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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생태계’ 복원 위해 해야 할 일 다섯 가지
‘인문학 생태계’ 복원 위해 해야 할 일 다섯 가지
  • 교수신문
  • 승인 2016.07.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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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_ 인문학진흥법’에 바란다 ④

 먼저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인문학의 진흥을 위해 할 일이 우선이고 인문학탐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보다 광범한 영역에서 벌이는 인문정신문화의 진흥 활동이 그 다음에 온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큰 목표는 ‘인문학 생태계의 복원’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월 3일 공표된 ‘인문학 및 인문정신무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제13940호)의 시행령 제정(안)은 5월 19일에야 입법예고 됐다. 동법 시행령 제정(안)은 6월 28일까지 입법예고 등을 거친 후, 8월 4일 시행일에 맞춰 제정·공표될 예정이다. 이 법안에서 중요한 것은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주요 사항 심의를 위해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심의회’를 구성·운영한다”라고 명시한 대목이다. 이 ‘심의회’는 “교육부와 문체부 차관 및 관계 부처(기재부, 행자부, 여가부, 문화재청) 차관급 공무원, 전담기관장,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 등 총 20인 이내로 구성할 예정”이다. 이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 관련 정책에 대한 심의를 추진한다. 그러나 심의회 구성은 빨라도 올해 말쯤으로 예상된다. 시기도 문제지만, 심의회에 ‘누구’를 앉히느냐가 중요하다. 국회와 정부가 나서서 법을 제정해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를 진흥하겠다고 밝힌 이상, 제대로 된 전문가가 심의회에서 제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이에 <교수신문>은 「연속기고 ‘인문학진흥’에 바란다」라는 지면을 열어, 5회에 걸쳐 인문학계 중진·원로들의 제언을 공유하고자 한다.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인문학적 탐구 성과가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큰 기여를 할 테니까 인문학 연구를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런 의도로 이뤄지는 인문학 진흥정책이 국가적 인문정책의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 국가의 ‘인문정책’은 이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갖는다. 인문정책은 국민 전체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국가적 정책의 기본으로, 國是의 주춧돌이 돼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인간적 가치’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광범하고도 다양한 여건을 마련하는 정책들과 연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부 부처에 속해 있는 20여개가 넘는 국책연구소 가운데 인문정책연구소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10여 년 전부터 제안해온 인문정책연구소의 설립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그 대신 겨우 법이 하나 제정됐는데, 곧 발효되는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법’이 그것이다. 이 법에도 이런 연구소를 설립 운영한다는 계획은 없고 다만 ‘심의회’만을 둔다 하니, 정말 ‘진흥’이 제대로 잘 될지 의문이다. 법 제정만으로 이런 일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물론 피상적 단견이다. 법 제정도 좋지만, 이런 제도적 장치를 잘 운영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선 걱정되는 것은 정부의 두 부처,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하나의 ‘심의회’를 구성해 하나의 사업을 펼쳐나가는 일이 과연 원활히 잘 될지 쉽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사안마다 주도권 다툼이 있다 보면 ‘배가 산으로 갈’ 우려도 있다. 인문학자들마저 이에 ‘호응’해 두 갈래의 목소리를 낸다면, 이는 최악이다. 그러니 먼저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인문학의 진흥을 위해 할 일이 우선이고 인문학의 탐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보다 광범한 영역에서 벌이는 인문정신문화의 진흥 활동이 그 다음에 온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큰 목표는 ‘인문학 생태계의 복원’이요, 이를 위해 인문학의 진흥과 이를 토대로 한 인문정신의 확산이 선순환구조를 이뤄내도록 두 부처가 협력해야 한다.

정부는 관리할 생각 말고 지원에 집중해야
‘심의회’를 구성하고 나면, 정부는 더이상 관여하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 아니, ‘지원’할 생각만 하고 ‘관리’할 생각은 접어야 한다. 업적을 올려 생색이나 내려는 속셈으로 인문학자들을 앞세워 이 위원회를 ‘조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자들 가운데도 이런 일에 나서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권력지향적 인사가 없으란 법은 없는데, 이런 ‘야합’이 현실이 된다면, 이는 두 부처 간의 알력을 부추겨 ‘인문학 생태계의 복원’을 방해하는 반인문적 악행이 될 것이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우려는 불식돼야 한다. 두 부처 간의 우호적인 협조,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사심 없는 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과 지원, 이 두 가지가 전제돼야만 이 법의 제정이 그 의의를 살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 이 법에 의거해 ‘심의회’가 수립해야 할 (가)인문정책의 기본 방향과 그 실현을 위한 (나)다섯 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가-1) 인문정책은 우선 구성원 전체의 문화적인 삶을 지원·선도하는 문화정책으로, 또 인문학을 진흥하는 학술정책으로,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를 인륜적 국가구성원으로 육성하는 교육정책으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문교육정책이다. 문화정책이나 학술정책보다도 교육정책이 인문정책의 중심에 와야 하는 이유는 문화정책이 이미 교육받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학술정책이 학자들의 활동에 국한되기 쉬운 데 반해, 교육정책은 아직 미성숙한 자라나는 세대 모두의 교육을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자라나는 세대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춰주는 것이다. 그런데 인문교육이란 이들이 어떤 특정한 능력이나 지식을 갖추는 것과는 별개로 ‘그저 인간으로서’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따라서 일반적인 인간적 보편가치의 실현을 도와주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근본에는 인문교육이 놓이게 마련이요, 교육정책 중에서도 인문교육정책이 핵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2)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연구는 본래 인문교육을 위한 것이다. 인문학은 자기반성을 토대로 한 주체연관적·가치지향적 탐구이기 때문에 그 탐구에만 그칠 수가 없고 그 내용의 실현과 연계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인문학은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준비하는 인문교육과 불가분적이며 同根源的이다. 인문학적 탐구는 이상적 인간상을 실현할 실천적 능력을 길러주는 인문교육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인문교육은 이러한 인문학적 탐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인문학 연구는 인문교육과 유리되면 그 본래적인 의의도 희석되며, 그 성과가 인문학 자체의 진흥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학술적 인문학 진흥 정책은 늘 인문교육정책과 연계되도록 수립해야 한다.

가-3) 문화정책으로서의 인문정책은 앞의 두 사항을 염두에 두고 이들과 유리되지 않는 가운데 수립돼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외화내빈’이다. 요란한 홍보와 과장된 업적 보고가 국민 전체의 문화적인 삶을 지원하고 선도하는 일에 도움을 주진 못할 것이다. 다문화 수용의 개방적 태토를 진작시키되 민족 고유의 문화전통을 오늘의 삶에 되살려 내는 일을 추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회성 행사 위주의 문화활동은 지양하고 은근하고도 지속적으로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내면에 스며들어가는 문화활동을 기획,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인문정책연구소’ 구체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방향의 인문정책이 제대로 잘 실현되려면, 특히 인문교육정책과 관련해 다음의 과제들을 수행해야 한다.
나-1) 중등교육과정에서 인문교육이 광범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재정비해야 한다. ‘인문교과군’을 별도로 설정해 그 안에서 문학, 역사, 도덕, 철학 분야의 학습내용을 학교급별 학년별 수준에 맞게 적절히 개발, 학습하게 해야 한다. 특히 도덕 교과 교육은 정치·사회적 내용을 과감히 버리고 고유한 도덕적 문제만을 도덕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도록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고등학교에서 대학입시를 염두에 두고 문과, 이과로 학급을 나누고 이과 학생들에게 인문교육을 소홀히 하는 일은 조속히 지양해야 한다.

나-2) 인문학 분야의 석·박사 연구자들이 중등교육과정의 인문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원 양성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현실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대학생이 줄어들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문학 연구자가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른바 학문후속세대가 끊기어 인문학 연구가 정체되고 나면 인문교육도 자연히 빈약해지고 결국 멈추고 말 것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학생이 줄어들지 않고 이들 중 적잖은 수효가 대학원에 진학해 인문학 연구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자격 검증을 거쳐 교사자격을 취득한 뒤 중등교육과정의 인문학 교육에 참여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면 중등교육과정에서는 인문교육이 질적으로 심화되고 대학에서는 인문학 연구자가 많아져 인문학 연구가 진흥할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차단하고 있는 사범대학 제도의 존립에 대해서도 심각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나-3) 대학에서 인문교육을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인문학 전문교육과 인문교양교육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동일한 학과목에서 전공과 교양을 구분한다는 것은 인문교육과 인문학 연구의 同源性을 망각한 처사다. 이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에서 전공을 불문하고 누구나 기본적으로 인문교양교육을 받도록 교육과정을 구조적으로 成層化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교육구조를 바꿔 학사과정에서는 누구나 인문교양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나-4) 인문학 진흥을 위한 지원은 지속·제도적인 학문후속세대 양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선 개개의 연구계획을 단기간 지원하는 현행의 지원 방식을 예비학자를 선발해 연구자를 장기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의 탐구 성과는 그 특성상 장기간의 학문적 성숙을 통해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것이 보통이므로, 사람 중심으로 지원이 이뤄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연구를 계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분적 안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학자적 자질을 검증하는 데는 엄격성과 객관성이 수준 높게 지켜져야 할 것이다.

나-5) 이상의 과제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인문정책연구소’의 설립 운영이 필요하다. 새로이 제정되는 이 법에도 “인문학 및 인문정신 진흥업무를 담당할 전담기관을 심의회가 지정할 수” 있도록 돼있는데, 과연 현존하는 어떤 기관을 염두에 두고 이런 조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런 기관이 없는 상태이니, 그런 기관을 이제 창립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손동현 성균관대 명예교수·대전대 석좌교수
필자는 한국철학회 회장, 한국교양교육학회장, 전국대학교양교육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6세계인문학포럼 추진위원장,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세계와 정신』, 『세계존재의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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