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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우리를 해방시킨다” … 그것은 ‘인간생존’ 담론이었다
“진리가 우리를 해방시킨다” … 그것은 ‘인간생존’ 담론이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7.1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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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함석헌 사상 깊이읽기(전3권) 』 김영호 지음|한길사 刊
▲ 김명호 명예교수는 함석헌을 만나면서 생의 진로가 뒤바꾼 학자다. 그가 함석헌이 사상과 삶을 조명한 세권짜리 책을 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도대체 함석헌 사상의 핵심은 뭘까. 김 교수는 그에게서 다원적 가치를 찾아냈다. 사진제공=한길사

사상가로서 함석헌이 남다른 유형을 보여준 것은 그가 통과한 시대적 환경이 유별난 것이었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그가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살아낸 20세기의 한국은 폐쇄주의로 얼룩진 군주정치, 가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세계대전급 전쟁, 두 차례의 독재 등, 그야말로 간난신고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된 문화도 학술도 이뤄질 리 없는 엄혹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역경이 오히려 큰 사상을 배태한 토양이 됐다. 외면적으로는 저주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축복이 된 경우다. 신앙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가르침은 일제 36년 지배의 고통과 맞바꿀 수도 있다고 말할 만큼, 그는 정신적인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함석헌에게 정신적 가치의 원천은 종교와 신앙이었다. 종교는 인류가 발견하고 축적한 지혜의 보고였고 신앙의 핵심은 신(하나님)이었다. 그것들은 종파적인 개념이 아니고 보편적 진리를 담지한 수원지였다. 그는 종교가 대표한 가치와 원리가 인간의 삶과 사고의 기준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는 그의 사상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엇보다 종교인(종교가)이었고 종교사상가, 종교철학자였다.

그렇다고 그의 사고영역이 그 분야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역사와 사회의 범주 전체가 그에게 시종여일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민족을 넘어 인류 전체로 확대됐다. 그의 사상과 행적에서 문명의 위기를 진단, 경고하는 문명비평가나 예언자의 풍모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함석헌의 사상은 종교·철학·신학·역사 등 인문학·사회학·인류학·생물학·심리학·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근래 논의되는 ‘통섭’적인 융합과학이나 통합적 학문의 선구적인 유형을 보여준다.

이렇듯 함석헌의 글과 말에 담긴 사상의 구조는 다양, 다기해 그를 어떤 특정분야의 사상가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지만, 구태여 좁힌다면 종교철학자, 종교사상가, 역사철학자 또는 문명비평가의 모습과 역할이 두드러진다. 종교와 역사는 그가 세운 가치관의 핵심을 이루는 두 기둥이다. 따라서 그는 다른 어느 것보다 두 가지가 인간과 사회의 원리와 기준 그리고 삶의 척도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의 사상은 두 가지 실로 짜낸 교직이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역사와 종교는 기존의 전통적인 틀이 아닌 본질적이며 원형적인 것이다. 왜곡된 전통의 관점에서는 너무 변혁적이어서 이른바 정통주의자들에게는 이단적이라고 재단되기도 하지만 그의 역사관과 종교관은 왜곡된 전통을 벗어난 것으로 그만큼 독창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함석헌에게 종교와 역사 이외에 사유의 또 하나의 기준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민중(씨ㅇ,ㄹ)이었다. 한 세기를 변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함석헌은 위인이기보다 흔한 보통 사람 즉, 그의 용어로, ‘씨ㅇ,ㄹ’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자격이 있다. 20세기 지식인이 숱한 난관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양심과 상식을 잃지 않으면서 정신적으로 왜곡되지 않고 살고 생각했다면 누구나 그의 의식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재 수준이라면, 함석헌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험난한 세기를 통과하면서 대부분의 사람은 상식과 양심을 잃어버리거나, 있었더라도 함석헌처럼 용기 있게 사회적으로 표출시키지 못했다. 옛 시대 유형으로 말하자면, 그는 독야청청한 극소수 정의로운 선비 집단에 속했고 그 전통의 뒷물을 보여준 마지막 선비였다. 20세기 한국사의 산 증인이며 민중을 발견한 민중의 진정한 대표로서 함석헌이 남긴 사상은 현대의 인문고전으로 남을 만한 자격을 구비하고 있다.

함석헌의 사상은 책이나 상아탑에서 나온 지식의 뭉치가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역사와 현실을 일차자료로 삼아 분석하고 사유하면서 생명의 보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산물이지만, 단순히 민족사회만 아니라 인류사회 전체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명비평가로서 함석헌의 예리한 통찰은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논의되기 이전에 이미 그는 국가주의를 넘어선 세계주의를 역설했다. 그의 예언자적 경고와 비전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금 세계는 여러 면에서 과도기적 위시 속에 들어 있다. 이 과도기를 슬기롭게 넘어서고 위기를 극복하려면 그 원리와 방법론을 함석헌의 사상에서 찾아야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함석헌의 생각과 사상을 살펴보는 일은 단순한 철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나 호기심 충족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 생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의 담론은 개인의 신앙 같은 미시적인 것이 아니고 인류의 생존이 달린 거대 담론이다. 그의 전체 사상과 다양한 담론들을 문명비평의 한 주체로 수렴시켜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단순히 지적 사유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험난한 민족사와 함께 걸어온 그의 삶 속에서 태동된 것들로서 현실을 벗어난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이론과 나아가 병든 인류와 문명을 치유하는 救世論적 처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론 없는 실천, 실천 없는 이론을 다 배제했다. 그 이론은 종교적 진리에 근거한 궁극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음 글을 살펴보자.

“우리의 민주투쟁의 근본 결점은 아무런 원리의 주장이 없는 점입니다. 열심으로 사회비판을  하고 강한 투지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 인생관·역사관을 보면 신앙 없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이길 수도 없거니와 이겨도 무의미합니다. 또 다른 하나의 정권을 세우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하신 대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건지자는 것이 우리 목적입니다. 간디가 영국의 지배세력과 싸우면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진리파지]를 내세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람 그 자체를 고치지 않고는 정권을 열 번 변경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목적은 그가 가르쳐주신 진리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의 가르침대로 하면 우리가 그의 참 제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해방시켜줄 것입니다.”(1981, 『저작집』 제15권 58~59쪽)

이 문단 하나에 함석헌이 사상과 실천목표가 농축돼 있다. 그가 당장의 현실을 떠나 추상적인 진리를 사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연하다. 여기서 당면한 현실은 그가 장기간(1950~80년대) 누구보다 헌신하던 민주화운동이다. 그는 운동 참여자들이 원리를 세우지 않고 투쟁만 일삼는 상황을 지적한다. 이때 신앙, 예수,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그가 꼭 종파적으로 치우쳤다고 볼 필요는 없다. (마치 원효가 불교에 의탁해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한 것처럼) 기독교는 함석헌이 우연히 발을 디뎌온 진리체계일 분이다. 그는 힌두교(간디) 원리(진리, 비폭력)까지 언급할 만큼 다원주의적이며 보편적이다. 여기서 ‘우리 목적’은 두 갈래로 표현된다. 그것은 바로 함석헌 자신의 목적이다. ‘우리’는 ‘나’의 확대다. 그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가, 왜 평생 투쟁하고 이런 사상을 폈는가를 밝혀준다.

함석헌의 글은 일상적인 구어체의 평이한 문체로 표현되지만 깊은 생각과 사상이 농축돼 있다. 그것은 서구적인 강단철학이나 교파신학의 산물이 아니다. 철학이라 하더라도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다루는 종교의 차원을 수반한 것이다. 포괄적으로 종교철학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철학의 한 분야가 아니고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종교·철학이다. 동양의 철학적 사유는 서양철학과 달리 종교 전통과 분리될 수 없다. 그 점에서 함석헌은 동양철학, 한국철학의 전통에 선 철학자다. 그가 발견한 사유에 독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 흐름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리된다.

저자 김명호 인하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캐나다 맥마스터대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중앙신학교에서 함석헌·안병무를 만나면서 삶의 길이 달라졌다. 불교철학, 인도철학, 종교철학, 세계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지적 관심을 가져왔다.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함석헌학회 회장과 크리슈나무르티 한국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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