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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의 근대적 확장과 변용에 관한 사유가 필요하다
전근대의 근대적 확장과 변용에 관한 사유가 필요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11.2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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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기억의 역전: 전환기 조선사상사의 새로운 이해』 노관범 지음|소명출판|435쪽|30,000원
▲ 개성에 위치한 숭양서원. 정몽주의 집터에 세운 서원으로, 포은의 시호를 붙여 ‘문충당’으로 불려지다가 1575년에 숭양서원이라 사액, 이때부터 숭양서원으로 불리게 됐다. 사진출처=http://blog.daum.net/009448/16142503

근대는 늙어가고 있다. 전통과 근대라는 발상에서 언제나 전통의 늙음과 대비돼 젊음을 독점했던 근대의 신화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이것은 다소 낯선 관찰이다. 근대주의에 도취돼 근대화의 복음을 전파했던 열정의 시기에는 던지기 어려웠던 성찰이다. 20세기 학술 담론에서 근대가 특권화 되는 과정과 근대 관념에 의한 생활 세계의 식민화 과정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리라. 필자의 관심사는 그보다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기억이 편제된 전환기 조선사상사의 새로운 이해에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전환기의 역사적 현실을 유교 전통과 서양 근대라는 이분법으로 갈라 서양 근대의 충격에 유교 전통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논하는 충격-대응의 모델이나 유교 전통으로부터 서양 근대로 어떻게 진보했는가를 논하는 전통-근대의 모델이 냉전 시기의 낡은 관념이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 낡은 관념, 이 완고한 이분법이 여전히 불식되지 않고 전환기의 역사적 해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근대에 포박되기 전에 조선사상사의 중심적인 요소들로 작용했던 것들이 일순간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에 의해 단절적으로 주변화 됐고 급기야 망각에 이르게 됐다는 것. 이에 필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주의가 견고하게 설치한 기억과 망각의 요새를 허물고 전통에 속하는 것과 근대에 속하는 것이 공유했을 역사적 동시성을 탐사하는 일이다.
 
전통과 근대가 공유한 역사적 동시성 탐사
이를테면 근대 중국은 어떠한가. 조선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현실의 법칙을 탐구하고 미래의 진로를 전망하는 오랜 사유의 전통이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조책관계에 의한 외재적 중국 인식과 문화적으로 중화 이념에 의한 내재적 중국 인식이 혼재한 가운데 정치적 계서성과 문화적 동질성의 측면에서 중국을 지속적으로 내화해 왔던 역사의 흐름 위에 있었다. 비록 식민지와 냉전의 현실 속에서 일본과 미국이 내화되고 중국이 외화되는 20세기의 단절적인 추세가 개재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 근대를 탈중국적인 네이션의 형성으로 독해하면서 근대와 민족으로 중국의 타자화를 추구했던 시각이 대두했음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근대 중국은 여전히 그리고 새롭게 전환기 조선 지식인의 사유의 준거점을 제공하면서 조선사상사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전환기 한국 지식인들이 근대 중국을 통해 한국의 현실에 대해 사유했던 전형적인 사례는 <황성신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황성신문>은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명 진보를 추구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상호 분발을 촉구하는 한편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으로 한중 양국이 외세에 의해 공통적으로 부과된 종속적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한국 사회에서 자강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자강의 모델로 중국의 제반 국가 개혁을 투시하는 한편 한국 독립을 위한 연대의 대상으로 중국을 명시했다. 이것은 근대와 민족의 가치에 집착해 중국의 타자화를 추구하며 서양 근대 또는 한국 민족에 도달하고자 했던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와는 다른 <황성신문>의 제3의 길이었다. 國亡 후에도 한국 지식인은 한중 양국의 공통된 역사적 현실을 돌아보며 현대문명 비판의 차원에서 고전 중화의 근대적인 부흥을 호소하거나(유인석의 「우주문답」) 한중연대의식에 입각해 한중적 근대사를 창출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박은식의 『한국통사』), 심지어 해방 후에도 친미와 친소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근대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의 설법으로 무장된 신민의 정치사상을 분출했다(이관구의 『신대학』).

근대 중국과 더불어 전환기 조선사상사를 새롭게 독해하는 키워드가 도시 유교다. 전환기 도시 지역의 유교적 지역 주체의 형성을 조선후기에서 근대초기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야에서 설명하고자할 때 기왕의 전통-근대 패러다임은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 전통에서 근대로의 역사적 변환과 내재적 근대의 성장을 위한 사상사적 설명으로서 개진된 조선후기 실학 사조론이 전환기 도시 지역의 유교적 지역 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조선후기 대표적인 상업 도시로 잘 알려져 있는 개성 지역에서 근대 초기 신교육운동과 한문학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지역 주체가 개성 명사 김택영과 연결된 개성 문인들이었는데, 과연 이들은 개성 유학사의 장기적인 시야에서 실학의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었을까. 그러나 실제로 개성 유학사를 검토하면 조선후기 개성의 지성사적 상황은 실학의 발흥이라기보다 洛學의 유입에 따른 성리학의 중흥이었고, 성리학이 중흥한 후 지역 유교 전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마침내 근대에 들어와 유교 교양으로 무장한 지역 주체가 결집돼 개성 지역운동을 이끌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 유교와 조선사상사라는 새로운 테마
유교 전통과 근대 사회의 연속성이라는 입론에서 볼 때 개성 유학의 상징으로서 숭양서원의 변화는 전환기 도시 유교의 상징으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성리학이 침체돼 본래 講規의 전통이 없던 숭양서원은 18세기 개성의 대유 조유선이 낙학 산림 김원행을 원장으로 초빙하면서 비로소 강규를 갖춰 유교 교육의 틀이 확립됐다. 김택영을 중심으로 결집했던 개성 문인들이 개성학회를 결성하고 신교육운동에 돌입했을 때 숭양서원은 개성 문인들이 집결해 정몽주의 충애 정신을 북돋는 사회교육의 장소로 기능했으며, 다시 이들이 숭양문예사를 결성하고 한문학운동을 전개했을 때 숭양서원은 개성 문인들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기념하는 책자를 출판하는 거점으로 활용됐다. 조선후기 개성 유학의 성소 숭양서원이 개성 신교육운동의 사회적 성소이자 개성 한문학운동의 문화적 거점으로 이어진 것은 조선후기 유학의 확산에서 출발해 근대 초기 유교적 지역 주체의 형성에 도달하는 방향에서 전환기 조선사상사의 새로운 이해에 긴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것은 거시적으로 ‘농촌 유교와 조선사상사’ 내지 ‘도시 기독교와 조선사상사’라는 낯익은 테마와 구별되는 문제적 지점으로서 ‘도시 유교와 조선사상사’라는 전환기적 문제를 새롭게 제출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전환기의 조선사상사는 근대주의에 의한 ‘유교 전통과 서양 근대’의 이분법으로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다양한 논점들을 갖추고 있다. 내재적 근대이든 이식된 근대이든 근대를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 전환기 조선사상사가 함축하는 ‘전근대의 근대적 확장과 변용’에 관한 진지한 사유가 모색됐으면 좋겠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한국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대한제국기 박은식과 장지연의 자강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고전통변』, 논문으로 「한국사상사학의 성찰」,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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