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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혁명 선봉에 섰지만 좌절 … 나치 출현 예견하고 미리 경고하기도
뮌헨혁명 선봉에 섰지만 좌절 … 나치 출현 예견하고 미리 경고하기도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6.10.26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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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5. 에른스트 톨러: 반전·평화주의 실천한 극작가
▲ Ernst Toller auf einer Fotografie von Swaine A. um 1934 (ⓒ Bayerische Staatsbibliothek M¨unchen / Portr¨atsammlung)

 사람들이 톨러를 믿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톨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톨러의 자살은
반전·평화주의의 자살이다. 평등 평화 인간중심의 세상이 자살한 것이다.
그가 죽은 자리에 독재가 환호성을 올렸다.
인간을 살육하고 세상을 파괴하는 전쟁이 붙을 뿜어댔다.

1923년 11월 뮌헨 폭동이 미수에 그치자 아돌프 히틀러는 1924년 2월부터 12월까지 바이에른 소재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됐다. 대역죄로 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조기 출소했다. 수감 중 나치이데올로기의 근간이 되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고,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독일을 장악하며 제3제국을 건설했다. 그런 다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았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1924년 이 시기에 또 한사람의 정치범이 바이에른 소재 니더쉐넨펠트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그는 뮌헨 평의회공화국 수반으로, 1919년 5월 베를린에서 파견한 제국군대에 의해 혁명정부가 진압 붕괴되자 체포돼 대역죄로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었다. 1919년부터 복역해 1924년 7월에 출소했다. 뮌헨 평의회공회국은 ‘뮌헨 소비에트공화국’ 혹은 ‘바이에른 평의회(소비에트)공화국’이라고도 한다. 운이 좋아 복역으로 끝났지만 다른 주요 인물들은 테러로 목숨을 잃거나 체포돼 죽임을 당했다. 이 사나이는 수감 중 『대중 인간』, 『기계파괴자들』, 『독일인 힝케만』 등의 희곡작품과 시집 『제비집』을 썼다. 복역 중 가장 유명한 정치범으로 부상했으며, 옥중에서 창작한 작품들은 유명 감독에 의해 유명극장에서 공연됐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매료됐고, 감금 중인데도 유명작가가 됐다. 그는 1920년대에 가장 이름을 날리던 극작가였다. 당시 게오르크 카이저나 베르톨트 브레히트보다도 더 유명한 작가였다. 그는 정치가였고, 작가였다. 좌파사회주의 혁명가였고,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극작가였다. 그는 언젠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단어의 힘을 믿는다면, ―작가로서 우리는 단어의 힘을 믿는다― 침묵해서는 안 된다. 독재자들 자체는 세상의 의견에 복종한다”라는 이 말은 이 남자의 인생역정과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글귀다. 그는 독재타도와 전쟁이 없는 세상을 위해 투쟁했고, 인종차별과 다른 민족을 억압하지 않는 세상, 가난한 사람과 핍박받는 대중을 위해 행동하는 작가이자 혁명적 정치가였다. 그가 바로 길지 않은 세상을 살고 간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1893~1939)다.
에른스트 톨러는 1893년 포젠 지역의 사모친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던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모친은 당시 독일 프로이센으로 현재는 폴란드 땅이다. 사모친은 독일 도시였다. 독일도시라고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 세 인종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독일인들이 스스로를 이곳의 토박이라고 생각했고 주인행세를 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 중에는 주로 개신교도들이 이곳에 살았는데,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독일인도, 폴란드인도 아닌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이유는 독일과 폴란드가 전쟁을 하기만 하면 유대인들은 독일인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독일문화의 선구자라고까지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은 포젠지역의 다른 도시들에 사는 가톨릭교도들과 폴란드인들을 경멸했다. 독일인과 폴란드인, 독일인과 유대인, 유대인과 폴란드인,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뒤섞여 서로 모여 살고, 폴란드 땅이면서도 독일 땅이었고, 독일 땅이면서도 완전한 독일 땅이 아닌 이곳에서 톨러는 유년시절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가면 누구나 똑같은 학교에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친구는 개신교학교에, 또 어느 누구는 가톨릭학교에, 그리고 나는 유대인학교에 다니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건물은 똑같아 보이고,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도 말이다. 휘 둘러 보니 독일인이 있었고, 폴란드인이 있었고, 나는 유대인이었다. 독일인들은 개신교와 가톨릭신자가 있었고, 나는 유대교 신자였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어머니는 가난한 아이들은 더러우니 같이 놀지 말라고 하신다. 저녁 잠자리에 엄마에게 묻는다. “왜 우리는 유대인인 거예요?”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자거라 얘야, 그런 바보 같은 것 묻지 말고.” 어린 톨러는 유대인이고 싶지 않았다.

인종차별과 빈부격차에 눈뜬 유대인 소년
인종차별 이외에 어린 시절 톨러가 깨달은 것은 빈부격차였다. 톨러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부유계층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속박 당하고 있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잘 차려입고 잘생겼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헐벗고 남루했다. 톨러와 같은 부잣집 아들은 인문계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녔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실업학교를 다녔다. 외적인 자유에는 원인이 있고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문제는 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부유한 집에 태어나면 잘 먹고 잘살며 풍족한 유산을 물려받는 반면,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대책 없이 굶주리고 멸시를 당한다. 게다가 대물림 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게나 흥청망청 돈을 써도 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세상 질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의 필연성에 대해 톨러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잔혹함을 느꼈다.

에른스트 톨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목숨을 바쳐 독일인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전쟁이 시작될 당시 프랑스 그레노블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를 탈출하다 시피 빠져나와 독일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래 나는 독일인이다. 독일인이라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아니다. 조국 독일은 내가 수호한다. 독일, 독일, 독일이 세상에서 최고다. 어린 시절 나를 감격하게 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애국시인 횔덜린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들을 보며 독일어를 다시 생각했다. 독일어야말로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내 존재의 일부분이고, 나를 먹이고 키워낸 고향이 아니던가. 독일이 얼마나 위대하던가. 하지만 톨러는 곧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으로 인해 철저히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하게 된다. 전쟁이야 말로 정말 의미 없는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동물적 행동이었다. 젊은이들이 의미 없이 죽어갔다. 

인간들은 감정에 도취해 살고 있었다. 독일황제의 전쟁 선동은 충직한 독일신하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독일’, ‘조국’, ‘전쟁’이라는 단어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단어의 힘은 대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가공할만한 대량 살상무기가 전투에 투입된 최초의 현대전이었다. 군수산업이 발달했다. 독일의 화학 산업, 프랑스의 자동차 산업, 철강, 전기회사들이 신예무기를 개발해 냈다. 자연과학자들은 이론과 실제를 제공해줬다. 어찌 보면 학문과 학문, 기술과 기술의 전쟁이었다. 독가스 전쟁을 치렀다. 독가스는 한 번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탱크 (tanks)’라는 별명의 전차가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독가스와 전차 이외에도 포탄과 폭탄이 대량 제작 생산됐다. 결과는 대량 살상으로 끝났다. 9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전사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아들이 죽고 남편이 죽었다. 아들을 잃은 부모가 통곡을 했고 과부가 울부짖었다. 톨러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잔인한가. 마침내 에른스트 톨러는 무의미한 전쟁을 보며,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무지함을 보며 반전·편화주의의 기수가 된다.

의병으로 제대한 후 1917년 뮌헨대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법학이 아니라 정신과학을 전공했다. 막스 베버에게 정치학을, 아르투어 쿠쳐 교수에게서 문학을 공부했다. 토마스 만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교류했고, 반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10월부터는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공부했다. ‘독일 청년 문화정치 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고,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1867~1919)를 알게 됐다. 아이스너에게 감화를 받고 그를 따라 뮌헨으로 갔다. 그렇게 뮌헨 평의회공화국에 톨러는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그의 멘토는 쿠르트 아이스너였다. 아이스너는 1898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사회민주당(사민당, SPD)’ 소속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무자비한 인간성 파괴를 보며 반전·평화주의자가 된 인물이다. 1917년 사민당의 전쟁정책과 사회민주주의 ‘성곽자유정책’에 반대해 ‘독자독일사회민주당(USPD)’으로 당적을 변경했다. ‘독자사민당’은 사민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탈당한 사람들이 사회주의 독자노선을 천명하며 만든 정당이다. 후일 극좌인 공산당과 우파인 사민당 사이에서 차별성을 내보이지 못하며 당의 정체성이 애매해지며 와해됐다. 일부는 공산당으로, 또 다른 일부는 사민당으로 복귀했다.

1919년 1월 12일 바이에른 지방의회 선거에서 아이스너가 이끄는 ‘독자사민당’은 선거에서 패했다. 톨러도 낙선했다. 그해 1월 5일에서 12일 사이 베를린에서는 스파르타쿠스 혁명이 발생했고, 1월 15일에는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체포된 뒤 살해당했다. 그렇게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선거에서 패한 아이스너는 의회에 총리직 사임을 밝히러 가는 도중 2월 21일 극우민족주의자인 아르코 안톤 백작(1897~1945)에게 암살당했다. 아이스너는 제국주의와 전쟁도발을 격하게 증오했다. 아이스너의 정치적 이상은 ‘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단 한 번의 투표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배제하는 의회민주주의를 비난했다. 의회민주주의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허점을 지적한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비판적이고 생동감 있고 불을 지피는 정신으로서의 삶과 진리의 정신이 사회에서 일상화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각계 대표가 참여하는 평의회공화국이 돼야한다는 점을 신봉했다.

▲ 1920년대 초 니더쉐넨펠트 교도소 수감 중

1918년 1월 톨러는 군수산업노동자 파업에 관여돼 2월초에서 4월초까지 두 달간 옥고를 치른다. 아이스너는 11월 8일 700년 이상 이어진 비텔스바흐 왕가를 전복시키고 바이에른 왕국을 바이에른 ‘자유국가’로 선포하며 바이에른 총리가 된다. 아이스너가 자유바이에른을 선포하자 톨러는 바이에른 노동자, 농민, 병사 중앙평의회 제2의장에 피선된다. 아이스너가 피살당한 후 공산당 중안위원회는 오이겐 레비네를 뮌헨으로 파견해 공산당을 재건하고, 바이에른 지방의회는 요하네스 호프만을 바이에른 주지사로 선출한다. 3월에 벌어진 일이다. 4월 7일 뮌헨 평의회공화국이 공식 선포되고 에른스트 톨러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피선된다. 톨러는 혁명사업의 과제를 ‘언론의 사회화’, ‘노동자무장과 붉은 군대 창설’, ‘주거문제 해소’, ‘생필품 보급규정’에 뒀다. 에른스트 톨러는 중앙위원회 의장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작가였다. 바이에른 질서회복에도 실패하며 4월 12일 오이겐 레비네(1883~1919)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야말로 일주일 천하 정권이었다. 뮌헨 소비에트공화국은 1919년 5월 3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군과 민방위대에 의해 진압당하며 해체됐다.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군인들에게 체포돼 살해당했고, 오이겐 레비네는 처형당했다. 에른스트 톨러도 체포돼 5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톨러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출소했을 때는 30세가 돼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가 독일의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반면, 독일의 동북부에 위치한 프로이센 출신 톨러는 독일의 남동쪽으로 내려와 혁명의 선봉에 섰다. 두 사람 모두 거사에 실패한 후 히틀러는 바이에른을 근간으로―우리는 히틀러와 관련된 지명인 바이에른에 위치한 뉘른베르크라는 이름을 기억한다―‘국가사회주의(NS)’ 세력을 규합하고 확장시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해 나치제국을 세웠고, 톨러는 출소 후 바이에른에서 쫓겨나 베를린에 거주하다가 히틀러가 정권을 이양하자 베를린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나치돌격대 급습으로 집 초토화되고 재산 몰수 당해
에른스트 톨러는 1933년 히틀러 나치정권 등장으로 인해 독일이 파탄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려면 1918년과 1919년 독일에서 발생한 사건을 알아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치들은 나치정권 획득을 희망과 도약의 발판, 원대한 독일의 이상 실현으로 보겠지만, 톨러는 독일이 완전히 망한 상태로 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18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이고, 11월 혁명이 발생한 때다. 독일 황제제국이 막을 내리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수립된 해다. 1919년은 11월 혁명의 연장선에서 뮌헨 평의회공화국이 탄생하고 붕괴된 시점이다.
톨러가 이 시기를 주목하라고 말한 데는 크게 독일이라는 나라가 황제제국에서 어떠한 공화국 형태로 이행돼야 하는지 정치체제의 성격과, 무기력하게 히틀러에게 나라를 넘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제점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톨러는 나치 출현을 예견하고 미리 경고한 인물에 속한다.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인간의 순수한 의지가 무지막지한 정치적 현실에서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에 속한다.

1933년 2월 27일 밤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치돌격대는 톨러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강연 때문에 스위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는 면했지만 집은 초토화됐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1933년 5월 10일에 감행된 분서사건에서 톨러의 작품 『변화』, 『대중 인간』, 『기계파괴자들』, 『제비집』이 불태워졌고, 곧 국적도 박탈당했다. 아무리 독일인이고 싶었어도 톨러는 유대인이었고, 독일 사회와 정치적 발전을 위해 혁명적 과업을 완성하고 싶었어도 나치에게 톨러는 반동분자였다. 1934년 스위스 취리히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1935년 망명 중 동행한 미모의 여배우 크리스티네 그라우호프(1917~1974)와 결혼했다. 그녀는 18세의 처녀였고, 톨러는 혁명에 실패한 42세의 사내였다.

두 사람은 미국과 캐나다로 망명지를 옮겨 50회 정도 공개강연을 했고, 1938년에는 뉴욕에 정착했다. 스페인 내전의 민간인 희생자를 돕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갔다. 나치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정열적으로 펼쳤고, 강연을 통해 나치 독재와 바이마르공화국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에른스트 톨러는 지쳤다. 사람들은 톨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톨러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젊은 부인도 그를 떠났다. 더 이상 힘이 없었다. 투쟁할 힘이 없었고, 꿈을 꿀 힘이 없었다. 꿈을 꿀 힘이 없는 사람은 살아갈 힘이 없다. 나는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라고 에른스트 톨러는 그의 작중인물 힝케만을 대신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더 이상 삶을 지탱할 힘이 없었다. 톨러는 1939년 5월 22일 뉴욕 센트럴파크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목을 맸다. 45세 때였다. 목욕가운 허리끈으로 자살했다. 몇 년 동안 톨러는 여행가방안에 허리끈을 넣고 다녔다.

사람들이 톨러를 믿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톨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톨러의 자살은 반전·평화주의의 자살이다. 평등 평화 인간중심의 세상이 자살한 것이다. 그가 죽은 자리에 독재가 환호성을 올렸다. 인간을 살육하고 세상을 파괴하는 전쟁이 붙을 뿜어댔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가 내전에 승리하며 장기독재의 길을 열었고, 몇 달 후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세월이 갔다. 톨러가 태어난 지 100년이 훨씬 넘었고, 세상을 버린 지 70년이 훌쩍 지나갔다. 톨러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만나보기는 쉽지 않다. 에른스트 톨러가 누구인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 자리에 세상의 독재자들은 넘쳐나고 전쟁의 광기는 끊이질 않는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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