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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근대화를 벗어던질 열쇠, ‘자기관계’에 있다
가짜 근대화를 벗어던질 열쇠, ‘자기관계’에 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4.0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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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철학은 뿔이다』 전대호 지음|북인더갭|340쪽|15,500원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세계를 마주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식민지시대와 개발독재시대의 지도자들은 다급한 민족개조와 조국 근대화 따위를 그 이유로 들었지만, 그들이 우리의 기억에 심어놓은 근대화는 가짜다.

 

지금 이 땅에서 철학은 과연 자생하고 있을까. 『철학은 뿔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질문에 확실한 긍정으로 대답하려는 마음의 표현이다. 100여 년 전에 일본제국을 경유해 이식된 서양철학이 이 땅에 적응해 고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내놓고 싶었다. 이 책이 그런 증거의 구실을 할 수 있다면, 저자인 필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전면에 내세운 것은 신랄한 비판이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격려와 신뢰가 있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비판의 참된 구조일 테다.
자생이란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삶, 자기 터전에 뿌리 내린 삶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서울광장에 깔리는 잔디는 자생력이 없다. 겨우내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는 그 광장은 이듬해 봄에 다시 새 잔디 옷을 입어야 한다. 혹시 한국 지식계의 많은 담론은 그 잔디와 유사하지 않을까. 외부에서 성장한 이론이 한국에 들어와 한철을 풍미하다가 시들어버리고, 다시 최신 외래 이론이 들어와 한동안 번성하는 일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표면은 푸르지만, 한 뼘만 파면 척박한 바닥이 몰골로 드러나는 서울광장은 한국 지식계와 닮은꼴일지도 모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자생의 필수조건이다. 자생하려면, 환경과 얽혀 한 덩어리를 이뤄야 한다. 철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생하려면 우리의 언어 환경, 지식 환경, 정치 환경과 맞물려 상호작용해야한다. 나는 이 상호작용의 전형이 우리 내부의 대화 또는 논쟁이라는 믿음을 품고 이 책을 썼다. 이 땅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내부 논쟁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바라는 자생적 학문을 일구는 길이라는 믿음이 나를 제법 사나운 싸움꾼으로 만들었다.
상당히 우발적으로 네 분의 선학(김상봉, 이진경, 김상환, 이어령)을 비판 대상으로 선택했는데, 원고가 완성돼갈수록 전체에 일관된 메시지가 차츰 뚜렷해지는 것에 나 자신도 적잖이 놀랐다. 책의 5장에서 밝혔듯이, 열쇳말들은 대화, 근대성, 헤겔이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지난 100여 년의 한국 역사를 물들인 ‘가짜 근대화’가 있다. 가짜 근대화란 한마디로 변신을 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외부 의존적 변신이다. 이런 변신을 촉구하는 대표적인 구호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외친 ‘脫亞入歐’를 꼽을 만하다.
대체 왜 우리 자신을 내던지고 유럽인의 반열에 진입해야 하는가.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세계를 마주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식민지시대와 개발독재시대의 지도자들은 다급한 민족개조와 조국 근대화 따위를 그 이유로 들었지만, 단언하건대 그들이 우리의 기억에 심어놓은 근대화는 가짜다. 다들 알다시피 근대성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존중, 나아가 자신과 항상 이미 동등한 타인들 각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아닌가. 온갖 구호로 우리를 다그쳐 외부를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근대화,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강권하는 근대화는 가짜다. 오히려 ‘너는 이미 훌륭해. 너답게 살아.’라는 격려, ‘당신은 이미 진리 안에 있습니다.’라는 기쁜 소식이 진짜 근대화의 메시지다.

칸트와 헤겔이 대표하는 독일고전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끊임없이 들어온 것은 진짜 근대화의 복음이다. 그 복음의 논리적 고갱이는 ‘자기관계’다. 내가 운명적으로 나의 세계를 마주하고 사는 것은 ‘자기관계’의 한 방식으로서 이미 그 자체로 진리의 나타남이다. 내가 나의 행동을 거두는(책임지는) 것, 내가 스스로 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자율)도 마찬가지다. 어떤 고귀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의 세계와 행동과 규칙을 떨쳐낼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런 떨쳐냄은 애당초 실현불가능하다. 자기관계의 바깥에는 어떤 고귀한 진리도 없다. 더 엄밀히 말하면, 그런 바깥이 아예 없다. 나는 나로서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진리란 다름 아니라 나의 자기표현이요, 나의 삶이다! 『철학은 뿔이다』는 서양근대철학, 특히 헤겔철학을 이런 자기관계의 철학으로 보면서 쓴 책이다.
참 이상하게도 이 땅의 철학자들은 헤겔철학을 개인을 낮추고 집단을 높이는 反개인주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책의 3장에서 지적했듯이 김상환의 헤겔 해석에서 두드러지는 그 경향은 김상봉의 해석에서도 눈에 띈다. 헤겔에게 몹시 적대적인 이진경도 반개인주의적 해석을 공유한다.

나는 통념으로 자리 잡은 이 해석이 일본제국의 엘리트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헤겔은 집단을 드높이기 위해 개인을 짓누르기는커녕, 개인들이 저마다 그 자체로 모든 집단적 가치의 원천이라고 단언한다. 공적인 권위의 유일한 출처는 개인들이다. 헤겔은 집단주의자나 국가주의자가 아니라 ‘모든 권리는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우리 헌법의 조문에 충실한 민주주의자다.
나는 헤겔철학이 가짜 근대화의 마법을 푸는 해독제로 유효하다고 본다. 책의 4장에서 한국인론의 저자들을 다룬 것은 그들이 그 마법을 퍼뜨린 대표적인 마법사들이기 때문이다. 조선 미술에 밴 슬픔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야나기 무네요시부터 민족의 근본적 개조를 촉구한 이광수, 개발독재시대의 지도자 박정희를 거쳐 이어령의 한국인론으로 이어진 그 유서 깊은 서사는 ‘한풀이 역전극’으로 요약된다. 쉽게 말해서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한국인론의 뼈대요 결론이다.
5장에 등장하는 인어공주는 이런 가짜 근대화의 마법에 걸려 파멸하는 희생자들을 대표한다. 인어공주는 외부(육지)로 나가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버렸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자기표현 따위는 얼마든지 내팽개치는 출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들에게 헤겔이 들려주는 조언의 핵심은 운명적인 자기관계다. 어디로 이주하고 어떤 직함을 달든지 우리는 늘 우리 자신으로서 우리의 세계를 마주하고 우리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기 마련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자기관계를 우리의 운명이자 본질로 끌어안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기만적 변신을 강권하는 가짜 근대화의 마법에서 풀려나 당당한 근대인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길이다.

근대성과 헤겔철학의 공통 귀착점은 ‘대화’다. 개인이 이미 어떤 부족함도 없는 주체라는 근대정신의 기본 명제는 개인의 안팎에서 진행되는 대화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 대화야말로 헤겔철학에서 말하는 ‘변증법’의 진면목이다. 이 책 제2장의 제목은 ‘근대적 주체는 대화한다’, 3장의 제목은 ‘무릇 하나임은 맞선 둘의 얽힘이다.’로 붙였다. 나는 이 두 문장이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1장의 제목으로 선택한 ‘항상 이미 서로이며 홀로인’이라는 술어도 근대인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가리킨다. 4장에서 다룬 ‘아주 오래된 외부인 놀이’를 극복하는 길과 극복을 통해 도달할 목적지 역시 ‘대화’다. 그리하여 대화는 책 전체의 귀착점이다.
이 땅에서 학문이 자생하고 있다면 당연히 활발한 내부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학자는 드물 것이다. 『철학은 뿔이다』는 철학의 자생 증거로 채택되기를 바라며 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귀착점이 대화인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사실은 귀착점뿐이 아니다. 책의 메시지, 형식, 내용까지, 한마디로 책 전체가 온통 대화다. 이른바 변증법이 헤겔철학의 형식이요 내용이요 전부인 것과 유사하다고 평가해주는 독자들이 있다면, 저자로서 기쁘고 고마워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전대호 과학·철학 전문번역가
필자는 DAAD장학생으로 독일 쾰른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됐다.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를 비롯해 『초월적 관념론 체계』, 『푸엥카레의 추측』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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