쉬는 한 인물을 통해 당대의 상황적 진실과 미래 전망을 드러내 보이는 점이 중요하다. 평전 작업은 시간을 뛰어넘는 통시성 속에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지향점을 지녀야 한다.

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했다. 통영은 한반도의 문화가 고스란히 응축, 온존해 있던 문화의 寶庫였다. 전통음악의 음률에 익숙한 윤이상은 세병관에 마련된 보통학교의 한 교실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풍금을 만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육자배기나 판소리, 민요 가락만 듣고 자란 윤이상에게 음악이란 單音의 세계였다. 이에 비해 풍금의 和音은 다성 음악의 세계였다. 그 새로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윤이상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윤이상은 도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동네 청년에게서 바이올린과 기타 치는 법, 오선지 그리는 법을 배웠다. 열세 살 무렵에는 간단한 화성을 곁들인 연주곡을 작곡했다. 어느 날, 봉래극장의 무성영화 막간에 경음악을 연주하는 관현악단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황홀한 경험이었다. 한 평범한 어린아이가 비범한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청년 시절의 윤이상은 비밀조직에 가담해 항일운동에 뛰어든 애국자였다. 조선어로 된 악보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부산에서는 일본에서 돌아온 전쟁고아들을 맡아 기르는 등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통영으로 돌아간 윤이상은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전혁림 등과 더불어 통영문화협회를 결성, 한글 보급운동을 비롯한 문화 창달에 힘을 쏟았다.

방북의 진정한 목적 ‘四神圖’, 그 음악의 원천

1956년 파리 유학을 떠난 윤이상은 이듬해 독일로 건너갔다. 그는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에게 작곡을 배웠다. 블라허는 윤이상에게 아시아적인 음악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을 강조했다. 그의 말은 윤이상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동양적인 색채를 깨워 일으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됐다.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졸업 시험을 통과한 윤이상은 동양음악의 전통을 12음기법으로 구사한 음악을 작곡해 나갔다.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과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은 창작의 소중한 결실이었다.

1959년 가을, 윤이상은 다름슈타트의 국제현대음악제 하기 강습회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네덜란드의 빌토벤에서 열린 가우데아무스 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발표해 전문가와 관객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윤이상은 유럽 음악계의 두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해 주목받는 신진 음악가로 우뚝 섰다. 이후, 윤이상은 유럽에서 점점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63년의 방북은 윤이상의 인생에 깊은 명암을 던졌다. 명목상으로는 북한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四神圖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강서대묘의 고분벽화는 전율 그 자체였다. 청년 시절부터 「백호도」를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영감을 얻곤 했기에, 사신도와의 만남은 그의 음악에 질적인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훗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윤이상은 사신도에서 영감을 떠올린 두 개의 곡을 썼다.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 플루트와 오보에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영상」이 그것이다. 사신도는 윤이상 음악의 원천이었다. 윤이상의 음악과 인생을 조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맥락이기도 했다. 필자는 바로 이 점을 기술하는 데 역점을 뒀다.

1973년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한 김대중 납치 살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의 폭압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1974년 여름, 일본으로 건너간 윤이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 함구했던 동백림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대중 사건’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대사회적 발언을 쏟아냈고, 조국의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위한 시민운동에 돌입했다. 윤이상의 활약에 힘입어 1990년 10월 18일, 평양 2·8 문화회관에서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참여한 가운데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열렸다. 그해 12월 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는 평양의 대표단 33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송년음악회’가 열렸다. 윤이상은 그 스스로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량이 됐다.

윤이상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주요음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 음악은 화성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는 데 비해, 한국의 전통음악은 하나의 음이 고유한 주제를 형성하며 끝까지 이어진다. 윤이상이 창안한 주요음은 여러 음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주제의식을 밀고 나아가게 된다. 이 같은 면에서 윤이상의 주요음은 서양의 음악 어법과도 다르며, 한국 전통음악과도 구별된다. 주제의식을 지닌 音의 무리가 주요음을 구성하고 있기에, 그것은 단선 음향이 아닌 복합 음향으로 존재한다. 1960대 중반 이후 윤이상의 음악적 관점은 자신을 개방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서양 고전음악을 자신의 내부로 수용하는 방법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윤이상은 자신의 미학 취향을 과감히 버릴 줄 알았다. 자신의 음악적 완성을 위해 바흐에게서 푸가 기술을 배울 정도였다. 윤이상이 오늘날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우뚝 선 배경에는 ‘버림의 미학’과 ‘고전에서 새로움을 찾는 자세’를 통해 자신의 음악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데 있다. 윤이상은 일련의 기악 협주곡에서 나아가 다섯 편의 교향곡을 쓰는 동안 자신만의 고유한 유파를 창조한 開祖로 우뚝 섰다.

인류를 고뇌한 ‘다원적 세계주의자’의 삶

윤이상은 남한과 북한,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를 아우르는 경계인이었다. 음악 기법상의 면에서 그는 현대음악과 고전음악의 경계에 서 있었다. 1980년대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작곡한 5개의 교향곡을 통해 그는 독재 체제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고, 반핵 사상을 담아냈으며,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등 인류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만행과 폭거, 핵이 가져올 미증유의 공포와 저주를 경계하는 원대한 메시지를 작품 속에 형상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같은 점에 비춰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마틴 슈미트의 말을 빌자면 윤이상은 ‘다원적 세계주의자’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적인 거장 윤이상이 유독 한국에서는 여전히 정치적 금제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두려운 존재다. 윤이상은 우리에게 낡은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숙제로 남겨 주었다. 필자는 이 평전을 통해 그의 음악이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좀 더 자연스럽게, 좀 더 친숙하게 대중들과 호흡하게 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박선욱 시인 겸 작가

필자는 1982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제1회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등이 있으며, 청소년 평전 『채광석: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 『윤이상: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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