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정치의 이름으로 자행된 제도화된 惡이 가장 큰 문제다”
“종교·정치의 이름으로 자행된 제도화된 惡이 가장 큰 문제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11.3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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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37강.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존재의 명암-삶의 어둠에 대하여’

 

“악은 분명히 세계와 인간의 어둠이요 그늘이다. 그러나 그 배제는 불가능한 꿈일 것이다. 전 지구인이 성인군자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절이 아니라 최소화를 위한 노력이다.”
지난 19일(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W스테이지에서 열린 ‘문화의 안과 밖’ 37강 ‘존재의 명암- 삶의 어둠에 대하여’란 주제 강연에서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가 한 말이다. 유 교수는 문학 작품에 나타난 악의 양상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악의 근절이 아니라 최소화를 위한 노력이며 그런 맥락에서 가장 고약한 것은 제도화된 인간악”이라고 거듭 지적했다. 하수상한 세월에 ‘제도화된 인간악’을 고민한 것은 묘하게도 시의성 있는 강연 배치로 보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 잔혹성의 압권은 ‘전쟁’이란 이름의 본격적이고 계획적인 집단 살상 행위에 있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10년 동안에 걸친 전쟁 이야기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영원한 고전이 된 것도 이런 ‘계획적인 집단 살상 행위’로서의 전쟁과 무관치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유 교수는 “역사적으로 보아 도덕적 순수를 내세운 종교나 정치세력일수록 이단 박해에 있어 광범위하고 혹독했다”면서 “종교와 정치의 이름으로 자행된 제도적 악이야말로 가장 가공할만한 것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이름으로 세계가 점점 더 戰雲을 띠어 가는 세태를 겨냥한 지적이기도 하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두 세계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넉넉하건 빈한하건 잃어버린 낙원으로 상기된다. 우리는 잃어버린 낙원에서 경험한 세계와의 첫 만남을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으로 맛 본 사과 맛, 처음으로 들어본 기적 소리, 처음으로 바라본 진한 저녁놀, 처음으로 읽었던 동화책의 흥미, 처음으로 뺨을 맞았을 때의 놀라움과 노여움과 무서움을 기억하지 못한다. 보고 느껴야 하는 것으로 예정된 것만을 보고 느끼는 타성으로 위축되고 퇴화하고 말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리적 유용성의 원리가 어린이의 경험능력을 대체해 버리고 이에 따라 유용성의 원리에 불편한 모든 경험은 기억의 틀 밖으로 쫓겨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유년기에서 소년기로 옮아가는 시기의 어둠의 발견 혹은 악과의 만남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첫 장은 그러한 위기의 순간을 잘 보여준다. 세계2차 대전 중 전사한 독일 전몰학생의 배낭 속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책은 『데미안』이라 전한다. 순응을 강요하는 물질숭상 사회에서 자아발견과 내면탐구를 호소하는 문학이 反戰세대 청년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이란 이항대립으로 파악한 두 세계는 세계의 기본 구도이기도 하다. 밤과 어둠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 끌리는 양면성은 또 인간 내면의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쨌거나 두 세계의 인지와 발견은 어린 영혼들이 거쳐야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어둠의 심층
위에서 우리가 주목해 본 헤르만 헤세는 독일 낭만파 문학의 계보에 속하는 시인이자 작가다. 헤세가 되풀이 표방하는 ‘내면에의 길’이나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란 어사가 시사하듯이 자아 혹은 내면성의 탐구는 낭만주의 문학의 주용 특징이 됐다. 자아의 탐구는 인간본성의 숨겨진 부분과 가시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인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연히 어린이나 꿈의 세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의 진정한 정신적 선조는 낭만주의자들이며 정신현상에 대한 정신분석 접근법의 전제는 낭만적 인생관의 기본적 함의 속에서 발견된다며 구체적으로 정신분석의 ‘자유연상’이 낭만주의의 ‘내면의 소리(the inner voice)’의 변종이라고 지적한다. 과학 혹은 심리학으로서의 위태로운 지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의 견고한 저력과 매력은 깨어있는 의식을 압도하는 무의식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 사상이 구현하고 있는 진실은 직관적이고 미적인 종류의 것이다. 내심 노벨의학상을 탐냈던 프로이트가 번지수가 다른 괴테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나온 것은 1900년이다. 여러 면에서 프로이트의 통찰을 앞당겨 보여준 사상가 중의 한사람인 니체가 사망한 해이기도하고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합리화의 기제가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흡사하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승화, 투사, 억압, 보상 등의 개념은 거의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다. ‘꿈작업’ ‘가족로맨스’ ‘쾌락원칙’ ‘현실원칙’ 등의 어사도 교양인의 기본적 어휘가 됐다. 20세기에 와서 대세가 된 성도덕상의 관용의 풍조, 성적 타부가 폐기 되다시피한 문학, 연극, 영화, 미술, 그리고 성적 함의가 진한 비속어의 남용과 같은 현상이 프로이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심정적 심층적으로 합법화함으로써 그러한 여러 경향의 득세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드러내 보이는 이드나 무의식의 세계는 그의 겸사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어두운 신대륙이었다. 그 보편적인 인식은 프로이트 사상이 20세기 주요 시대정신의 하나임을 방증한다.

악의 현상학
요즘 어린 친자식 혹은 의붓자식의 학대가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대체로 죽음에 이른 학대만이 보도된다. 초중등학교에서는 이른바 왕따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희생자가 자살이라도 해야 비로소 세인의 관심을 끈다. 군대에서 상급자에 의한 하급자 학대나 폭행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직장에서 야기되는 이른바 갑질이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폭력성 놀음에서 희생자와 가해자는 상황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비참한 희생자가 혹독한 가해자가 됨으로써 축적된 모욕감과 억울함을 설욕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 잔혹성의 압권은 전쟁이란 이름의 본격적이고 계획적인 집단 살상행위이다. 『일리아스』가 영원한 고전이 돼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의 많은 문학이 인간과 세계의 어둠으로 캄캄하다. 그러나 악의 문제를 가장 정공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니체가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이며 내 삶의 가장 행복한 우연의 하나” 라고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7부 「카레닌의 미소」에는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고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두 팔로 말의 목을 껴안고 우는 니체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 있다. 이어서 작가는 말 앞에서 자기 강함을 드러내지 않고 슬퍼하는 이러한 행동은 인류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정신착란이란 이름이 붙여진다고 적는다.


영국시인 A.E. 하우스만 시편 「밤나무가 횃불을 던지다」에 “우리는, 어느 짐승 같은 악당이 이 세상을 만들었나하고, 저주했던 최초의 인간은 분명히 아니다”란 대목이 보인다. 신이 전지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악과 재앙이 가뜩한 험악한 세계를 만들어냈다면 바로 신 자신이 악을 구현하고 있는 짓궂은 악당이 아니겠느냐는 세속 차원의 냉소적 관점에 공감한 시기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또 내면 심층에서 신성모독의 응보가 두려워 발설하지 못하거나 생각했다가도 참회하기가 쉬울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辯神論(theodicy)의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문자 그대로 하면 ‘신의 정의’를 의미하는 이 말은 악의 존재가 신의 전능이나 선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다.
 
기막힌 모순
1963년에 독일어 초판이 나온 콘라트 로렌츠의 『공격성에 관해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고 저자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공격충동이 인간에게 생득적인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함의가 있다고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에리히 프롬의 『인간의 파괴성향 해부』에는 로렌츠 이론에 대한 반론이 보이는데 공격성을 良性과 惡性으로 나눠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자기 방어적인 것이 양성공격이며 잔혹성과 파괴성향에 기초한 공격성향을 악성공격이라고 분류한다. 그리고 악성공격을 말하는 부분에서 나치 지도자의 한 사람인 하인리히 히믈러의 삶과 성격적 특성에 대한 상세하고도 흥미롭게 기술하며 히믈러 부분에는 ‘항문 축적 사디즘의 임상적 사례연구’란 부제가 달려있다. 되풀이가 적지 않고 7백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에서 프롬은 삶의 여러 세목을 들어 악명 높은 사내의 이모저모를 분석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진부함’ 즉 지극한 평범성을 지적함으로써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위에서 히믈러란 역사적 흉물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본 것은 그의 또 다른 일면 때문이다. 그가 안마사와 나눈 대화는 마치 도통한 성자가 들려주는 얘기 같다. 히믈러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면 극히 감동적인 말이 될 것이다. 잔혹한 사디스트의 구제할 길 없는 자기기만의 소치인가? 혹은 주위인물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허영심에서 나온 몸에 배인 상투적 처신의 하나인가? 그것이 히믈러의 예외적인 일탈이 아니라면 세상에 알려진 성자에게도 이러한 반동형성의 순간이 있는 것인가? 쉽게 단정할 수 없고 이러한 대화를 남겨놓았다는 것 자체가 악당을 경계해야할 이유를 덧붙여 준다는 착잡함을 안겨준다.
                 
몇몇 국면
동물행동학이 보여주는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을 수용하면서 동물과의 차이성에서만 인간위엄과 자존감을 세우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매리 미즐리는 여러 심리학적 관찰을 참조하면서 공격성을 폭넓게 고찰한다. 모든 악이 공격적인 것은 아니고 많은 악이 전혀 다른 동기에서 나온다면서 악이 본질적으로 선의 부재이며 그 자체로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소유욕이나 야심은 그 자체로서 무해한 것이요 때로는 필요한 것이지만 경의와 사랑에 의해서 균형이 잡히지 않을 때 극히 유해한 것이 된다. 공격하거나 내몰려고 하는 욕망인 공격성은 그 자체로서 선도 악도 아니지만 누구를 향한 것이며 왜 발동되는 것이냐에 따라 선악이 가름된다는 것이다. 미즐리가 인용하며 거론하고 있는 다윈의 관찰은 흥미 있고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윈은 도덕률을 개인위에서 승리에 취한 사회란 점령군이 아니라 내적 갈등해결에 필요한 개인의 대책으로 본다. ‘해야 한다’는 오만한 말을 인간의 어휘 속에 집어넣은 것은 사회나 부모의 처벌이란 일차적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상반되는 또는 파괴적인 동기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아 지능이나 두뇌활동이 진화할수록 도덕의식도 세련돼 간다는 함의는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윤리도 분명히 진화한다는 함의를 보여주는 엘리아스의 역사적 관찰과 함께 우리에게는 희망의 전언으로 들린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긴 하나 그러기 때문에 더 믿음직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면서
앞에서 문학 작품에 나타난 양상을 주로 해서 악의 문제를 살펴봤다. 악은 분명히 세계와 인간의 어둠이요 그늘이다. 그러나 그 배제는 불가능한 꿈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조정된 가령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정할지는 모르나 매우 따분하고 재미없는 고장이기도 하다. 왕따는 없어야하지만 그것이 근절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전 지구인이 성인군자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절이 아니라 최소화를 위한 노력이다. 타자 박해는 타자에 대한 공포에서 유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고약한 것은 제도화된 인간악이다. 볼테르는 고문이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20세기는 고문기술의 세련과 확산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전대미문의 인종 대학살을 낳았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정치와 결합한 근본주의 성향의 종교가 크게 세를 확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도덕적 순수를 내세운 종교나 정치세력일수록 이단 박해에 있어 광범위하고 혹독했다. 그나마 불교에서 이단 사형이 없었다는 것은 기억해둘만한 일이다. 멕시코의 촐루라의 피라미드는 높이 54미터에 좌우밑변의 길이가 각각 380미터와 43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것이다. 아스텍족은 신들이 인간의 피를 규칙적으로 섭취하지 않으면 우주가 파국을 맞는다고 믿었다. 신에게 바치는 희생자 사냥이 따랐고 한 도시에서만 일 년에 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바쳤다. 기우제를 위해서는 소년들을 희생양으로 바치기도 했다. 16세기 초까지 계속된 의식이었는데 피라미드는 그 희생의식의 장이기도 했다. 종교와 정치의 이름으로 자행된 제도적 악이야말로 가장 가공할만한 것임을 상기하면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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