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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굽과 안정적 몸체가 조화로운 조선시대 畵金白磁를 만나다
넓은 굽과 안정적 몸체가 조화로운 조선시대 畵金白磁를 만나다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02.1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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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24 백자금채 매죽무늬 병(白磁金彩梅竹文小甁)
▲ 사진3 백자금채매죽문소병(매화)

1990년대 필자는 국내 최초로 전남 강진군 계율리의 논둑에서 畵金靑磁破片(靑磁編壺의 어깨부분)을 地表 수습해 부안청자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까지 畵金靑磁破片이 陶窯址에서 발견된 것은 한 번도 없었고 최초의 사례였다(사진①). 이 畵金靑磁破片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歡喜와 感動은 지금도 생생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 현재까지도 畵金靑磁가 高麗靑磁窯址에서 발견된 사례는 없다(畵金靑磁, 완성된 靑磁에 水金을 칠하고 한번 더 저화도로 燒成하여 청자의 표면에 화려한 金色무늬를 입힌 靑磁로 金彩靑磁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畵金靑磁는 국내에 4점, 북한에 1점, 일본에 3점이 전해지고 있으나 金箔이 거의 떨어져서 金彩의 흔적은 미미하게 확인될 정도인데 다만 일본이 한 個人이 所藏하고 있는 靑磁金彩梅花文鉢은 金彩의 문양이 잘 남아있다(사진②). 도자기에 金彩를 한 사례는 고려시대 청자에 金彩를 한 畵金靑磁가 시초이며, 완성된 도자기의 문양에 홈을 내어 파진 홈 속에 金彩를 하는 문양의 보조적인 수단인 從屬文樣으로 사용되는 방법과 도자기의 표면에 문양을 직접 그려 主文樣으로 사용되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그 제작방법은 전해지지 않으며 『高麗圖經』의 기록과 남겨진 몇몇 유물로써 확인만 될 뿐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중국에는 宋代의 定窯磁器에서 처음 金彩白磁를 제작했으며, 周密의 저서인 『癸辛雜識』에서 “金彩裝飾 定窯碗은 마늘 즙에 金粉을 개어 도자기표면에 그림을 그린 후 가마에 넣어 번조해 완성했다”고 한다. 그 후 元代에는 帝王만이 이 金彩磁器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명나라 후기부터 청나라에 걸쳐서 五彩磁器로 활성화돼 많은 양이 제작 됐다. 지금도 중국의 景德鎭窯 에서는 금채도자기 제작에 定窯磁器의 金彩方法을 사용하기도 한다.

▲ 사진4 백자금채매죽문소병(대나무)

이처럼 꾸준히 이어온 중국 도자기의 金彩技法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후에는 金彩磁器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후 金彩磁器가 소멸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여 년 전 畵金靑磁破片을 전남 강진 청자 도요지에서 최초로 발견한 필자는 당시의 감동보다 더 큰 감동을 일본에서 경험하게 됐다. 조선초기에 제작된 畵金白磁(金彩白磁)를 최초로 實見한 것이다. 이 畵金白磁(사진③ ④)는 조선초 15세기에 경기도 광주 일대의 왕실관요에서 제작된 최상품의 甲燔磁器로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마친 백자에 金彩로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대칭으로 그린 후에 한 번 더 저화도로 燔造했다. 입지름 4cm, 굽지름 5.5cm, 높이 14cm로 작고 아담한 白磁小甁으로 고려시대의 畵金靑磁처럼 조선시대의 畵金白磁인 것이다. 이 畵金白磁는 약간 낮고 넓은 굽과 안정적인 몸체의 볼륨에 알맞은 목선이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王室官窯 白磁甁이다. 도자기 표면의 金彩는 상태가 양호해 보이지만 현미경사진을 통해보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金彩의 긁히고 떨어져나간 부분과 오랜 기간 매장되어 침윤된 흙. 사진⑤~⑧). 몸체에는 雪白色의 백자유약이 골고루 잘 施釉돼 있으며 굽바닥에는 가느다란 모래받침을 사용해 번조한 후 깎아낸 흔적이 있다(사진⑨). 몸체의 양면에는 대칭으로 꽃이 滿開한 매화나무와 바람을 맞는 대나무(風竹)를 당시에 유행하던 화법인 몰골법의 능숙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 백자에 金彩를 한 유물이나 백자파편은 발표된 사례가 없었으며 따라서 조선시대의 畵金白磁는 생산하지 않은 것이 정설처럼 간주됐다.
조선시대의 金彩磁器 생산에 관한 문헌 또한 아직까지 밝혀진 사례가 없으며 근대에 들어와서 대한제국 王室用器의 李花文章에 金彩가 사용됐을 뿐이었다.
우리나라 金彩磁器의 생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현재까지 남겨진 문헌이나 유물로 알 수는 없지만, 도자기를 생산하기 천 년 전부터 제작된 유리구슬에 金箔을 입힌 기술력이(나주 복암리 돌방6호무덤, 천안 청당동고분, 백제 무녕왕릉) 우리나라 金彩磁器 生産에 일조 했을 가능성도 있다(사진⑩).    
하얀 설백색의 몸체가 눈 위에 피어난 매화와 대나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 한겨울속의 곧은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조선 초기에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능숙한 金彩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高手의 陶工과 어느 文人畵家의 간절한 바람이 한 점의 예술품으로 결실을 이뤄 후손들에게 안기었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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