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동아시아史에 내몰린 존재의 가능성 … '연민의 대상'으로 봐선 안 돼
비극적 동아시아史에 내몰린 존재의 가능성 … '연민의 대상'으로 봐선 안 돼
  • 송기찬 일본 리츠메이칸대·영상학부
  • 승인 2016.12.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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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10.‘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재일동포 젊은 세대의 가능성
▲ 조선학교 운동회의 장애물 경주, 벽을 넘어서 미래로. 학생들은 벽으로 상징되는 일본사회 속의 고난과 경계를 온몸으로 뛰어넘는다. <사진제공=송기찬 교수>

재일동포를 향한 한국사회의 시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기본적인 무관심과 약간의 연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연민이라고 하는 감정의 배경에는 한국 사회문화의 저변에 자리한 민족주의의 영향이 있다. 돌이켜 보면 필자 자신도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연구과제로 삼게 된 계기에는 ‘일본 땅에서 고생하는 우리 동포’라는 민족주의적 연민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996년 2월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은 「재일동포에게 조국참정권을」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는데,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권인 참정권을 일본사회가 주지 않으니 우리 대한민국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한겨레21> 편집장은 권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중략) 자신의 여권이 바로 ‘대한민국’이름으로 된 것이라는 걸 보여줬을 때 나는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배우고 좀 안 듯싶었던 나도 이처럼 우리 재일동포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버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재일동포들에게 조국인 대한민국이 가해자가 돼서는 안 된다. 재일동포, 아니 ‘재일국민’에게 기본권 가운데 기본권인 국정 참정권을 돌려주는 것(이 번호 커버스토리)은 이 시대 대한민국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한겨레21> 1996년 2월 15일)

이 글에서 편집장은 재일동포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고, 재외 국민이라면 당연히 국정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재일동포를 ‘버려두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은 일종의 민족주의적 연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이 기사가 바라던 재외동포의 국정 참정권이 실현되고 재일동포를 둘러싼 환경 또한 많이 바뀌었지만, 이 같은 연민의 관성은 이어진다.

축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일동포 출신의 축구선수 정대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졌고, 북한의 국가대표이며, 작년까지 K리그 수원삼성의 공격수였던 정대세 선수는, 북한의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한국의 프로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보수우익들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됐다. 한 보수우익 미디어 대표는 정대세 선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지만, 검찰은 정대세의 특수한 성장배경을 고려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많은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CBS <노컷뉴스>의 「‘정대세 북한논란’에 담긴 재일동포들의 아픈 사연」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중략) 일본 내 재일동포들은 성인이 되면서 ‘일본적’, ‘한국적(남한)’, ‘조선적(북한)’ 중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 국적은 국적이라 할 수 없다. 일본과 북한은 국교 수립을 맺지 않았다. 즉 일본에게는 국가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자신의 국적으로 정한 재일교포는 그저 무국적자와 같은 신세다.

(중략) 이제 지금의 논란을 살펴보자.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식민지의 고통과 분단의 아픔, 국민국가의 횡포를 받으며 살아 온 존재들이다. 정대세가 북한 국가 대표를 선택했던 것을 탓하기 전에 대한민국 정부와 우리는 재일 교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살펴보자.” (CBS <노컷뉴스> 2013년 6월 2일)

▲ 조선학교 학생 작품 통일 무지개. 한반도 내부의 정치적 현실을 넘어서 통일에 대한 자유로운 발상이 돋보인다.

재일동포의 국적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에 놀랐던 1996년의 기사에 비하면, 재일동포의 국적을 한국, 일본, 조선적 3가지로 구분해서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진작됐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연민의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재일동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기사의 ‘조선적’과 재일동포의 국적선택에 대한 설명은 틀렸다.

조선적은 패전 후 연합국 사령부의 지배하에 있던 일본이 새로운 독립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재등장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제국의 공공권 안으로 포섭했던 구 식민지 출신자들을 일본국민의 틀 밖으로 내몰아내는 과정에서 재일동포들에게 부여된 ‘기호’였지 ‘국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해방 뒤 재일동포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모두 조선적이었으며, 조선적 재일동포는 기본적으로 무국적자다. 이후에 한국과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고, 북한의 해외공민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동아시아의 현대사 속에서 한국과 북한으로부터도 ‘국민’의 틀 밖으로 내몰리게 된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무국적자는 원래 ‘주민’이었던 사람들이 자국의 영토에서 추방되면서 국가의 성원으로서의 신분마저 박탈당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식민주의에 의해 ‘제국의 신민’으로 편입돼 ‘주민’이 됐지만, 전후 새롭게 규정된 ‘국민’이라는 공공권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주민’으로서의 권리까지 빼앗겨 버린 존재인 재일동포의 사례에 아렌트의 정의를 겹쳐 보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에서 민족국가로부터 추방된 존재들이 가지는 전복적 가능성에 주목했다. 정대세 선수의 사례, 즉 분단과 국민국가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삶의 존재 가능성은 이처럼 국민국가의 틀에서 배제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다시 위의 정대세 선수 기사로 돌아가 보자. 정대세의 사례를 통해서 재일동포들의 ‘아픈 사연’을 소개하고자 하는 기자의 ‘좋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사 중에 “일본 내 재일동포들은 성인이 되면서 ‘일본적’, ‘한국적(남한)’, ‘조선적(북한)’ 중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게 된다”는 기초적인 무지는 재일동포들에 대한 타자화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타자화의 무의식적이고도 일상적 실천은 결국, 남과 북으로 대립된 모순적 국민국가론에서 ‘국가’만을 남기고 ‘민족’을 소외시키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우리가 재일동포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라는 이 기사가 민족주의적으로 읽혔다면 그것은 오독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해는 결국, 남과 북으로 분단됐지만, 국적이라는 개인적 정통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의 현존과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구멍을 내야 한다. 정대세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거기에 있다. 더 이상 ‘불쌍한 재일동포’를 바라보지 말고, 동아시아의 비극적 현대사 속에서 국민국가의 틈새로 내몰린 존재가 오늘날 가지는 가능성에 주목할 때다.


 

송기찬 일본 리츠메이칸대·영상학부
일본 교토대에서 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리츠메이칸대 영상학부 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사회인류학, 영상인류학, 재일동포를 비롯한 일본의 소수자들의 아이덴티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語られないものとしての朝鮮?校』(岩波書店, 2012)가 있으며 이 책은 한국의 삼천리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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