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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된 한국학술협의회가 남긴 숙제
해체된 한국학술협의회가 남긴 숙제
  • 교수신문
  • 승인 2016.05.3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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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 <지식의 지평>은 왜 ‘웹진’을 선택했을까?
▲ 한국학술협의회 홈페이지

반년간 학술지 <지식의 지평>은 몇 가지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논문 게재 방식, 종이책이되 수익성을 겨냥하지 않은 유통방식, 그리고 ‘한국학술협의회’의 기관 학술지를 표방한 점 등이다. 필자들이 학계 중진들로 구성됐고, ‘프론티어’, ‘메모랜덤’과 같은 독특한 기획으로 연구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런데 2015년 하반기 <지식의 지평>은 느닷없이 ‘웹진’ 형태로 얼굴을 내밀었다. 더 이상 종이로 인쇄한 <지식의 지평>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웹진 <지식의 지평> 19호에도 이렇다 할 설명은 없었다. 박은진 <지식의 지평> 편집주간은 제19호부터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 <지식의 지평>

변화를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은 웹진의 간기 부분이다. 발행인, 편집인, 그리고 편집위원, 편집주간, 발행일 등이 기록돼 있는데, 발행인은 ‘대우재단’이다. 편집인은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이었던 이태수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원장이다. 부가 설명 부분을 보면, “<지식의 지평>은 대우재단이 국내 학문의 발전과 소통을 위해 발간합니다”로 돼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종이책 <지식의 지평>에는 맨 앞장에 “<지식의 지평>은 대우재단과 한국학술협의회가 국내 학문의 발전과 소통을 위해 발간합니다”로 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웹진’ <지식의 지평>은 ‘한국학술협의회’와 대우재단이 함께 발행하는 게 아니라, 한국학술협의회 없이 대우재단 홀로 발행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학술협의회’는 어디로 간 것일까. 웹진 어디에도 한국학술협의회의 흔적, 혹은 추억이 남아 있지 않다. 물론 편집인, 편집위원, 편집주간은 한국학술협의회의 추억이자 흔적일 수 있지만, 단체로서의 ‘한국학술협의회’는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없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건이다. 2006년부터 2015년 상반기까지 존속한 종이책 <지식의 지평>이 웹진으로 발행되든, 종이책 체제를 유지하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이 잡지의 구심점이던 ‘한국학술협의회’가 조용히,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986년 12월, 민법 제32조, 공익법인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를 근거로 ‘기초학문 영역의 개발과 진흥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이래 한국 학문 생태계에 크게 기여했던 한국학술협의회는 올초 법인 해체를 결정하고 신고를 마쳤다.
그간 한국학술협의회는 음으로 양으로 참 많은 학문적 기여를 해왔다. 이들의 활동은 △인문·사회·자연과학의 기초분야에 대한 조사와 연구 △기초학문분야의 조사, 연구의 위탁 및 수탁 △연구결과의 발표회 및 기타 학술 관련 회합 개최 △대우재단의 학술지원 연구비의 기획·집행 △학술연구모임 지원 △학술활동을 위한 시설제공 등에 걸쳐 있었다. 석학강좌를 개최하고, <지식의 지평>을 간행한 것도 이들의 학문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한국학술협의회 재정지원을 떠맡았던 대우재단의 살림살이가 예상보다 더 쪼들렸을 수도 있다. 구조조정의 격랑이 대학과 기업을 강타하고 있는 현실이다보니 대우재단 기금 이자로 한국학술협의회 사업을 지원하는 게 한계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해체 직전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이었던 이태수 원장은 “한국학술협의회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아쉬움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학술협의회의 연구지원 규모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연구재단과 같은 국가연구사업의 빈틈을 민간학술재단에서 메워줬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국가가 주도해서 연구지원사업을 확대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욕심을 좀 더 낸다면, 성격이 다양한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채널도 갖춰야 한다고 본다. 대우재단은 분명, 한국의 고급 학술문화를 지원하는 좋은 전례를 남겼다. 한 가지 기준에 의해 학자들의 연구 업적을 평가하는 지금과 같은 국가주도 방식은 장기적으로 창의적인 성과를 가져오기 어려울 것이다.”

<지식의 지평> 웹진 방향 전환에는 이렇듯 한국 학문 생태계의 어떤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좁게는 발행 주체였던 한국학술협의회의 해체라는 안타까운 사실이, 더 넓게는 다양한 성격의 연구 지원을 북돋던 지적 풍토의 상실이라는 ‘知的 지평’의 부재가 겹쳐 있다.
한국학술협의회는 해체되고 사라졌지만, 관계를 맺고 활동했던, 이들의 지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연구자들의 추억과 향수, 기억이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어쩌면 제2의 한국학술협의회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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