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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담론은 동아시아화돼야 한다”
“동아시아 담론은 동아시아화돼야 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8.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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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동아시아 담론: 1990~2000년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 윤여일 지음|돌베개|451쪽|28,000원

 동아시아담론은 ‘동아시아’라는 핵심어에서 담론의 목적도 주체도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동아시아담론은
어떤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모색이 결합되느냐에 따라 함의가 크게 달라졌다.

 

이 책은 수년 간 자료를 읽으며 작성한 박사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08년의 일이었다. 박사논문은 1990년대 초반 탈냉전기부터 2000년대 중반 참여정부기까지의 동아시아 담론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동북아시대구상을 내세운 참여정부기가 동아시아 담론의 이행에서 중요 국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문의 방향을 2008년에 결정했다는 사정도 반영돼 있다. 그런데 논문 작성에 착수한 시점에는 거의 동시기의 언설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아시아 담론은 마치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출구전략이기라도 한듯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됐고 여러 영역에서 논의가 펼쳐져 유동 중이었다. 조망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기에는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의 담론을 다루려다보니 논문을 써나가는 동안 구성을 여러 차례 수정해야 했다.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흐르고 논문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왔다. 7년 전과 견준다면 동아시아 담론은 확실히 활력을 잃은 듯했다. 좀처럼 회자되지도 않았다. 이제야 그 운동이 멈춰 회고의 대상, 연구의 대상으로 안착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동아시아 관련 연구의 명맥이 끊긴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집념어린 소수의 논자를 제외한다면 동아시아 시각을 적극 개진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야 연구대상으로 다룰 만한 거리가 확보되었다고 할 텐데, 이제 와서는 철지난 담론이 되어 버려 오히려 연구의 시의성이 불충분해 보였다. 7년 전에는 뜨거워서 손대기 어려웠으나 이제는 너무 식어 버린 것이다.
반복하지만 박사논문은 탈냉전기부터 참여정부기까지 동아시아 담론이 형성되고 부상하고 이행해온 궤적을 다뤘다. 그 과정을 쇠퇴 이후에 되돌아본 것이다. 따라서 논문을 써나가는 동안 줄곧 간직했던 물음은 이런 것들이었다. 1990년대 초부터 어림한다면 20년 정도가 한국사상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의 유통기한이었던 것일까. 동아시아 담론은 정녕 사상적 체력이 고갈되고 문제제기적 기능을 상실한 것일까.
그리하여 박사논문은 뚜렷한 한 가지 목적을 갖게 됐다. 동아시아 담론의 遺産化다. 그러나 유산화는 과거사로서 박제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산화란 동아시아 담론이 쇠퇴하더라도 사상사의 자원에 값할 문제의식을 골라내고 움켜쥐려는 시도다. 동아시아 담론이 쇠퇴했다는 진단이 실상에서 벗어난 것이더라도 현재의 담론을 사상사의 유산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그 담론은 앞으로의 성장을 기약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목적에서 박사논문은 한 가지 작업에 집중했다. 동아시아 담론의 재역사화다. 동아시아 담론은 복잡한 시대적·지정학적 배경에서 비롯돼 다양한 학술적·사회적 수요에 반응하다가 논의는 확산됐으나 정작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 ‘무엇을 위한 담론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놓쳐 내실이 모호해진 측면이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동아시아 담론이 외적 성장을 거듭하자 모호한 채로 점차 알 만한 담론이 돼갔다는 데 있다. ‘동아시아 담론’이라고 하면 뭔가 알 것 같지만, 실상 무엇을 일컬어 동아시아 담론이라고 부르는지, 어디까지를 동아시아 담론이라고 명명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가 불분명한 채였다. 따라서 박사논문에서는 동아시아 담론을 다시 역사화하고자 했다. 혼종하는 동아시아 관련 논의들을 뭉뚱그리지 않고 인식론적 토대를 분석해 십여 년에 걸친 이행과 분화의 혼돈상을 정리하되, 그 속에서 내재적으로 동아시아를 필요로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상사적 함량을 갖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려내고, 실질적으로 지속되는 논점을 추출해 동아시아 담론의 필요성을 지금의 조건에서 재구성하고자 했다. 동아시아 담론의 유산화 작업은 동아시아 담론을 멈춰세워 포괄적 가치판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재적 비판을 통해 그 사상사적 의의를 도출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동아시아 담론’이다. 하지만 지난 이십여 년 간 동아시아 담론은 일관적 내적 논리를 지닌 단수의 담론이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동아시아 담론은 근대화론, 민족주의론, 여성주의론 등 여느 담론과 비교하건대 뚜렷한 자기영역을 갖는다기보다 차라리 여타의 논의들이 뒤섞이는 지적 구성체, 다양한 지적 흐름이 수렴되거나 거쳐 가는 담론장에 가까웠다. 거기서는 서구적 가치체계 아래서 평가절하되거나 왜곡 폄하된 고전의 재해석과 전통사상의 현대화 방안을 강구하는 시각, 고유한 문화적 요소에 기반해 지역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각, 역내 신흥발전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을 사회적·문화적 특성으로 설명하려는 시각, 자본주의적 근대체제를 대신할 대안적 사회원리를 모색하는 시각, 미국패권적 세계질서를 극복하고자 민중 간 연대를 도모하는 시각, 지역 통합의 추진을 통해 공동의 경제적·안보적 이익을 제고하려는 시각 등이 복잡하게 교직했다. 이러한 특수성은 무엇보다 동아시아 담론이 여느 담론과 달리 지향성이 모호한 데서 기인할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은 ‘동아시아’라는 핵심어에서 담론의 목적도 주체도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동아시아 담론은 고정된 의미와 일률적 용법을 갖는다기보다 어떤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모색이 결합되느냐에 따라 함의가 크게 달라졌다.

다만 시각의 차이를 불문하고 동아시아 담론의 기본적 가치를 꼽는다면 서구의 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을 수입해 자신의 현실에 적용하고 그 이론의 결론에 자신의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풍조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실에서 지적 과제를 발굴하고 언어를 개발해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 담론만이 그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동아시아 담론은 인식론적 난제로 인해, 즉 동아시아 인식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에 포함돼 되비친다는, 그리하여 동아시아 인식은 인식주체의 자기표상 문제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다른 담론들과 차별화됐다. 그렇기에 시각이 무엇이건 간에 주체성의 문제의식이 동아시아 담론에는 관류하며, 동아시아 담론은 특정 영역에 국한된 전문적 논의에 머물지 않았다. 지적식민화와 공동언어의 소실 현상이 심각한 한국지식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의 부흥은 분명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다만 자료들을 읽다보니 동아시아 담론이 동아시아적 담론이라기보다 한국지식계에서만 통용되는 내수용 담론으로 굳어갔다는 인상이 들게 됐다. 한국지식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은 한국 측의 수요가 짙게 투영된 결과 역으로 지역 인식이 제약된 측면도 있었다. 그리하여 은연중에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상상된 지도로 동아시아를 표상해 문제설정의 당위성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이 역내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얼마나 실천력을 가질 수 있을지, 역내의 타국으로부터 얼마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의문에 부쳐졌다.

동아시아 담론의 유산화. 이 책의 목적이 이것 하나이듯, 그리하여 이 책의 주장 역시 하나다. 동아시아 담론은 동아시아화돼야 한다. 나는 동아시아 담론이 동아시아화된다는 것은 바깥에서 주어진 정형화된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의 조건에 근거해 사고를 숙성시키되 그 사고를 다른 사회의 타자와 공유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각도에서 반추하자면 지금껏 동아시아 담론은 전자에서 부분적 성과를 냈을 뿐이다. 한국산 담론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회에도 쓰임이 있을 지역적 자산으로 가다듬어내는 것은 여전히 동아시아 담론의 과제로 남아 있으며, 그래야 동아시아 담론 역시 한국 측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윤여일 제주대 SSK 전임연구원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상황적 사고』 등을 쓰고,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조선과 일본에 살다』,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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