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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욕망 개념의 역사를 살펴 善·德·正義 새롭게 설정하자
근현대 욕망 개념의 역사를 살펴 善·德·正義 새롭게 설정하자
  • 교수신문
  • 승인 2016.09.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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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28강.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욕망과 기율: 데카르트에서 라캉까지’

 

▲ 2015년 3월 강연 중인 김상환 교수.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제5섹션 ‘윤리와 인간성’의 막이 올랐다. 이번 5섹션은 모두 열 개의 강연으로 진행된다. ‘필요 소비와 과시 소비’(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9월 24일), ‘교육 개혁의 윤리’(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10월 22일), ‘스승의 길’(전승은 전 거창고 교장, 10월 29일) 등 흥미로운 강연도 포함돼 있다. 지난 10일(토) 전체 28강이자 5섹션 첫 강연 테이프는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가 끊었다. 주제는 ‘욕망과 기율 : 데카르트에서 라캉까지’였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정념론으로 근대적 욕망 개념의 탄생을 설명한 김 교수는 스피노자와 헤겔에게서 근대적 욕망이 무르익었으며, 프로이트와 라캉에 와서 현대적 욕망으로 재편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욕망 개념의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개입하고자 하는 현대 윤리학의 쟁점에 관해 언급하면서 강연을 매듭지었다. 그는 “과연 고대의 덕 윤리와 근대의 의무 윤리학은 통합될 수 있는가. 통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욕망 개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현대 윤리학의 기초 개념들(선, 덕, 정의, 도덕법칙 등)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이 강연의 목적은 욕망 개념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윤리학의 주요 문제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다. 욕망 개념의 역사를 관찰할 때 중요한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욕망이 적극적 부정의 대상에서 적극적 긍정의 대상으로, 악의 편에서 선의 편으로 자리를 바꾸는 경위다. 이것이 근대적 욕망 개념이 탄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善 개념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고대 세계에서 선은 자연의 존재론적 질서에 근거했다. 반면 근대적 욕망 개념의 탄생과 더불어 선의 근거는 주체의 내면에 위치하게 된다.


욕망의 역사에 중요한 두 번째 계기는 욕망이 다형적이고 도착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추이다. 욕망은 생명의 자기보존 논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의 보편성 저편으로 향한다. 이것은 현대적 욕망 개념이 탄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다. 이때 선은 다시 주체의 바깥으로 자리를 옮긴다. 주체의 바깥으로 자리를 옮길 뿐 아니라 균열되기까지 한다. 도덕법칙에 의해 대변되는 선과 그 법칙 너머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선으로 이중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대적 욕망 개념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이 존재 일반의 추동원리로 일반화되거나 역사-문화적 세계 일반의 추동원리로 승격되는 국면을 지나야 했다.


우리는 데카르트-칸트의 정념론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근대적 욕망 개념이 태어나는지, 그리고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중심으로 어떻게 현대적 욕망 개념이 등장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단계에서 욕망이 존재론적으로 일반화되는 사례로 스피노자-헤겔의 철학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런 욕망 개념의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개입하고자 하는 현대 윤리학의 쟁점은 이것이다. 과연 고대의 덕 윤리와 근대의 의무 윤리학은 통합될 수 있는가. 통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윤리학의 초석에 해당하는 선, 덕, 정의, 도덕법칙 등과 같은 개념들을 다시 설정해야만 할 것이다. 현대 윤리학은 자신의 기초 개념들에 대해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욕망 개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런 난제를 풀어가는 데 일조할 기회를 찾는 것이다.


정념과 욕망: 근대적 욕망의 탄생 (데카르트와 칸트)
고대의 욕망 개념이 근대적인 형태로 뒤바뀌는 과정은 17세기의 두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게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서양 최초로 체계적이고 정교한 정념론을 구축하는 가운데 근대적인 욕망 개념에 초석을 놓았다. 이들은 정념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정념의 올바른 향유를 행복한 삶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제시했다. 17세기 이전에 정념은 ‘몸의 병’에 상응하는 어떤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의 병으로 설정되어 정념은 치료해야 할 어떤 병이고, 그런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이 철학(소피아)이라는 것이다.


플라톤-기독교 전통에서도 정념 자체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여전히 유지되거나 심지어 강화됐다. 정념은 영혼을 이성에서 멀어지게 하고 육체에 의존적으로 만드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반면 데카르트는 정념을 치욕이나 저주의 대상으로, 도덕적 비난의 표적으로 삼는 것을 자제했다. 그 대신 신체와 영혼의 결합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실천적 판단을 향도하는 첫 번째 원리가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라면, 정념은 그런 선악을 식별하거나 구별할 수 있도록 수립된 자연적 기호작용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정념의 본성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정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효과를 낳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정념의 본성을 세세히 알면 알수록 지상에서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정념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념은 일반적으로 영혼의 지각, 감각, 혹은 동요라고 정의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본격적인 정념 분석은 다양한 정서의 뿌리가 되는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정념’을 추출하는 데서 시작한다. 여기서 원초적 정념으로 꼽히는 것은 여섯 가지다. 경이, 사랑과 미움, 욕망, 기쁨과 슬픔 등이 그것이다. 데카르트가 열거한 원초적 정념들 중에서 각별히 되짚어봐야 할 것은 욕망과 경이다. 욕망은 의식에 미래의 차원을 개방하는 정념이자 미래와 교신하는 원격감응 속에서 선악의 표상을 정초하는 정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정념론이나 그 이후의 욕망의 역사에서는 욕망보다도 경이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나는 데카르트의 경이를 영혼의 자기원인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어떤 ‘순수 욕망’으로 해석하고 싶다).


데카르트의 실천적 코기토에 해당하는 관대는 자기존중의 형식을 띠는 자기감응이되 그 자기감응은 자아 내부에서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자유의지의 크기에 근거한다. 관대는 의지의 올바른 사용 속에서 수반되는 정념적 자기의식으로서 데카르트는 여기서 대타감응에서 비롯되는 정념을 내생적 동요의 계기로 전도시키는 자기감응의 능력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아마 근대적 형태의 도덕적 욕망 혹은 근대적 형태의 덕성이 태어나고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정념론은 칸트에서 완성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미 선취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데카르트의 관대와 칸트의 존경을 비교하면서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도덕적 코기토가 관대로 대변된다면, 칸트의 도덕적 코기토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 있다. 칸트의 주체는 아무리 사리분별이 투철하고 의지가 강하다 한들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도덕적 실천의 주체로서 일어설 수 없다. 데카르트의 관대가 인격 내부의 자유의지에 대한 감탄과 존중이라면, 칸트의 존경은 인격 내부의 도덕법칙에 대한 감탄이자 존경이다. 칸트는 자유 혹은 자유의지를 가능한 이성의 순수한 자기규정(자율성)에서 찾았고, 이성의 순수한 자기규정은 신체에서 비롯되는 모든 경향들의 세계(현상계) 저편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실천적 주체의 행위준칙을 두고 순수 이성과 경쟁하는 것이 욕망이다. 이 점에서 욕망이나 거기서 비롯된 정념은 동물적인 삶의 차원을 넘어서는, 오로지 인간에게만 고유한 역량이다. 준칙의 수립과 전개의 능력을 지닌 욕망은 이성과 더불어 실천적 주체를 규정하는 사법적 권한을 다투며, 이런 경쟁 속에서 이성의 능력을 차용하고 전유한다. 이성과 투쟁하는 가운데 욕망은 이성을 흉내 내고 닮아간다. 정확히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동물에게 정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고, 욕망이 없는 한에서 이성을 갖지 않는다. 욕망은 ‘언제나 이성과 연결돼 있고’(『인간학』 80절), 그런 한에서 ‘자유 개념’을 갖는다. 그리고 이렇게 이성의 자유를 대체할 또 다른 종류의 자유를 추구하고 실현한다는 점에서 욕망은 이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근대적 욕망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2. 생명과 문화 사이의 욕망: 욕망의 존재론 (스피노자와 헤겔)
두 철학자에게서 욕망은 단순히 심리학적 현상으로만 다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생물학적 현상으로, 나아가 존재론적 현상으로 간주된다. 공통점은 존재론적 일원론이라는 데 있다. 이들의 일원론적 세계상에서 욕망은 심리학적 현상이기에 앞서 존재자 일반의 실존 방식 자체다. 욕망을 존재자(개체) 일반의 실존 방식 자체로 간주한다는 것은 욕망을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 욕망의 존재론에서 욕망은 단순히 선한 것도, 단순히 악한 것도 아니다. 욕망은 선악의 구별에 앞서는 것이며, 선악의 구별 자체를 결정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칸트에게서 선과 악은 도덕법칙과의 일치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2차적 지위의 개념이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선과 악은 욕망 다음에 오는 파생적 개념이다. 즉 어떤 것이 본래부터 선하므로 욕망이 그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그리로 향하므로 비로소 그 대상이 선한 것이 되는 것이다.


욕망의 존재론에서 특기할 또 하나의 사실은 욕망과 이성, 혹은 욕망과 의지 사이의 관계에 있다.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에서 욕망은 이성의 중립적이고 명석 판명한 시선과 대립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하는 것이 이성이라면,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한다. 욕망에 의해 간섭을 받을 때 이성의 시선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왜곡된다. 이런 이유에서 합리주의 전통에서 욕망은 진리 발견을 위해 가장 먼저 통제돼야 할 어떤 것이다. 합리주의가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수단은 의지다. 의지는 이성의 명령에 따는 자발적 능력으로서 욕망의 일탈적 충동을 제압하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데카르트와 칸트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욕망의 존재론에서 욕망은 더 이상 이성에, 하물며 의지에 대립하지 않는다. 이성과 의지는 욕망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거나 욕망의 진화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들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욕망은 욕구나 본능 같은 하위의 형태를 띠면서 출현하여 이성이나 의지 같은 상위의 형태를 띠는 방식으로 진화해간다. 이제 욕망은 어두운 면에서 밝은 면에 이르는 인간의 본성 전체를 압축하는 용어다.


욕망의 존재론은 크게 두 유형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연철학의 관점을, 다른 하나는 정신철학의 관점을 위주로 하는 유형이다. 자연철학의 관점을 위주로 할 때 욕망의 탁월한 사례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에 있다. 정신철학의 관점을 위주로 할 때 욕망은 자연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현상이다. 욕망은 문화에 고유한 상징적 가치와 그 질서를 배경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첫 번째 유형을 대변한다면, 두 번째 유형은 헤겔에 의해 대변된다.

욕망과 무의식: 현대적 욕망의 탄생
욕망에 대한 헤겔의 테제는 두 가지로 집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고유한 욕망은 인정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미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노동의 주체는 죽음의 공포에 의해 예속된 노예적 주체, 소외된 주체라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테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욕망 개념을 중심으로 재편했다는 점에서 이미 욕망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욕망이 문화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 속에서 주입되고 학습되는 어떤 것임을 함축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것인지를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부터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까지 문화적 환경에서 배워야 한다. 그런데 헤겔에게 학습과 도야는 노예적인 위치에서만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소외 혹은 외화(희생)의 과정이다. 노예적 주체는 노동을 통한 대상을 변형하는 가운데 자기를 변형하고 마침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각각의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귀중한 일부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노예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객관화(외화)할 수도, 객관적 질서를 내면화할 수도 없다. 노예적 주체의 정체성은 바깥에서 찾아야 할 어떤 것이되, 바깥으로 향한 외-출의 가능조건은 언제나 소외와 희생에 있다.


이런 헤겔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무의식 이론에서 그대로 수용돼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로 압축된다. 즉 욕망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고 마침내 스스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열망한다. 라캉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 정확히 헤겔적인 공식임을 표명한다. 헤겔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서도 욕망은 인정의 욕망이고, 주체는 어떤 희생과 소외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노예적 주체다. 헤겔에게 주체가 노동의 세계로 소외된 노예적 주체라면, 라캉에게 주체는 언어의 세계로 소외된 말하는 주체다. 주체는 언어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의미의 차원(생각과 소통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의 존재(parle??tre)’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주체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팔루스)다. 말하는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 주체, ‘존재결핍(manque-?-e??tre)’을 겪는 주체다. 주체는 말의 세계로 소외되는 덕분에 의미전달의 능력이나 합리적 사고의 능력을 얻지만, 그 대신 자신의 존재를 희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선언하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E 517)


욕망의 도착성을 발견한 것은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을 유아 성욕에 대한 직관에서 출발해 풀어간다. 그리고 유아 성욕의 분석을 거쳐 성에 대한 일반 이론을 준비한다. 프로이트는 유아 성욕을 분석해 (역사적으로 우연한) 그런 한정이 성립하기 이전의 원천적인 성 생활로 거슬러 올라가 도착의 선천적 가능성을 확증한다. 이런 분석의 과정에서 입과 항문을 중심으로 조직화되는 유아의 성 생활이 다양한 사례를 통해 기술된다. 이런 사례 기술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유아 성감대의 절대적 무정부성에 있다. 부분충동의 무정부적 성격을 발견하면서 핵심을 얻은 정신분석의 욕망 개념은 죽음충동의 발견과 더불어 완성 국면에 접어든다. 초기의 프로이트는 충동을 성충동과 자아충동으로 대별했다. 나르시시즘의 발견과 더불어 프로이트는 성충동 못지않게 자아충동이 쾌락원칙을 따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반복강박(고통스러운 꿈이나 기억이 되풀이되는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마침내 충동의 대극 구조를 죽음충동과 생명충동으로 바꿨다. 이때 생명충동은 모두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 죽음충동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죽음충동은 무의식적 욕망의 뿌리인 동시에―도달할 수 없는―목적지이기도 하다.


죽음충동의 가설을 거부했던 대부분의 프로이트 계승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이 가설을 정신분석의 핵심으로 간주했고, 마침내 “모든 충동은 잠재적으로 죽음충동이다”(E 848)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라캉은 1960년의 윤리학 강연에서 로고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주체가 포기한 것을 ‘사물(das Ding)’로 명명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에게서도 나오는 용어이지만, 기본적으로 칸트적인 용어다. 라캉의 관점에서 프로이트의 주요 개념들은 향락(주이상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정의돼야 한다. 헤겔의 노예적 주체(노동의 주체)가 죽음의 공포에 예속돼 있다면, 라캉의 말하는 주체는 그와 유사하게 거세 콤플렉스에 종속돼 있다. 반면 향락의 주체는 거세의 공포, 나아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있다. 죽음충동에 이끌려 ‘사물’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쾌락원칙이 쾌락의 폭발적 쇄도를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임을 보았다. 향락이라는 근본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법적이거나 초법적인 방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 근본악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 상상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향락이 현실적으로 먼저 있어서 그것을 금지하는 법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법이 먼저 있어서 그 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향락적 욕망이 생긴 것이다. 향락보다는 법이, 법보다는 금지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즉 금지는 법을 낳으면서 동시에 향락을 낳는 것이고, 금지가 낳은 법과 향락은 서로 의존하면 동시에 펼쳐진다. 향락이라는 황홀경은 처음부터 환상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법(쾌락원칙, 도덕법칙)에 의존해서만 성립한다. 법이 금지에 바탕을 두는 것과 똑같이 향락은 법에 바탕을 둔다. 향락은 법이 그어놓은 금지의 선이 있고서야 생기는 위반의 욕망에 뿌리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법칙은 향락의 모태이자 지지대다.


칸트는 도덕법칙을 윤리학의 중심에 놓은 철학자다. 고대 윤리학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善을 정의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이런 윤리학에서 도덕법칙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에 불과하다. 반면 칸트의 윤리학에서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명령(의무)에 따르는 것이 일차적인 되고, 선과 악은 그 의무의 이행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2차적 귀결이다. 여기서는 욕망을 비롯한 모든 정념, 자비를 포함한 모든 정서, 그밖에 신체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경향은 모두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하물며 향락과 같은 변태적 욕망은 말할 것도 없다. 칸트의 관점에서 그것은 법과는 완전히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 라캉은 사도 바울에 의지해 이런 칸트가 전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차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도덕법칙이 언제나 향락과 상보적으로 함께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행관계 때문에 도덕법칙의 구속력이 강해질수록 그것과 비례해 향락의 강도도 커진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런 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사드의 윤리학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말한다. 칸트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법칙 중심의 윤리학은 사드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향락 중심의 윤리학 같은 뿌리에서 뻗은 두 줄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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