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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온라인 청원운동을 벌인 까닭은?
과학자들이 온라인 청원운동을 벌인 까닭은?
  • 김재호 과학전문기자
  • 승인 2016.10.05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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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159. 기초연구 지원 확대
▲ 호원경 교수가 제시한 ‘국책연구의 대형과제 편중 vs 기초연구비의 소액과제 편중’ 현황. ※자료출처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isori&id=25855

긴박하다. 그래서 대학의 연구자들이 기초연구 지원 확대를 요구하기 위해 직접 공개청원에 나섰다. 지난 23일 <BRIC>(www.ibric.org) 커뮤니티에 청원의 참여를 호소하는 글이 올라왔다. 서울대 의과대학 호원경 교수가 주도하고 있는 이번 청원에 현재(9월 30일)까지 약 1천300명이 동참했다. 이는 메일 회신 및 온라인 청원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과학자들의 수다. 온라인 청원운동은 이달 7일까지 진행된다.

호원경 교수는 “기초연구의 위기는 단지 대학의 위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 경쟁력의 위기”라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연구 개발비 예산 수립 및 집행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를 위해 다음 사항을 청원한다고 밝혔다. △자유공모 기초연구지원 사업 확대 △연구비 구조의 불균형을 개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의 제도적 방안 강구.
이번 공개청원에 참여한 중앙대 오경수 교수(약학과)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장의 연구자들이 체감하는 기초연구 문제점들을 단순히 연구재단 또는 미래창조과학부에 의견 개진으로는 개선이 어렵다고 판단해, 현장의 목소리로 긴박한 기초연구 실태를 정부와 정치권에 들려주고자 1천명 이상의 과학자가 참가한 청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기초연구투자는 건강한 국가경제의 초석이며, 과학 선도국가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며 “지금 현장에서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은 자신의 과학적 가설과 새로운 현상을 연구하기보다, 부족한 연구자금 확보를 위해 정부의 정책과학과제(목적기초연구)를 수행하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연구비를 위한 하향식 연구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쟁력 있는 연구 인력 배출과 질 높은 연구직 일자리 확대를 위한 상향식 순수연구비 확대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현장의 연구자들이 직접 청원에 나선 이유
한국은 GDP 대비 기초연구비는 세계 1위이지만(0.75%, 2013년), 대학이 사용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호원경 교수에 따르면, 대학이 사용하는 비중은 9% 수준인데, 이마저도 2008년 11%에서 계속 하락한 결과다. 연구개발의 대학 지원 현황을 보면, 국가 총 R&D에서 대학의 참여 비중은 2008년 이후 지속적 하락 추세에 있다. 가히 기초연구비의 역설이라고 불릴 만하다.
정부 R&D에서 기초연구비 투자액은 2조5천억원에 달하지만, 이 중 1조원만이 자유공모 연구비 형태로 지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호 교수는 기초연구비 2조5천억원 중 90%를 자유공모 기초연구지원 사업으로 개선해 2조3천억원 규모로 키우자고 제언한다.

정부에서 제시한 통계의 문제점도 간과할 수 없다. 2015년 정부 R&D 18조9천억원에서 기초연구비의 비중은 38.4%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여기서 기초연구비 비중 산정에 표함되지 않는 시설, 장비 구축비, 인력 양성 및 교육 연수 등이 5조8천억원으로 30%를 차지한다. 호 교수가 <브릭>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나머지 13조1천억원이 기초(5조원)-응용(2조7천억원)-개발(5조4천억원) 연구비로 나뉘어 투자되고 있다. 즉, 13조1천억원의 38.4%가 5조원이다. 이 5조원은 다시 연구기관지원금, 교원인건비 및 기타로 쪼개져, 결국 순수연구개발비는 2조2천억원 이고, 여기서 연구자들이 소위 자율적(bottom-up) 과제로 진행하는 기초연구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사업 1조1천억원 뿐이라는 게 호 교수의 설명이다.

한 연구자는 댓글을 통해 “한 명이 진행하는 연구도 결과에 따라 결론이 어디로 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과학일진데, 이미 연구를 데이터를 보기 전부터 방향성을 정해 놓고 유도하는 연구로는 선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라며 “좋은 제안서를 선별하기 위한 치열한 토론과 유능한 연구자에 선별, 그리고 과감한 베팅만이 한 치 앞을 모르는 탐구의 길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길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학의 기초연구 지원 계속 하락세
호 교수에 따르면, 과학자들의 창의적 연구가 가능한 부분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지원사업밖에 없다. 이는 우리나라 총 R&D 예산의 6% 미만으로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가 필요하다. 총 R&D에서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비의 비중은 한국이 순수연구개발비 비중이 35%이고, 여기에서 기초연구비는 약 3분의 1 정도다. 특히 이 기초연구비가 다시 정부 주도의 기획사업으로 반이 할당되다 보니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비는 전체의 6% 이하가 된다는 게 호 교수의 설명이다. 미국은 기초연구비 비중 자체가 47% 수준으로 높다. 이 기초연구비가 거의 대부분 연구자 주도 연구지원이다.

또한 호 교수는 자유공모 기초연구비가 대부분 5천만원 이하인 것도 문제로 제기했다. 정부 주도의 국책연구가 갈수록 대형화되고 있는 반면,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는 소액과제에 편중돼 있는 것이다. 호 교수는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지원에 1억원 이상 과제가 50% 이상이 되도록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80% 정도가 소액과제에 편중돼 있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는 대형과제엔 보다 많은 연구자들이 공정하게 참여하도록 기회를 주는 자유공모 도입을 확대하자고 덧붙였다.

기초연구의 장기적 투자를 위해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내용도 청원에 포함됐다. 영국의 ‘Haldane 원칙’처럼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선 1900년 초 연구기금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이 원칙을 세웠다. 호 교수는 <브릭>에 올린 글을 통해 기초연구의 핵심은 창의성이라며, 과학 발전은 연구자의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발견의 최전선에서 나오는 것이지 기획이 잘 된다고 좋은 성과를 내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호 교수는 “기획의 유혹을 버리고 무슨 연구를 할지를 연구자에게 맡기는 상향식 시스템으로 연구비 지원구조를 대폭 조정”해 달라고 피력했다.

대학이 중심이 되는 기초지원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경수 교수는 “현재의 평균 5천만원 정도의 연구비로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가 불가능하다”면서 “대학교원의 양적 증가와 연구의욕 상승이 대학 기초연구 지원 확대가 필요한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있지만, 대학에서 창의적인 연구 인력을 교육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자유공모과제의 확대를 위해서는 우리 현장의 연구자들이 해결책들을 제안해야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외부에 전달해야 한다”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현 대학 기초연구지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금번 연구자들의 청원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브릭> 게시판에 한 연구자는 “현재 국내 과학계의 큰 문제는 많은 한국 연구자들은 주체성을 잃은 채 따라가기식 지원 방식에 어떻게든 자신의 연구를 희생해 맞춰야 그나마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이상한 문화가 팽배해져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연구자는 “시급한 것은, proposal review(제안 검토 혹은 심사)를 제대로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의식의 개선 및 전문가 풀의 충분한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공무원들이 결정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맞지만 연구자들이 결정하면 뭐가 좀 다를까”라는 의견도 제시됐다.

한편,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수위원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중국의 천인계획처럼 우수인재로 선발되면 연구비를 파격적으로 지원하고 보고서 및 행정절차 면제 등을 해줌으로써 적어도 3∼5년간 자율적, 창의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김재호 과학전문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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