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두 시인의 서로 다른 시적 모험 … 그들은 어떻게 城寨가 됐을까?
동갑내기 두 시인의 서로 다른 시적 모험 … 그들은 어떻게 城寨가 됐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2.16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 50.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김소월 『진달래꽃』·정지용 『정지용 시 전집』’

오늘날 정지용 시는 상당히 평범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그것은 그의 시어조직이
많은 추종자를 통해 일반화되고 관례화돼 범상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대한
영향력이 도리어 당사자의 시를 범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2015년 3월부터 1년 여간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 강연이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13일(토) 진행된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김소월 『진달래꽃』·정지용 『정지용 시 전집』’을 끝으로 ‘고전읽기’는 종료되고, 오는 3월 첫째 주부터 새로운 ‘문화의 안과 밖’ 시즌3이 시작된다.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의 종착점은 동갑내기 시인인 김소월과 정지용의 시편들이었다. 두 시인 모두 한국 근대 문학 지평의 다른 방향성을 제시한 북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가히 ‘국민시인’으로 불려도 손색없는 시인들이었으며, 이들의 작품은 ‘노래’로도 불러져 그 생명력을 강인하게 이어왔다. 일찍이 『시란 무엇인가』(1995년)로 집요한 시적 이해를 시도했던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과연 이 두 근대 시인의 시세계를 어떻게 파고들었을까.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왼쪽이 김소월. 오른쪽이 정지용 시인이다. 김소월 시인의 모습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과 남한으로 내려온 그의 셋째아들 김정호씨의 진술, 손자 김영돈씨의 사진을 참고로 해 만들든 진영, 즉 그림이다. 왼쪽 아래시집들은 소월과 지용의 대표 시집들이다.

동갑내기 시인
두 시인의 연보를 따르면 김소월과 정지용은 1902년 생으로 동갑이다. 그러나 시를 통해서 알게 되는 김소월과 정지용은 동년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세대차를 보여준다. 과장을 마다않는 사람이라면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소월 생전의 유일시집 『진달래꽃』이 간행된 것은 스물네 살 되던 1925년의 일이다. 127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고 백순재·하동호가 엮은 『결정판 소월 전집: 못 잊을 그 사람』에는 시집 미수록 시편과 시집 상자 이후 발표한 작품 74편이 추가돼 도합 201편이 올라 있다. 정지용의 첫 시집 『정지용시집』이 간행된 것은 서른네 살 되던 1935년의 일이다. 89편이 수록돼 있고 태반이 1920년대에 발표된 것이다. 제2시집 『백록담』은 1941년에 간행됐고 시 25편과 산문 8편을 수록했다.


동갑내기 시인의 작품이 세대차를 느끼게 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소월은 서울에서 중학을 다닌 후 서북의 변방에 살면서 민요조의 작품을 많이 썼다. 지용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서울에 살면서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공인된 세평을 얻었다. 두 시인의 동요나 동시 흐름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 차이는 단박에 드러난다. 김소월 소품(「엄마야 누나야」)이 옛 가락에 의탁해서 동심을 드러내는데 반해 정지용 소품(「말」)은 자연스럽게 인지의 충격을 안겨준다. 모든 것이 개성적이고 독자적이고 그런 맥락에서 새로운 발상이다. 이러한 차이가 두 시인 사이에서 세대차를 느끼게 하고 그것은 많은 작품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김소월: 청각적 상상력
동서고금의 서정시는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의 기본적이고 본원적인 정감이나 내면 경험을 소재로 한다. 서정시가 즐겨 다루는 이러한 기본적 소재의 음률적인 처리로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 소월 시의 특징이다. 소월 시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말은 임과 집과 길이다. 임은 대체로 사별이던 생이별이던 헤어진 임, 잃어버린 임, 없음으로써 부재 저편에 간절히 드러나는데 이 임 없음과 함께 되풀이 되는 모티브는 집 없음과 길 없음이다. 이 점에서 집 떠나는 사람의 회포를 노래한 「가는 길」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산」, 「무심」, 「집생각」, 「제비」, 「우리 집」,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등이 모두 직간접으로 집 없음과 길 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집 없음과 길 없음의 모티브가 가장 조화롭게 구현된 것이 대표작의 하나인 「朔州龜城」이다.


임 없음과 집 없음과 길 없음을 주로 노래했다고 해서 그가 사사로운 사랑만을 노래한 시인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시집으로 읽지 않고 사화집을 통해 「산유화」, 「진달래꽃」, 「접동새」, 「금잔디」, 「산」, 「왕십리」 등의 유명 시편만을 접한 독자들은 그에게 가령 「옷과 밥과 자유」란 시편이 있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소월의 가리어진 국면을 얘기하는 것은 그를 무리하게 저항 시인으로 추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인의 겨레에 대한 기여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또 시인인 한에 있어서 그의 기여는 필경 말의 조직과 표상의 선택을 통해서 이뤄지게 마련이다. 3·1운동 실패 직후인 1920년대에 글을 쓴 사람치고 식민지 상황에 대한 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문학적 노력에서 성공을 거두거나 실패한 경우를 막론하고 해당된다. 그런데 표제 하나만 보더라도 소월의 태도는 극히 시적이다. 그는 「조선의 마음」이나 「님의 침묵」의 관념보다는 「진달래꽃」이란 구체적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조선주의’를 걸어갔다. 조국의 산천에 지천으로 피어있어 조국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진달래꽃으로 조선주의를 밝혔다는 것은 그가 천성의 시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모더니스트 김기림은 김소월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시론에서 낡은 시를 공격할 때 거명은 하지 않았지만 김소월을 대표적인 가상적으로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참신한 현대성을 자부했던 김기림 시가 퇴색하여 울림이 약한 반면 김소월 시는 꾸준히 독자를 모으면서 독자에게 호소한다. 소월에 대한 평가 중에서는 김우창 교수의 “소월의 슬픔은 말하자면 자족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해결이 된다. 슬픔의 표현은 그대로 슬픔으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것이다”란 말 속에서 지극한 정의를 얻고 있다. 김소월은 ‘옷과 밥과 자유’ 없는 고향상실의 구차한 시대에 원초적인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적인 합법화를 통해서 인간 회복과 민족 회복을 호소한 당대의 민족 시인이었다. 인간 삶의 본원적인 슬픔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보여주진 않았으나 보편적인 슬픔의 표출을 통해 독자들에게 공감의 위로를 안겨줬다. 취약점이 허다하지만 그의 시가 거부감을 주지 않고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념의 명시적 표출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정지용: 시는 언어로 빚는다
정지용의 「鄕愁」는 1927년 <朝鮮之光>에 발표됐으나 실제 제작 연도는 1923년이라 한다. 어쨌건 『진달래꽃』이 상자됐을 무렵에 이 작품이 씌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첫 작품에 작자의 가능성이 모두 들어있다는 말이 있다. 우선 우리는 작품 속에 동원된 어휘의 풍부함, 그 적정성, 거의 발명에 가까운 독자적 구사에 놀라게 된다. 이 시는 유장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옛 마을의 생활리듬을 반영한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농촌에서 생활템포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더디었다.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에서 유장한 리듬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유장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고향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금빛 게으른 울음’은 발표 당시에는 놀라운 공감각 표현이었을 것이다. 단 넉 줄로 고향 마을의 정경을 인상적으로 떠올리는 서경의 솜씨는 놀랄 만하다. 완전히 새로운 수법이요 솜씨다. 전부 5연 26행으로 되어 있는 「향수」는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란 喚情的 후렴의 되풀이가 특징인데 그 구도가 복잡하면서도 정연하다. 이 시편은 ‘전설’을 빼고는 모두 토박이말로 구성돼 있다. 시인 자신이 의도적으로 ‘흙에서 자란’ 토박이말만을 골라 쓴 것으로서 토착어의 배타적 조직이 그 특징이다. 1920년대 일제 한자어를 마구잡이로 빌려 쓰던 시절에 이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소월 시에서는 직관적 통찰이 보이지만 방법적 자각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정지용에 와서 방법적 자각과 시범적 실천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다.


시사적으로 볼 때 정지용 이전과 이후에 한국시의 언어는 크게 변한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윤동주, 김춘수의 시어는 지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서정주, 유치환, 백석의 경우에는 역주행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정지용 시는 상당히 평범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그것은 그의 시어조직이 많은 추종자를 통해서 일반화되고 주류화 됨으로써 마침내는 관례화돼 범상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대한 영향력이 도리어 당사자의 시를 범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새로움과 시의 위의
『정지용시집』에는 바다를 노래한 시편이 많다. 그가 모더니스트란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카페 프란스」, 「귀로」, 「슬픈 인상화」, 「아츰」 같은 도회 시편, 「비로봉」, 「절정」 같은 선명한 그림 시편과 함께 바다 시편이 많다는 것과 연관된다. 「해협」, 「다시 해협」, 「갑판 위」를 위시하여 「바다」란 표제가 달린 시편만도 일곱 편이나 된다. 바다는 우리의 전통 시가에 등장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것은 농경사회라는 우리의 전통적 삶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중국 시에 바다 시편이 드물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바다가 시에 도입되고 그것은 새로운 것이고 정지용은 바다를 노래한 최초의 시인의 한 사람이 된다. 「향수」가 주제에 걸맞게 느긋한 悠長調임에 반해서 바다 시편인 「갈매기」는 가쁜 호흡에 템포가 빠르다. 갈매기의 동작이 빠르고 그것을 지켜보는 눈과 의식이 똑같이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빠름은 어느 면에서 근대 도시에서의 근대인의 삶이나 의식을 반영한다. 인상파 화가 드가가 그림 속에 속도를 도입했듯이 역동적인 빠름의 ‘속도’를 시 속에 도입한 것도 모더니스트 정지용이 보여준 새로움의 하나일 것이다.


정지용의 후기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회를 향해서 닫혀 있고 자연을 향해서 열려 있는 隱者的 지각이 성취한 고요와 무심의 경지이며 그것은 동양 전통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경박한 감각과 말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최상의 작품으로 평가돼야지 빈약한 작품 위주로 냉소적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의 시력 20년은 우리말을 찾아서 닦고 조직하는 일에 바쳐졌고 그것을 기반으로 어떤 성찰이나 지혜를 펼칠 기회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후배인 미당은 중년 이후 신라를 통한 ‘전통 창제’에 전념해 시인으로서의 자기 부과적 과업을 높이 성취할 수 있었다. 또 김춘수는 ‘무의미의 시’를 기획해 노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작에 임할 시적 공간 혹은 평생직장을 마련했다. 나이 마흔에 사실상 절필한 정지용에게는 그러한 문학적 행운이 허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에 ‘언어 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는 신념과 ‘우리 시는 우리말로 빚어진다’는 평범하나 홀대된 방법적 자각을 작품 제작으로 실천한 그의 공로는 응분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최초의 직업시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시적 성취가 후속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문학사적 사실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