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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인문학 위기론을 성찰하다 - 객관성에 가려진 실천적·정치적 요인들
기획연재 : 인문학 위기론을 성찰하다 - 객관성에 가려진 실천적·정치적 요인들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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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0:20:27
김진석 인하대 철학

‘인문학 위기론’이 횡행하면서 인문학이 살아야 나라(혹은 학문)가 산다는 주장이 주조를 이루던 몇 년 전에도, 나는 그 담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곤 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나의 전공인 철학이 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나 지금이나 철학은 인문학 중에서 가장 먼저 희생양이 돼 버릴 운명이다. 아마도 다른 인접 인문학조차 가장 약한 고리인 철학을 제물로 삼을 테지만, 그 경우 위기는 사라지기는커녕 심화될 것이다. 그런데도 위기론이 잦아든 이유는?
최근에 인문학 후속 세대에게 정부가 베푼 1천억 규모의 지원은, 당장은 없는 것보다 낫게 보이지만, 대학에 자리를 못 잡은 연구자들에게 한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껏해야 임시변통이다. 오히려 위기가 심화된 것이, 그래서 인문학 내부에 균열이 커진 것이, 더 이상 인문학의 위기가 진지하게 생각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곧 인문학 지붕 아래 있는 개별 영역들은 각기 이해관계에 따라 각개약진을 시작했고, 따라서 과거처럼 동질적인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필요조차 더 이상 없는지 모른다.
인문학 위기 담론 한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촉구한 반성과 성찰이 대부분 공허한 수사로 끝난 판에, ‘객관적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필요한 일일 듯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 원인을 추구하는 일 자체가 다시 공허한 수사로 끝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겉으로는 객관적인 관찰을 가장해서 위기를 언급하기 때문에 정작 그것의 ‘지식 정치적’ 요인들이 은폐되곤 하기 때문이다. 또 객관적인 설명이나 분석은 드물지 않았다. 때로는 기초학문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모든 학문에 공통되는 교양의 이름으로, 때로는 전문화의 짧음을 보완해줄 일반적 지식의 이름으로, 혹은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학문으로. 그런 객관적인 설명 혹은 명분은 꽤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보편성에 호소하다 보니, 실제로 한국 지식 사회에서 작용하는 주관적이고 실천적이며 정치적인 요인들이 생략되곤 한다.
과거에 인문학은 대학에 들어온 제한된 사람들의 계급적 교양을 충족시켜주는 상징적 성격이 강했다. 인문학적 교양은 직접적으로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됐고 때로는 오히려 필수적이지 않기에, 상징적 교양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이런 역할은 급속히 쇠퇴했다. 대학생 숫자가 몇 배 늘었을 뿐 아니라 과거처럼 고전의 해독과 적용에 치우친 인문 지식으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복잡한 실천 지식을 충족시키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교양’은 종래의 인문학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자연과학의 성과와 통합돼야 할 때다. 따라서 전통적 교양에 집착하는 한, 인문학처럼 정체성이 불분명한 지식분야도 사실 없을 것이다. 흔히 기초과학이나 교양이라고 하지만, 이런 지칭조차 기만이기 쉽다. 영역마다 실천적 혹은 정치적 효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영문학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 그 인기는 해방 후 친미 근대화 지식 계급의 형성과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인기의 큰 몫을 언제부터 급속히 중국학이 대체하고 있다면, 이 인기는 과거의 문학 중심의 인문학 덕택이 아니라 지역적 특수 덕택일 것이다.
다소 호들갑스레 대학원의 위기라고 불리는 문제도, 인문학이 이제까지 은연중에 생산한 지식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인문학은 전통적 교양 아니면 대학원 과정으로 나뉘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대학원이 연구자를 과잉공급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중요한 점은, 문과대학이 암묵적으로 줄곧 교수의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예로 훌륭한 중고등학교 교사를 육성하는 과제는 사범대학에 떠넘긴 채, 폐쇄적인 지적 우월성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교수 충원조차 막히고 전문직 취업이 인기를 얻는 오늘, 이제까지 인문학이 ‘교양적 인문성’ 뒤에 숨겨온 지적 우월주의의 모습이란 비루할 뿐이다.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교직 이수자도 아닌 졸업생들을 모든 대학들이 무책임하게 양산해온 관행이 계속되긴 힘들 것이지만, 사범대학을 따로 운영한 관행도 정부 차원에서 개혁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인문대 체제를 모든 종합 대학이 모방해온 관행도 바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대가 먼저 자신의 특권에 걸맞은 개혁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인문대학들이 각자 제 구실을 찾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구조의 핵심인 서울대를 바꾸지 않고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힘든 것도 현실이다. 물론 서울대와 다른 대학이 느끼는 인문학 위기의 성격도 다르다. 전자는 학과 중심으로 운영하려 하지만, 후자들은 약한 학과들의 입학점수를 높이고 정원을 유지시키려는 욕심으로 학부제를 고집한다. 정작 학생들은 학과체제를 선호하는데도!
또 고전의 해독과 습득에서 생기는 지식 기득권을 단순히 인문학으로 치부할 수 없는데도, 이제까지 인문학자들이 그 둘을 꽤 혼동하고 있었고 많은 경우 둘 다 누리려고 했다. 이 문제는 현재 학술진흥재단이 학술지 정책을 통해 지식 시장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증폭된다. 왜냐하면 등재지 게재 논문 숫자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지식육성책과 통제책에 동조함으로써 연구자들은 지적 기득권을 제도적으로 획득할 수는 있지만,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하기 힘들다. 그는 논문 생산자와 지식인 중에서 택일을 해야 할 지경에 있고, 전자를 통해 사회적 안전을 도모할수록 통제된 지식노동자로 전락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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