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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와 중독 사이
향유와 중독 사이
  • 교수신문
  • 승인 2016.10.3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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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새벽 5시에 일산을 출발해서 세 시간 만에 도착한 춘천 공지천변 대회장. 비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볼을 스치는 아침 바람에 한기가 느껴졌다. 달리기에는 좋지 않는 날씨다. 옷을 갈아입고 맨소래담 로션을 다리에 흠뻑 바르고 나서야 굳어 있던 근육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기념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다음 옷가방을 보관소에 맡기고 나니 출발 30분 전. 일순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이날을 위해 지난 15주 동안 틈틈이 달렸던 일들이 떠올랐다. 스피드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으니 기록 단축은 어려울 것이다. 욕심내지 말자. 완주가 목표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며 워밍업 구간인 5킬로미터 지점까지는 천천히 달렸다. 의암호는 여전했고 삼악산 등성이는 이제 단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을 내뿜으며 달리는 1만여 명의 남녀노소 健脚들도 단풍 속으로 점점이 물들어 갔다.

지난 10월 23일 필자가 참가했던 춘천마라톤대회의 현장 스케치다. 사람이 달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리는 왜 달리는가』(정병선 옮김, 이끼북스, 2006)를 쓴 베른트 하인리히는 동물학자로서, 동물생리학과 동물행동학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새들은 어떻게 수천 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었을까? 영양이 시속 98킬로미터로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더위와 심각한 탈수 상황에서 낙타는 어떻게 과잉 열과 수분 부족을 해결할까?

이러한 연구 결과를 활용해서 훈련한 하인리히는 실제로 40세에 全美 100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대회에 처음 도전해 당시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그는, 빠르지도 못하고 덩치도 작은 인간이 초원의 포획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사냥에 알맞도록 근섬유와 땀샘이 발달해 지구력을 갖췄고 비전(통찰력)을 갖게 된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DNA를 타고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유력후보였다가 고배를 마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임홍빈 옮김, 문학사상사, 2009)를 보자. 이 책에서 그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말했던 凋落은 그 나이(40) 언저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하나의 분기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다”고 했다. 소설 쓰기는 육체노동이므로 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하루키는 장거리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완주해 가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교훈을 배워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자기 묘비명을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쓰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에게는 달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어떠한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는 서머셋 몸의 말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서 뭔가 관조 같은 것이 우러나온다는 뜻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어떤 쾌감을 즐기는 데 있어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향유’와 ‘중독’을 구분한다면, 위 두 사람은 마라톤을 향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행위에 임하는 자신에게 정직하며, 그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 집필을 결심할 정도니까.

관점을 바꿔 보자.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앤 윌슨 섀프는 『중독사회』(강수돌 옮김, 이상북스, 2016)에서 중독자-중독사회-중독시스템으로 이어지는 중독의 문제를 해부하면서 이는 시스템 전환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코올 중독자는 어떤 사람인가? 늘 술에 절어 있고 판단력이 흐리다. 갈수록 독한 술을 많이 마셔야 기분이 좋아진다. 마시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술을 얻기 위해 거짓말도 쉽게 하며 양심 없는 짓도 불사한다. 섀프는 ‘중독사회’란 바로 이 알코올 중독자처럼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중독사회의 모습은 미국이나 한국,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성장 중독증이나 권력 중독증, 돈 중독증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터진 정치권 스캔들에서 보듯 한국은 중증 중독사회로 보인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다양한 조직들, 나아가 우리 사회 시스템 전체가 가진 ‘중독이라는 질병’과 그에 기반한 ‘비정상적인 과정 및 행위’들을 더 이상 부정하지 말고 제대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50대 진입 기념으로 풀코스에 도전한 이래 매년 1회 꼴로 참가했고 올해로 여덟 번째 완주에 성공했다. 타고난 체형이 오다리에 새다리인 필자로서는 기록에 대한 욕심을 버린 지 오래다. 속도와 지구력 중 지구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知天命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과 재능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정직성과 건강성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중독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페스트로부터 오랑市를 지켜낸 자원 보건대 같은 용기 있는 시민연대가 결성될 수 있지 않을까.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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