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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 … 윤리 정립이 해법이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 … 윤리 정립이 해법이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윤리교육과
  • 승인 2017.02.06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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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_ 윤리귀환시대에 교수로 살아가기

새해를 맞았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맞을 수만은 없는 시절이 계속되고 있다. 권력자와 함께 사적인 친분을 빌미로 국정을 농단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람의 철면피한 모습이 그에게 아부하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쓴, 이른바 ‘이 땅 엘리트’의 남루한 얼굴들이 지속적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며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도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는 교수 출신들이 훨씬 더 추하고 처량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윤리교육과

교수 출신 장차관이나 수석비서관, 총장은 물론 보직교수와 평교수 가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금방 밝혀질 거짓말을 일삼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생중계 되면서, 교수로서의 자존감은 더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어떤 모임에서 교수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면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움으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시선과도 마주하곤 한다. 다행히 아직은 방학이지만, 봄이 오고 개강을 하면 만나게 될 학생들의 눈빛을 떠올리며 아득해진다. 특히 새내기들의 호기심까지 포함돼 있을 얼굴과 마주할 일이 걱정스럽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각 후보자들이 꾸리는 대선캠프에 참여하거나 얼굴 도장이라도 찍으려는 교수들이 줄을 선다는 말을 흔히 듣곤 한다. 조선 중기 이후 본격화된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 역사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 있을 학자의 정치 참여는 사실 修己安人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선비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없지는 않다. 유독 교수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도 그런 전통이 부분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교수의 정치적 지향이 정당화될 수 있으려면 이 전통에 대한 엄격한 재해석과 실천성이 전제돼야만 한다.

우선 우리 시대의 교수는 지식인이기에 앞서 시민이다. 민주주의의 民主 이념에 해당하는 전제다. 더 나아가 교수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정해진 전문가다. 그 분야를 넘어설 때는 삼가야 마땅하다. 물론 우리 문화 속에서 교수는 실천적 지성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기도 해서, 시대상황을 읽고 사회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전문성에 기반한 삶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20세기 우리 역사는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왜곡된 전통윤리의 강요와 생존문제의 해결, 그 극복과정으로서 민주화 성취라는 세 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윤리는 주로 일제 강점기의 忠孝로 상징되는 노예도덕과 박정희와 전두환 군부독재기의 國民倫理로 왜곡된 채 받아들여졌다. 다행히 우리는 독립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통해 그 외형적인 굴레를 벗어버리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려버리는 잘못, 즉 윤리를 형식적인 법률 속에 가둬버리거나 아예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데 있다. 

윤리는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열망 그 자체다. 이번 사태는 한 사람의 삶과 사회에서 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되고 있기도 하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를 이용해 돈을 모으는 일을 성공과 동일시해온, 압축성장의 질긴 그림자를 직시하면서 진정한 ‘윤리 귀환 시대’를 맞아들이는 새해였으면 한다. 이 땅의 교수는 삶에 대한 성찰을 기반 삼아 자신의 전문분야로 이어져 있는 사회 관계망과 미래까지 함께 바라보면서 학생들과 만나고 공부하는 이 시대 시민이자 지성인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박병기 한국교원대·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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