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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들뢰즈’에 주목 …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다
‘정치적 들뢰즈’에 주목 …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7.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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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국제 들뢰즈연구 아시아학술대회(서울)를 마치고
▲ 제4회 국제들뢰즈연구아시아학술대회를 마치고 대회장(서울대)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지난달 17일부터 19일까지 제 4회 국제들뢰즈연구(International Deleuze Studies) 아시아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타이완의 타이페이, 일본의 오사카, 인도의 마니팔에 이어서 네 번째로 개최된 국제들뢰즈연구학회의 공식 국제학술대회였다. 이 대회는 다소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데, 햇수로 올해 10년째 접어든 국제들뢰즈연구학회의 아시아 학술대회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교수신문>에 필자가 기고했던 ‘학술대회 참가기’에 등장한 그 학술대회가 바로 이번에 서울에서 열린 것이다.

국제들뢰즈연구학회는 이언 부캐넌, 그렉 램버트, 클레어 콜브룩, 도로시아 올코우스키 등이 주도해서 만든 <들뢰즈 연구>라는 학술저널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프레드릭 제임슨, 브라이언 마수미, 로널드 보그, 유진 홀랜드 같은 쟁쟁한 석학들이 편집위원에 망라돼 있고, 영국의 에딘버러대학출판부에서 발행하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들뢰즈와 조우하기’였고, 16개국에서 7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모여 활발한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이 대회의 공동조직자는 필자를 포함해서 강우성 서울대 교수와 김재인 박사였다. 한편으로 한국비평이론학회(회장 신명아 경희대 교수)가 협력단체로 참가해서 대회 운영에 큰 도움을 줬다. 들뢰즈라는 매개로 의기투합한 우리 세 사람은 정확히 1년 전에 모여 서울대회를 성사시키자고 뜻을 모았다. 물론 서울 대회를 개최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은 훨씬 전부터 있었다. 다만, 대회를 추진할 당사자들이 개인적 일들로 너무 바쁜 나머지 더 일찍 ‘국제적인 여론’을 수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한국에서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필자 역시 이미 몇 군데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들뢰즈주의’는 1980년대를 넘어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국가의 붕괴 이후에 직면했던 사상적 공백 상태를 메웠던 이론이었다. 이진경과 조정환은 이런 변화를 대표하는 80년대 대표 이론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각각 ‘수유-너머’와 ‘다중지성의 정원’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들뢰즈는 학계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 철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흐름과 함께 학계에 머물다가 바깥으로 나온 이들을 중심으로 한 철학아카데미 역시 들뢰즈를 대중화하는 작업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국 들뢰즈 연구의 국제적 수준 확인
이런 전방위적인 들뢰즈 연구가들의 노력과 함께 1990년대 활발하게 퍼져갔던 ‘철학세미나 붐’은 들뢰즈를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기엔 김재인의 번역도 큰 몫을 했다. 서울 대회는 이렇게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들뢰즈 연구의 경향성을 세계의 연구자들과 함께 나눈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이미 국제적인 수준에서 한국의 들뢰즈 연구는 주목받고 있었는데, 이번 서울 대회는 이런 기대를 충족시킬 좋은 계기였다.

‘교류’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기조강연자도 원로학자보다 신진학자들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이언 부캐넌이나 히가키 다츠야 같은 중견학자들과 나란히 자네이 숄츠와 카미니 벨로디, 토니 시, 그리고 고이치로 고쿠분이 이런 취지에서 초청됐다. 특히 고쿠분은 최근 한국에 활발하게 저서가 번역되면서 필명을 획득했는데, 그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는 잠잠해진 것 같던 들뢰즈 읽기 붐을 다시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고쿠분은 일본에서 활발하게 사회운동과 들뢰즈 철학을 접목시키고 있는 실천적인 학자이기도 한데, 이번 서울 대회에서도 최근의 관심사항을 반영해서 「다시 상상력에 대해: 좌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흥미로운 주제 논문을 발표해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날 좌파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자본가들까지 좌파적 상상력을 차용해서 ‘창조적 모험정신’을 강조하는 마당에 좌파의 명분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고쿠분은 들뢰즈 철학을 통해 진지하게 캐물었다.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성’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고쿠분은 들뢰즈야말로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철학자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평등’은 소수자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존재를 소수성의 단위로 잘게 나누는 것이야말로 좌파적인 것의 관건이라는 주장이었다.

고쿠분의 발표와 함께 주목할 만한 ‘정치적 들뢰즈’에 대한 발표는 토니 시와 자네이 숄츠를 통해 제기됐다. 토니 시는 들뢰즈 철학을 통해 민주주의 개념을 점검하고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토니는 ‘내재성’과 ‘욕망의 생산’이라는 들뢰즈의 핵심 개념은 기존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독재 모두를 반대하는 다른 가능성의 정치를 구상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네이 숄츠는 들뢰즈의 ‘분열분석’을 통해 페미니즘에 개입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기존의 페미니즘이 처해 있는 딜레마를 들뢰즈의 개념인 ‘여성-되기’로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견을 표명했다.

흥미롭게도 이번 서울 대회에서 기조 강연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들뢰즈’에 주목하면서 어떻게 들뢰즈 철학을 통해 지금 현재 목격하고 있는 정치적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지 토론하고자 했다. 답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들뢰즈적 방법의 기본일 것이다. 특히 토니 시와 고이치로 고쿠분, 그리고 강우성의 발표는 아시아에서 들뢰즈 철학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치와 만나야하는지 당위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강우성은 세월호 사건과 트라우마, 그리고 수치심의 관계를 들뢰즈적으로 읽어내면서 트라우마와 수치심이라는 심리적 차원이 정치화되는 경로를 탐색했다.

이런 발표들은 들뢰즈의 분열분석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이 반철학 또는 비철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정치와 철학을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도였다. 이런 기조강연은 개별 발표들을 만나서 숱한 고원들을 이뤘다. 일본의 파칭코 기계로부터 후쿠시마, 그리고 타이완의 불교와 명상까지 많은 개별 발표들이 있었다. 이런 발표들이 서로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들뢰즈 파장’은 서울 대회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가시지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 같다.

국제대회의 원칙 고수 … 끈끈한 유대감
서울 대회가 끝난 뒤에 마련된 자축의 자리에서 이언 부캐넌은 지금까지 있었던 아시아 대회 중에서 가장 좋았고, 다른 국제 대회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들뢰즈도 들뢰즈였지만, 이들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친밀감을 만들어내는 요소에 혼성적인 서울의 특징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서울 대회를 조직했던 세 사람은 기본적으로 국제대회의 원칙을 지킨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국제대회의 원칙이란 모두 등록비를 받고, 대회 관련 의전 행위를 간소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으레 국제대회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만찬이나 후속 행사는 깔끔하게 생략했다. 보통 국제대회에 참가하면 등록비로 많게는 500달러에서 적게는 300달러를 낸다. 이 등록비는 순수하게 대회를 운영하는 경비로 지출된다. 기조강연자에게도 여행경비와 숙박비, 그리고 소액의 강연료 이외에 일절 지급하지 않았다. 상전처럼 모시고 시내 관광을 다니지도 않았다. 장소를 알려주면 각자 알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필요하면 자신의 지갑을 열었다. 지원 받은 소액의 예산 중 남은 금액은 모두 대회 운영을 도운 학문후속세대에게 지급했다.

여러 국제대회를 다녀보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제대회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존재 이유다. 이번 서울 대회가 아시아 들뢰즈 연구자들 사이에 끈끈한 유대감을 보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제5회 아시아대회는 내년 6월 중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
영국 셰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 영역은 현대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다. 지은 책으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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