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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극은 민주주의적 주체의 영원한 반대급부”
“그의 비극은 민주주의적 주체의 영원한 반대급부”
  • 교수신문
  • 승인 2016.09.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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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철학자 오이디푸스』 장-조제프 구 지음|정지은 옮김|도서출판 b|350쪽|22,000원

 

철저히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은, 신화적 언어 속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주체는 자율 의지에 의해 항시적으로 고무되는 주체인 한에서 그러한 어려움과 대면한다. 플라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버지와의 평등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를 제거하는 폭군적 아들로―오이디푸스적 의미가 포함되는 폭군적 아들로―변할 수 있음을 보았다. 정신분석의 영역은 그 기능에 의해 민주주의적인 사회-상징적 체제 안으로 소환된다. 정신분석은 민주주의적 주체의 자율 의지가 자기 안에 반드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어둠, 즉 상징적인 무의식적 보상물을 떠맡는다. 민주주의적 주체의 오이디푸스적 갈등.

파토스나 지식의 오이디푸스적 구조화는 그처럼 後전통적 세계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제도화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전수의 드라마는 완전히 사라졌다. 거세의 통과는 자유롭고 개별적이고 자기-작동적으로 남아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지연되고 항구적이고 무한정적이다. 따라서 역사적 세계는 입문의 과정이 사라져버린 세계이기보다는 어느 누구도 그 과정에 결코 종지부를 찍지 못한 세계일 것이다. 그것은 아들의 세계이며, 구조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지식에 의한 자세로 안정화될 수 없는 세계다. 연장된 경계성의 세계. 한마디로 그것은 (항구적이고 임시적이고 반복되는) 자기-설립의 세계, 그러니까 역사의 세계다. 구성적인 상상적인 것(imaginal)을 형상화하는 것은 바로 입문시키는 자의 위치다(그것이 일어나는 자리는 입문된 자의 ‘사이비적(mystification)’인 ‘텅 빈’ 위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화를 그 전달자로 하는 진리를 맹목적으로 앞세우는 것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예고한 태곳적 저주를 자율성의 모든 근본적 시도들 내지는 자기중심화된 주체성의 모든 형태들에 대립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주제가 아니다. 우리는 헤겔이 오이디푸스에게 부여한 영웅적 긍정성으로부터 오이디푸스를 분리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영웅주의는 과거의 사회적-상징적 체제들과의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표시하는 출발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필수적인 어떤 계기로, 어떤 위험으로, 늘 재개해야 하는 어떤 항구적인 열림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의 모든 이행, 전수되는 것으로부터의 전적인 해방 의지는 비극적인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오이디푸스의비극, 이것의 개념적이거나 실존적인 근대적 전이들이 아무리 복잡하고 새롭다고 할지라도―오이디푸스의 비극이 다른 무엇보다 더 강력하게 자율성의 의지로 소환되는 한에서―그것은 민주주의적 주체의 영원한 반대급부다. 따라서 그러한 주체는 어떤 찢겨짐에 의해 항시적으로 작동된다. 다시 말해 주체는 테아비에서의 오이디푸스의 승리와 콜로노스에서의 오이디푸스의 가장자리 사이에 언제나 있게 될 것이다.

젊은 오이디푸스와 늙은 오이디푸스, ‘학자’와 ‘聖人’을 필연적으로 연결시키는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몇몇 사람들이 철학이 알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바로 그 타자성을 철학에서 복원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해석의 행간에는 그러한 비난이 이미 표명돼 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서의 오이디푸스의 자기선포적(autologique) 과정을 중단시킨다. 두 오이디푸스를 연결하는 운명을 진정으로 사고하는 것, 그것은 자기반성적인 일방성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오이디푸스적 주체의 반란에 쇄신과 오만함과 탈신성화의 힘을 유지키시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힘이 없다면 유구한 것에 대한 노인의 맹목적인 매혹은 마비시키는 것이 될 위험이 있고, 자유로운 사고를 소멸될 위험이 있다. 여기서 행해지는 것은 민주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계획이 결코 아니다. 테바이의 철학자-왕과 콜로노스의 박탈당한 聖人인 두 오이디푸스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는 없다. 연극이 서사적인 논리를 통해 그러한 위치들을 다만 연속적인 것으로 창조해내기만 할 뿐이라면, 서양의 주체를 그의 비극 속에서 구성하는 어떤 긴장처럼, 저 두 위치들을, 함께 사고해야 한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저자는 프랑스의 국제철학학교의 프로그래머였으며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객원교수였다. 1980년대부터 미국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캘리포니아대, 브라운대 등에서 강의했다. 그후 20년 동안 라이스대 교수로 있었고, 지금은 같은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다. 『경제와 상징적인 것』, 『가치의 경박성』, 『시간의 골절들』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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