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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휴머니즘의 가능성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원천
새로운 휴머니즘의 가능성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원천
  • 김재희 이화여대 HK연구교수
  • 승인 2017.02.16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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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시몽동의 기술철학: 포스트휴먼 사회를 위한 청사진』 김재희 지음 | 아카넷 | 260쪽 | 17,000원

정보통신기술과 융합된 GNR(유전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및 인공지능) 혁명이 제4차 산업 시대를 개방하며 구체화되고 있다. 사물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자동화 시스템이 결국 인간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 또한 뒤따라 붙는다. 오늘날 휴머니즘의 위기는 과연 기술로부터 오는 것인가? 알파고의 등장은 인간 대 기계의 불가피한 대결을 알리는 서막인가? 스마트폰을 비롯해 다양한 기술적 대상들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이 보여주듯이, 인간과 기계가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인간-기계 앙상블’은 이미 기본적인 삶의 형태다. 수많은 기술적 대상들이 인간 삶의 물리생물학적 조건들을 변형시키며 생존을 위한 필수 환경을 구성한 지 오래다. 기술과 자연의 대립이나 기술과 인간의 대립은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다. 자연, 인간, 기술의 상호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와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휴머니즘의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다.

 

테크노사이언스에 의해 생물학적 역량이 향상된,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근대적 ‘휴먼’의 재생산이 아니라, 비-인간 타자들과 탈-인간중심적으로 공생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기술-정치학적 방향으로 포스트휴먼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의 기술철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통찰들과 개념적 도구들을 제시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50~60년대 기술사적 배경 속에서 이미 사이버네틱스와 정보기술의 통합적 잠재력에 주목했던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선구적으로 보여줬다. 가령, 하이데거, 마르쿠제, 엘륄 등이 인간적 문화에 기술을 대립시키며 기술 발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면, 시몽동은 기계들과 공존하는 인간의 삶을 긍정하며 오히려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식화를 촉구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탁월한 기계들이 인간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SF적 상상력과 기술 발달에 의한 인간 소외의 여러 문제들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기술적 대상들과의 부적합한 관계 방식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술적 대상들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아야 한다”는 파격적인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존재 방식을 가진 개체들 간의 상호 협력적 공존과 연대의 관계다.

“인간-기계는 앙상블 형태로 공진화한다”

생태주의적 기술공포증이나 테크노크라트적 기술만능주의의 양극단을 넘어서 기술과 인간의 앙상블을 강조하는 그의 기술철학은 반실체론적이고 관계론적인 고유한 개체화론과 발생적 생성의 존재론을 토대로 한다. 개체를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환경과 분리불가능한 관계적 실재로 이해하는 시몽동의 시선에서, 인간과 기계는 서로의 존재를 위한 환경적 조건으로서 분리불가능하며, 마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처럼, 상호 협력하는 ‘인간-기계 앙상블’의 형태로, 자연의 생성 역량을 현실화하며 공진화한다.

기술은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소통의 매체이자 변환 역량이다. 인간을 배제하는 자동화는 기술 발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며, 발명과 기술적 활동의 혁명적 역량을 은폐하는 노동 패러다임은 비판의 대상이다. 인간은 로봇이 할 수 있는 ‘노동’으로 축소될 수 없는 ‘기술적 활동’을 해야 한다. 노동은 기술적 대상들이 연장이나 도구 수준에서 인간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 인간이 기술적 개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때 적합했던 개념이다. 기술적 활동은 양립불가능하고 이질적이고 불일치하는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소통의 관계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다. 발명은 인간을 매개로 한 기술적 대상들 사이의 소통과 진화이면서, 동시에 기술적 대상들을 매개로 한 인간들 사이의 소통과 진화다. 인간과 기계가 차이를 공존시키며 연대할 수 있는 길은, 자동성이나 정보처리능력이 아니라, ‘문제, 의미, 정보’ 자체의 ‘발명 역량’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은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들 사이에 정보를 소통시켜주며 기계들의 관계를 조직화하는 조정자이자 기계들의 작동을 새롭게 구조화하고 조절하는 발명가가 돼야 한다. 창의적인 기술적 활동 안에서 인간과 기계는 기성의 존재 방식과 규범 체제를 넘어서 자연의 잠재적 역량을 새롭게 현실화하며, 세계와의 다른 관계 방식 및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존재론적 생성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인간-기계 앙상블’의 상호 협력적이고 창조적인 변환 작동(transductive operation), 바로 거기에 노동하는 인간이 아닌 ‘포스트휴먼’의 미래가 있다.

포스트휴먼 논제의 등장 배경은, 근대적 휴머니즘과 인간 주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비판적 해체 작업 이후, 첨단 기술과학이 인간 삶에 물리생물학적으로 침투하면서 새로운 주체화의 조건으로 급부상한 것에 있다. 인간의 절대적 본성과 자유주의 휴머니즘에 대한 환상이 깨진 소위 인간의 죽음 이후, 새로운 인간의 형태와 대안적 삶의 양식을 어떻게 발명해야 하는가. 인간중심주의의 낡은 휴머니즘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첨단 기술에 기초한 인간-비인간 하이브리드들을 새로운 실재로서 긍정할 수 있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어떻게 가능한가. 포스트휴먼은 도래하는 중이고, 포스트휴먼의 형상은 아직 충분히 개체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 단계 다양한 포스트휴먼 담론들은 생체 변형을 통해 물리 생물학적 기능이 강화된 사이보그 휴먼의 가능성과 그 효과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테크노사이언스에 의해 생물학적 역량이 향상된,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근대적 ‘휴먼’의 재생산이 아니라, 비-인간 타자들과 탈-인간중심적으로 공생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기술-정치학적 방향으로 포스트휴먼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휴먼 사회로의 이행과 시몽동의 통찰

시몽동의 기술 철학은 인간-비인간 앙상블의 탈-인간중심적인 새로운 휴머니즘의 가능성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와 포스트휴먼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보는데 유용한 개념적 원천이 될 수 있다. 시몽동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물리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서 설 수 있는 가능성은, 생명체로서의 인간 개체 안에 내재하는 전개체적 포텐셜(preindividual potential)의 존재와, 이 포텐셜 에너지를 개체초월적으로 집단화해 현실화할 수 있는 기술적 대상들의 변환 역량에 있다. 포스트휴먼은 단지 기술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재하는 ‘자연의 무게’와 더불어 발생한다. 기술은 결여된 인간을 강화하는 단순 보철물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매체로서 인간 사회의 새로운 구조화와 존재론적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경제적 소외와 노동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기술적 소외와 정보 소통의 문제, 인문교양으로 포괄할 수 없는 기술교육의 중요성, 기술적 활동과 발명을 통해 형성되는 개체초월적 집단(transindividual collective) 등 시몽동의 통찰들은 포스트휴먼 사회로의 이행에서 주목해야할 기술-정치적 조건들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시몽동 기술 철학 연구서다. 그만큼 허술한 부분도 많다.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2011)를 번역한 이래, 존재, 정치, 미학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해 온 내용들의 중간 결집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시몽동의 선구적인 사유를 소개하면서 포스트휴먼 사회를 위해 가능한 하나의 청사진을 제시해보는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생을 단지 경제적 풍요의 수단이 아니라 소외 극복을 위한 진정한 소통의 조건으로 사유하며, 기술과 더불어 가능한 사회 변혁과 인류 진보에 대한 전망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김재희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프랑스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베르그손의 잠재적 무의식』, 『물질과 기억: 반복과 차이의 운동』, 번역서로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관하여』(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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