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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축장으로 전락한 조선반도 … 그들의 연구에 ‘조선’은 없었다
각축장으로 전락한 조선반도 … 그들의 연구에 ‘조선’은 없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4.12 1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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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역사학자를 통해 본 식민주의 역사학-식민주의 역사학과 제국Ⅲ’

미우라는 조선사를 독자적인 발전의 역사로 바라보지 않았다.
조선사는 철저히 사대와 예속의 역사였다. 그러기에 ‘通史’로서 『조선반도사』를
서술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조선사는 중국 또는 일본과 관계 속에서 서술 가능했다.

 

지난달 25일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403호에서 진행된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학술회의 주제는 ‘역사학자를 통해 본 식민주의 역사학’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식민주의 역사학과 제국 Ⅲ’이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식민주의 역사학’ 연구팀에서는 2013년~2014년 2년 동안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2013년에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그 성립의 기원으로 소급해 폭넓게 재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역사학’이 ‘근대제국’과 맺는 내밀한 관련을 검토했다. 기존의 ‘식민사학’이라는 개념 대신에 ‘식민주의 역사학’을 분석개념으로 사용했고, 연구대상으로 한국사만이 아니라 일본사와 동양사까지 포괄해 상호관련 아래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이어진 2014년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을 받아 ‘滿鮮사관’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일본에서 근대역사학이 태동한 이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일본 육군 참모본부와 만철 만선역사지리조사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 등의 기관에서 진행된 만선사관을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한 것이다.
세 번째 단계인 올해, 연구팀은 주요 식민주의 역사학 연구자를 대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의 특정 국면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2016년의 공동 연구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성격을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 입각해 동아시아 차원에서 새로이 규정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모두 5명의 식민주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교토제국대): 일본사 전공(조선사 연구)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도쿄제국대): ‘동양사’ 전공(조선사 연구)
△이마니시 류(今西龍, 교토제국대/경성제국대): ‘동양사’ 전공(조선사 연구)
△도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 경성제국대): ‘동양사’ 전공(발해사 연구)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 해군학교): 일본사 전공(조선사 연구)
이들은 모두 제국대학 혹은 해군학교 등에서 근무했으며, 제도화된 ‘식민주의 역사학’ 연구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던 연구자들이다. 연구팀은 이들의 역사학 연구가 한국 근대역사학 형성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추적했다. 이날 발표문을 요약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미우라 히로유키의 조선사 인식과 『조선반도사』」:장신(역사문제연구소)
1916년에 시작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난 채 조선사편수회에 그 소임을 넘겼다. 이 사업의 실패 이유로서 총독부는 예상외로 길어진 사료수집을 들었다. 선행 연구는 편찬 주체인 편집주임들의 상이한 조선사 인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드러난 것일 뿐 사업 자체가 가진 본질적 요소는 아니었다. 『조선반도사』 편집주임의 한 사람이었던 미우라 히로유키는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사료편찬소에 근무하다가 교토제대 사학과의 기틀을 만든 학자였다. 그는 사료수집과 편찬의 전문가로서 교토제대 사학과 수업에서 중세 사료 원본으로 고문서 강독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을 3년 안에 종료하려 했다. 이후 사업기간이 연장되고 결국 사료집 성격의 『조선사』로 귀결됐는데, 미우라의 사료수집과 역사 서술에 관한 태도에서 이미 사업의 지연은 예측할 수 있었다.
또 미우라는 조선사를 독자적인 발전의 역사로 바라보지 않았다. 조선사는 철저히 사대와 예속의 역사였다. 그러기에 ‘通史’로서 『조선반도사』를 서술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조선사는 중국 또는 일본과 관계 속에서 서술 가능했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한사군과 고구려 역사 연구」:박찬흥(국회도서관)
이케우치 히로시는 20세기 전반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사학자로서, 엄격한 실증주의와 사료비판을 추구했다. ‘식민사학’의 일종으로서 지리 중심의 타율적인 시각으로 한국사를 인식하는 ‘만선사’ 연구를 구축했다. 한사군과 고구려 역사 연구에서도 이러한 시각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그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과 대방군을 해동의 ‘小支那’였다고 인식했고, 고구려는 만주민족의 하나인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봤다. 고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역사를 연구할 때, 한사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세력의 직접지배와 이에 대한 고구려의 항쟁 및 한사군의 변천·소멸, 낙랑군·대방군 멸망 이후에는 요동을 둘러싼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중심 주제로 고찰했다.
 이 지역에서 두 세력의 대립은 ‘支那’와 만주민족의 대립과 갈등이었고, 고구려의 확대·발전과 한사군의 변천·소멸은 결국 만주민족이 ‘지나’ 세력을 축출한 것이었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고구려 벽화 등을 근거로 고구려의 문화가 한사군 이래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봤다.
‘조선반도’의 북부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역사는 ‘조선반도’의 역사 즉 ‘조선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반도’에서의 고구려 역사 연구에서도 신라와의 국경선, 당나라와의 전쟁과 부흥운동을 중심 주제로 다뤘다. 이러한 연구에서 ‘조선반도’는 ‘지나’(당)와 만주민족(고구려)이라는 강력한 두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나아가 한반도 남부에 가야=임나라는 직할령을 갖고 있던 일본이 백제를 후원하면서 고구려 또는 당나라에 대항했다는 이해와 합쳐져서, 고대 ‘조선반도’는 ‘지나’, 만주, 일본 세 강대국의 대립·항쟁의 공간이었고 고대의 ‘조선사’는 타율적 역사라는 인식으로 귀결됐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한사군과 고구려 역사 연구에서 추구한 연구 방법은 엄격한 사료비판과 실증주의였지만, 지리 고증을 위주로 한 전쟁사를 연구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까닭에 내부구조와 체제, 인간상에 대한 관심이 결여돼 있고 ‘강대국 지나 및 일본’과의 대립·전쟁만이 부각됐을 뿐이었다.

 

「한반도 속의 ‘중국’, 식민지역사에서 종속성 발견하기―이마니시 류의 낙랑군 연구를 중심으로」: 정준영(서울대)
식민지의 관학아카데미즘이 주도했던 실증사학은 엄밀한 방법에 입각한 객관적 고증을 표방하면서 민족사학의 ‘비과학성’을 비판했지만, 이것은 일본 자국사를 국민 국가적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주변의 역사, 한반도의 역사적 과정을 대상화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딜레마로 부상하게 되는 문제 중 하나가 일본이 발달된 문화를 수용해서 주체적인 발전을 해나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조선민족의 역할을 어떻게 위치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문화전파의 역할을 조선민족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곧 그 선진적 측면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며, 유사 이래 조선민족의 종속성과 정체성을 규명해, 병합에 이르는 필연을 객관적으로 규명한다는 국민국가로서 일본 자국사 구축 프로젝트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사군의 존재, 낙랑군의 문제는 한반도 내부에 ‘중국’이라는 문명을 설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선진문물의 전달이라는 문제를 조선민족이 아닌 한반도라는 지역의 문제, 즉 지정학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민족·종족의 관점에서는 조선민족(즉 韓族)에 대한 일본민족의 ‘주체적’ 역할을 주장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될 수 있기에 일종의 돌파구로 부상하게 된다.

 

「20세기 전반 ‘북방사’ 연구의 모습 - 도리야마 키이치의 연구 궤적」:정상우(한림대)
식민지기 경성제대 교수였던 도리야마 키이치는 근대 이후 발해사 연구의 선도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발해사 이외에도 金으로 대변되는 북방 민족에 대한 연구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북방민족에 대한 연구는 주로 그들이 고유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문화적으로 漢民族과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로 그는 많은 강연문들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그의 연구대상인 발해, 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아시아의 역사를 개관, 전망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즉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도리야마 키이치는 북방민족의 문화적 고유성을 찾아내는 한편 시야를 근현대로 확장하며 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일본의 부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시나 쇼에이의 신화 연구와 파시즘―‘식민주의 역사학’의 구조와 그 임계」: 심희찬(리쓰메이칸대)
미시나는 신화사, 고대사연구, 문화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남겼으며, 특히 한국과 일본의 비교신화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탁월한 업적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미시나는 한편으로 ‘식민사학’을 집대성한 『조선사개설』을 비롯해, 한국역사의 정체성과 사대적인 성격을 평생에 걸쳐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다. 미시나의 작업에서 초창기의 비교신화학 연구를 이끌면서도 식민주의적 관점을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해 ‘근대 역사학’의 어두운 그림자인 ‘식민주의 역사학’의 구조를 분석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아직 한일 양국에서 미시나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적은 편이다. 미시나의 신화연구는 당대 일본 및 서구의 지식을 포괄하는 방대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전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시나의 작업에 제국일본의 여러 학지가 새겨져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식민주의 역사학이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근대성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시나의 신화연구는 실증주의에서 출발해 문화의 강조와 파시즘을 거쳐, 국민국가의 신화학에 이르는 길을 걷게 되는데, 이야말로 근대 역사학의 운명을 상징하는 어떤 알레고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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