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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왕실 주문으로 제작 … 실제 사용한 흔적 있어
조선초기 왕실 주문으로 제작 … 실제 사용한 흔적 있어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05.10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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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29 백자 앵무새 모양 연적(白磁鸚鵡硯滴)
▲ 사진⑦ 앵무새연적의 측면

앵무새 모양 硯滴은 중국 明나라에서도 도자기나 玉器로 제작돼 귀족층에 보급됐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사례를 찾을 수 없었고 다만 조선 후기에 일명 ‘따오기연적’으로 비슷한 형태로 제작된 사례만 간혹 볼 수 있었다.

조선초기에 왕실관요에서 만들어진 매우 귀한 앵무새 모양의 白磁硯滴이다(사진①). 앵무새는 열대지방이나 태평양연안에 서식하는 조류로 우리나라 자연에서는 서식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왕실이나 귀족계층에서 애완용 조류로 사육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신하가 앵무새 한 쌍을 가져와 신라 興德王에게 바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놈이 죽고 수놈이 슬피 우는지라 왕은 거울을 내어 걸어주어 외로움을 달래주려 했고 수놈은 거울에 비친 앵무새가 자신의 짝으로 알고 거울을 쪼았으나 이내 자신의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미 신라시대에 애완용 조류로 당나라에서 들여와서 왕실에서 사육한 것을 뒷받침해주는 문헌기록이다. 비록 앵무새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새는 아니지만 기와의 암막새, 금속유물의 문양, 청동거울의 문양, 바둑알의 문양 등 신라시대의 유물에서도 앵무새문양을 찾을 수 있다.

▲ 사진① 백자앵무새 모양 연적

고려시대에는 宋나라 상인들이 고려왕실에 바친 품목으로 앵무새가 포함돼 있으며 고려시대 상류층 역시 앵무새를 애완용으로 진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생활용품에도 앵무새문양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靑磁, 銅鏡, 金銀器 등에 다채롭게 표현돼 있으며 항상 한쌍으로 나타난다(사진②).

이러한 앵무새문양은 좋은 부부의 금슬로 인한 화목한 가정과 신분 상승, 편안한 노후와 불노장생의 현실적인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진①)의 백자 앵무새 모양 연적은 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앵무새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는 유물이다. 조선초기에는 상류층이 사용하는 白磁硯滴이 많이 생산됐으나 거의 대부분이 (사진③)의 寶珠形硯滴들이다.
왕조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고려시대 청자로 만들어졌던 다양한 종류의 像形硯滴(사진④)들이 사라지고 거의 한 종류의 연적만 생산했다. 새로운 朝鮮白磁의 등장으로 도자기 제작기술과 선호하는 器形이 바뀌고 도자기의 선호도가 변모하면서 유교관에 입각한 사회상에 맞게 담백하고 간결한 문방용품을 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초기 백자의 像形硯滴은 매우 희귀한 사례인데 바로 이 앵무새 모양 연적이 그렇다. 이러한 앵무새 모양 硯滴은 중국 明나라에서도 도자기나 玉器로 제작돼 귀족층에 보급됐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사례를 찾을 수 없었고 다만 조선 후기에 일명 ‘따오기연적’(사진⑤)으로 비슷한 형태로 제작된 사례만 간혹 볼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앵무새 모양 연적과 조선 후기에 제작된 따오기연적이 연결고리가 형성 될 수도 있지만 약 400년의 공백이 너무 커서 연관성을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앵무새 모양 연적은 길이가 20cm, 폭 10cm로 크기도 제법 큰 편으로 왕실이나 상류층의 實用器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가 잎줄기를 입에 물고 뒤를 돌아보고 있는 형상으로 고려시대 청자오리연적에서도 느껴지는 아름다운 자태다(사진⑥). 조선 초기에 유행하던 꽃잔(花形盞)을 몸에 끼고 등 아래쪽과 잔의 상단부에 入水口와 出水口가 뚫려있다(사진⑦, ⑧). 약간 반전된 꼬리 부분을 손으로 잡고 안쪽으로 기울이면 연적속의 물이 밖으로 나와서 잔에 고여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연적 각 부분의 조각에 흐트러짐이 없고 단아하며 날개와 꽉 다문 입 등 조각의 기품이 대단하다. 맑고 투명한 백자유약을 얇게 시유했으며 철분을 제거한 白磁土로 성형해 고운 모래받침을 깔고 번조했다(사진⑨).

▲ 사진⑧ 앵무새연적의 후면

조선 초기 경기도 일대의 왕실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발견된 조선 초기의 관요에서 제작된 像形白磁硯滴으로는 유일하다. 당시에 왕실에서 특별히 주문해 제작된 것으로 실제 사용한 흔적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앵무새 모양 백자연적이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준 높은 예술성과 보배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 사진⑨ 앵무새연적의 바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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