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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호랑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표현력
‘친근한 호랑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표현력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08.03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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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36.백자동화까치호랑이무늬항아리 (白磁銅畵虎鵲文壺)
▲ 사진① 백자 동화 호작문 항아리

조선후기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유행해 걸어두던
까치호랑이그림을 지방의 떠돌이 畵工이 아무런
사심 없이 도자기에 옮겨놓은 듯한 걸작이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예술을 사랑한 대표적인 일본인이다. 1889년 동경에서 출생한 그는 동경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술사와 민예연구를 바탕으로 미술평론가로 활약했으며 특히 1924년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해 조선의 도자기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조선의 민족예술 보존과 자각에 기여했다.
일제가 총독부건물을 건축할 당시에 조선의 상징적인 건물인 광화문을 철거하려고하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적극적으로 철거를 반대했으며, 3·1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비난하고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을 슬퍼했다. 또한 일본의 고대예술은 고대 조선의 영향으로 발전했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했고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안타까워했다. 1936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日本民藝館의 초대관장으로 취임했고 그동안 수집했던 조선도자기 등을 모두 기증했다.


필자는 수년 전(2010년), 그가 기증한 유물 중에 우리나라 도자기만을 별도로 선별한 ‘일본민예관 소장 조선도자기 특별전시회’가 개최돼 그의 수집품을 전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명품의 조선 官窯白磁를 중심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준 높은 심미안이 느껴지는 전시였다.
현존하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명품들은 대부분이 정부에서 운용하는 관요에서 제작된 작품들로 왕실이나 귀족의 상류층이 사용하던 기물들이다. 작품의 예술성이 뛰어나고 화려하며 견고하게 만들어지고 능숙하고 세련된 장인들에 의해서 제작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적은 수량으로 만들어지고 희귀성과 예술성이 높아지며 명품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조선후기 18세기경에 지방에서 私燔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銅畵白磁는 예외다. 명품도자기의 조건인 아름다운 색, 광택, 기형, 문양 등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사진①)의 백자동화호작문호가 기존 고정관념을 깨는 명품이며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최상의 명품에 속한다. 산화동안료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 장식기법의 백자로 산화동안료는 고온에서는 잘 타고 휘발하는 성분 때문에 원하는 대로 그림의 발색을 얻기가 매우 까다롭다(원래 산화동안료를 도자기의 문양으로 세계최초로 사용한 사람들은 고려청자를 제작한 고려의 도공이었다). 오랜 경험에 의해 제작된 산화동안료와 소성온도의 불조절 기술의 조합이 잘 이뤄져야만 붉은색의 그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①)의 백자동화호작문호는 直立한 입구와 밑으로 약간 처진 어깨선이 내려와 허리를 이루는 전형적인 18세기후반의 器形으로 높이 28.7cm, 몸통 25.1cm의 아담한 항아리다. 바닥은 안굽으로 모래받침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몸통에는 물레흔적이 남아 있다. 도자기의 발색은 엷은 회백색에 가까우며 입구부분은 깨져서 보수했고 몸통에도 균열로 인해 보강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 도자기는 명품의 요건이 거의 없다. 그러나 동화안료의 완벽한 발색으로 당시 추구하던 붉은색의 그림이 구현됐으며 특히 도자기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까치호랑이무늬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조선후기 까치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는 몇 점이 알려져 있지만 까치호랑이가 그려진 동화백자는 유일할 가능성이 높다) 명품의 반열에 서는 유물이 된다.


송곳니가 튀어나온 커다란 입과 부리부리한 눈과 눈썹을 갖춘 호랑이가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돌려 소나무위의 까치를 쳐다보는 형상이다. 한껏 무섭게 그린 호랑이이지만 어느 곳에서도 호랑이의 위엄이나 공포심을 찾을 수는 없고 조선후기 민간신앙에 안착한 친근한 호랑이로 변모했다. 이런 표현력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모방할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의 강점이자 특성이며 순수 예술혼의 경지인 것이다. 조선후기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유행해 걸어두던 까치호랑이그림을 지방의 떠돌이 畵工이 아무런 사심 없이 도자기에 옮겨놓은 듯한 걸작이다.

이 銅畵白磁는 아직까지 생산지조차도 확인이 안 됐고 다만 개성이나 해주, 강화 교동이라는 설이 있으나 도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말 해주지방의 독특한 백자생산을 감안해 본다면 해주지방의 어딘가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찍이 조선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 여러 종류의 동화백자를 수집했다 (사진⑤~⑧). 그가 수집한 우리나라 문화재는 공개돼 연구자는 별도의 열람이 가능하다.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해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릴 때 양심 있는 한 일본인이 했던 작은 역할이 후세에 큰 영향을 남기게 됐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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