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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義·不正 휩쓸려간 교수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不義·不正 휩쓸려간 교수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 승인 2016.12.01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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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7. 인식과 행동 사이
▲ 일러스트 돈기성

옛날에, 청소년기에, 가슴을 떨게 했던 한 문장이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 즉 사유의 주체인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순수존재로서의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은 존재하지만, 그 문장이 완전하지 않음은 한참 뒤에야 터득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다는 의미로서 의식에 가깝다는 것.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 오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식에 가까운 이 의식은 의식할 무엇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 즉 대상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육신이 우리가 섭취하는 것의 총체이듯이,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의 집합이다. 그러다보니 먹고 싶은 것을 좇아 먹이를 구하듯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서 인식하려는 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자유의 개념에 걸면,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무한 자유에 내맡겨진 존재다.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라는 카테고리를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 심지어 생물학적인 질서를 거스르는 동성애자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 이슬람이 될 수도 이슬람을 저주하는 십자군이 될 수도, 아예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다. 되어도 좋다. 다만 무엇이 되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과 더불어 그 책임도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책임을 뺀 그 극단에 가면 곡학아세의 상태가 되는가 보다. 바른 길에서 벗어난 학문,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학자가 많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한국의 수치스런 민낯을 만들어낸 장본인들 중에는 학자 출신이 적지 않다. 폴리패서라고 불리는 모두가 그러할 리는 없지만, 상당수의 빼어난 폴리패서들이 정치권력 앞에서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사전에서 설명하는 '정치'란?

정치의 속성이 학자를 삼켰나? 궁금하면 사전을 찾는 버릇대로 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 서재에 최초의 영어사전이라는 로버트 코드리의 『알파벳 순서로 된 단어일람표』(1604년)는 아니지만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1755년) 사본이 있다. 언젠가 ‘귀리’ 항목에서 너무도 쓰라진 진실을 발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말에게 먹이는 곡물,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의 생계를 담당한다.’ 그래, 18세기에는 그랬구나. 어휘를 정리해주는 사전이야말로 시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느꼈다. 그래서 ‘정치’란 옛날에는 어떤 뜻이었을까 찾아보기로 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 ‘political, politic’의 뜻에 ‘artful, cunning’이라는 의미가 있고 보면, 예로부터 정치란 교묘하고 교활한 어떤 것을 포함하는가 싶다. 그래서 고결하게 학문에 정진하던 학자들도 정치판에 가면 교묘하고 교활한 면모를 갖게 되나 보다. 그러니까 고결성을 지켜내는 첩경은 아예 정치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학자로서 정치적 야망이 있다면 자신의 고결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촌철의 수행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권의 과잉 호의에는 검은 그림자가 따라오게 돼 있다. 불의와 부정의 블랙홀로 휩쓸려 들어간 일부 교수들의 행태를 신자유주의의 덫이라고 이데올로기 탓만 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타당도와 선악도를 생각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이 바로 학자요 교수의 책무이거늘. 

이것은 그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지는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에야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상이라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연설에서 “암흑 속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으로 뛰어내릴 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글”만이 그 품격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첫 페이지에서 말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다.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공부했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생각났다. 볼라뇨에 비하면 반세기 전인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보다도 살인다도 더 악랄한 수법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강도나 살인에는 명백한 법조항이 있고, 선고받은 죄인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열어준다. 결국 산수 계산문제처럼 딱 잘라서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만큼은 죄의 정산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그의 언어가 말하는 모든 전체를 팔아넘기는 것이며, 불문율 앞에 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작가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교황의 무오류성을 예외로 하면, 모든 인간은 많건 적건 오류 덩어리다. 오류란 사유의 혼란이나 감정적인 동기 때문에, 또는 부주의나 태만의 결과로서 발생한다. 선의의 당의정을 입힌 악행은 악행일 뿐이다. 자신의 속성을 배반하는 것은 거짓이다. 어미가 어미임을, 의사가 의사임을 배반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정치가, 학자, 작가, 예술가 등이 자신을 배반하는 일은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파장이 크다. 소위 폴리패서들이 학자의 본성을 포기하는 순간 곧 ‘교묘하고 교활한’ 정치가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검은 세상의 블랙리스트

그렇게 학자들이 정치판에 묶여있는 동안 후안무치의 일들이 온 나라를 삼켰다. 문학예술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과 함께 믿거나말거나 명단마저 돌아다닌다.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작가들을 존중한다. 세상이 검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들어가야 하얀 사람이라는 증명이 된다. 블랙리스트에도 못 들어간 나 같은 회색분자가 가장 비열할지도 모른다. 문학이 세상의 고결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식과 행동 사이 불안한 공간을 뚫고 나가는 의지를 갈구할 일이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생각한다.’ 비판은 누구나 한다. 인식이 아니라 행동에 이르렀을 때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벌써 옛날에 괴테의 파우스트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라고 외쳤지 않은가.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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