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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현실적 요구와 검증 견뎌낼 때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전통은 현실적 요구와 검증 견뎌낼 때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11.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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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35강. 문광훈 충북대 교수의 ‘교양과 수신: 괴테와 퇴계의 자기교육적 성찰’
▲ 괴테(Joseph Karl Stieler 작. 1818)와 현초 이유태가 그린 퇴계 표준 영정.

괴테와 퇴계를 비교문학적·비교사상사적 고찰의 무대에 불러낼 수 있을까. 더구나 ‘자기교육적 성찰’을 주제로? 괴테가 교양을 강조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퇴계 역시 자기 수신을 중요한 덕목으로 봤던 사상가다. 그러니 두 거인을 나란히 놓고 비교 검토하는 일도 가능할 법하다. 지난 5일(토) 열린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5섹션 ‘윤리와 인간성’의 여덟 번째 강연이자 전체 35강이 그런 자리였다. 문광훈 충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이날 ‘교양과 수신: 괴테와 퇴계의 자기교육적 성찰’을 주제로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왜 괴테와 퇴계였을까. 문 교수는 “시대가 급격하게 변하고, 사람의 경험 내용이 아무리 파편화돼 있다고 해도, 또 아무리 정치와 제도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자기연마의 문제, 즉 교양과 수신의 문제는 항상 우선한다”라고 운을 떼면서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 구조 자체가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개개인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인간 개개인의 내면, 의식, 행동을 들여다보는 데 괴테와 퇴계가 어떤 길을 열어줄 것이란 기대가 작용했다.

비교사상사적 시론이긴 했지만, 문 교수는 구체적 작품 읽기로 들어가 논의의 확산을 꾀하기도 했다. 괴테의 작품과 퇴계의 저술 사이의 비교를 통해 그 속에 담긴 교양과 수신의 이념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 그는 “윤리(ethics)는 행동과 사고의 누적된 양식에서 저절로 나오고, 이렇게 나온 생활양식의 전체가 문화이기 때문에 한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 사회에는 정직성이나 합리성, 윤리나 상식이 하나의 정신문화적 토대로 자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이런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토대가 없다면, 어떤 사회도 인간적으로 선량하고, 구조적으로 평화로우며, 이념적으로 열려있는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자기교육과 반성, 교양과 수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관계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그 속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더불어 이른바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전형을 이루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다. ‘교양(Bildung)’이란 말은 ‘만들다(bilden)’에서 나왔으니만큼 이 작품은, 한 개인이 어떻게 자기를 만들어가면서 삶을 이뤄가는가를 묘사하고, 바로 그 점에서 ‘교육’이자 ‘발전’의 과정을 보여준다. 교양이념(Bildungsidee)에는 자연히 자발적 의지로 자기를 개선시켜 가는 계몽주의적 이성이 자리하고, 이 이성적 인간은 고대 이래의 휴머니즘적 전통을 계승한다. 이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창작 시기가 계몽주의 이후부터 시작해 프랑스 혁명 직후까지 걸쳐있다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교양교육의 과정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만 즐기지는 못하는 것, 풍요로우나 인색한 것, 고상하나 조야한 것, 젊으나 현학적인 것, 필수적이나 허례허식에 찬 것” 등등이다. 그것은 “하나의 그릇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릇의 형태와 내용이 어울리듯이, 사람의 외양과 생각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 이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곧 사람의 인격이고 성격이다. 이 성격을 바르게 하는 것이 윤리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양수신론-성리학적 수양론의 한 목표 역시 다름 아닌 편벽된 성격과 기질의 변화에 있다.

다시 핵심은 이 매개―자기형성(Selbstformung)과 세계형성(Weltformung)을 잇는 매개가 바로 교육이고 형성이며 교양이라는 사실이다. 교육 혹은 교양이란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 안과 밖을 서로 이어주고 교차시켜준다. 그래서 자아의 내면성은 배우고 익히고 느끼고 생각하는 가운데 스스로 변하면서 더 넓고 깊은 세계―사회적이고 객관적이며 세계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보편성은 이 나아감의 끝에는 자리한다. 교육이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를 유기적으로 교차시키는 데 있다면, 그리고 이 교차 속에서 인간성은 더 넓고 깊게 재편되는 것이라면, 결국 보편성의 경험은 보다 큰 인간성의 경험이고, 이 다른 인간성의 실현이야말로 교양교육의 궁극적 의의가 된다.
괴테의 교양교육이념이 ‘보편성으로의 고양(Erhebung zur Allgemeinheit)’에 있다면, 이 고양이란 ‘자기 자신을 넘어가는’ 일일 것이다. 나는 괴테의 교양개념이 ‘자기’에게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성―그 실존적 절실성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내면과 양심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교양개념은 좁게는 독일의 교양소설적 전통에서 핵심이지만, 교양이 교육-형성의 문제로 연결될 때, 그것은 문학 일반의 차원을 넘어 교육일반의 문제로 확대되고, 더 넓게는 예술과 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의 하나가 된다.

퇴계의 『自省錄』과 『言行錄』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펼친 교양교육론은 동양의 수신론에서도, 뉘앙스를 달리하는 채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천지의 본성(天地陰陽論)에 관한 것이건, 세상의 다스림(經世論)이건, 아니면 이기론이건 간에, 그 바탕 혹은 출발은 수신과 수양에 관한 것이다. 유학에서든 퇴계에서든, 동양고전에서의 핵심은 두 가지, 공부와 몸가짐에 있지 않나 싶다. ‘성학을 밝히고 왕도를 행하는 것(明聖學 行王道)’이라고 불리건, ‘修己治人’과 ‘經國濟民’으로 불리건, 아니면 ‘心得躬行’으로 불리건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배운 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자기 몸의 이 실천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는 데로 이어지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수렴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 수신의 근본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데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로 돌아가 본래의 자기를 찾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너무 실체주의적으로 파악된 자아관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아의 선한 본성을 처음부터 전제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을까. 자기로 돌아간 본래의 자아는 여러 가지 점에서 절제하고 조신하는 자아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의 수신개념에서 ‘자기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사적 이익을 취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사사로운 상태―주체의 주관적이고 편향되며 변덕스런 차원을 이겨내고, 그 마음을 최대한 투명하고 맑고 객관적인 차원에 둔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퇴계가 세운 수신수양의 5가지 원칙으로, 첫째, 안으로는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밖으로는 의로움을 추구하며(敬內義外), 둘째, 조심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면서(戒愼恐懼), 셋째, 넓게 배우고 검토하고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변별하며 독실하게 행하는 일(博學審問愼思明辯篤行), 그리고 넷째, 사사로운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 그래서 이런 마음의 자기회귀를 통해, 다섯째, 고요한 가운데 빈 거울과 공평한 저울처럼 사특함이 없는 상태(思無邪)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여기에는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다른 대응방식―주일무적 수작만변의 태도가 필요하다.

律己의 자기형성학 - 부드러운 도덕문화를 향해
필자가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살폈던 문제보다 훨씬 작은 문제의식, ‘연성도덕’과 관련된 한두 가지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려(care)’와 ‘존중’, ‘돌봄’과 ‘두려움’, ‘신중한 생각(愼思)’과 ‘성찰극기의 다스림(省察克治)’ 같은 연성의 덕성들이다. 강성도덕이 외향화돼 있다면, 연성도덕은 내향화돼 있다. 연성도덕이 주체의 주체됨을 지향한다면, 강성도덕은 주체의 대상화에 관계한다. 그러면서도 연성도덕은 강성도덕마저 포용한다. 그 때문에 연성도덕의 범주적 외연은 훨씬 넓은 것이다.

사실 교양과 수신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덕목은 이와 같은 연성도덕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이나 집단이 아니라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타자나 사회 혹은 국가를 향해 있기 이전에 각 개인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퇴계에서든 괴테에서든, 이 두 사람에게 조심하고 사려 깊으며 경외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공통의 덕성으로 자리한다. 이때 우리는, 괴테에 의지해 퇴계에게 없거나 모자라는 ‘살아가는 기쁨’이나 ‘자발성’에 대한 강조를 보충해도 좋을 것이고, 나아가 오늘의 관점에서 ‘관용’ 같은 덕성을 첨가해도 좋을 것이다. 유학의 지나친 경건주의는 이런 보충으로 좀더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연성의 덕성들은 이 인간화를 적극적으로 활성화한다. 수양과 수신의 자기교육적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연성이고, 이 연성도덕 속에서 연성사회를 지향한다. 연성사회란 궁극적으로 도덕문화적 사회일 것이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투쟁은 저돌적 투쟁이 아니라 ‘반성된’ 투쟁, 외양화된 투쟁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성찰된 투쟁이다. 이 투쟁의 반성에 주체의 자기연마와 수련은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모든 연성도덕은 삶의 갈등이 아니라 조정을, 싸움이 아니라 화해를 지향한다. 개인의 자기연마와 수련은 근본적으로 부드러운 도덕적 기율이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연성도덕은 주체의 내면으로부터 외면으로 나아가고, 다시 이 외면으로부터 내면으로 돌아오면서 자기갱신과 자기변모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형성적 프로그램의 변증법적 변형과정이다. 주체의 반성력, 공경하고 주의하며 연마하는 노력은 바로 이 자발적 변형과정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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