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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성찰적 근대성’의 시기는 언제일까?
한국형 ‘성찰적 근대성’의 시기는 언제일까?
  • 홍찬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6.01.2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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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개인화: 해방과 위험의 양면성』 홍찬숙 지음|서울대출판문화원|308쪽|25,000원

 

한국의 경우 서구에서 나타나는 계급연대로부터의 개인화보다는
전통적 가족·친족 유대로부터의 개인화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개인화’를 축으로 한 시기구분을 통해 개인화 이전의 근대성을
‘압축적 근대성’으로, 그 이후의 근대성을 ‘압축적 개인화’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2015년 첫날 만 70세라는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회학자였다. 모든 질서가 해체되듯 보이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그는 현실을 앞당겨서 진단하는 사회학적 방법을 감행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시대진단은 상당히 잘 들어맞았다. 예컨대 『위험사회』의 출간을 몇 달 앞두고 체르노빌 재앙이 발생했고, 개인화란 단순히 사회의 중산층화가 아니라 중산층의 불안 증가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그의 주장은 2011년 월가 점령운동의 구호인 “우리가 99%다”를 통해 재조명됐다. 벡의 사후 유럽에서 난민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면서 그의 세계시민주의 사회학에 대한 사후 승인의 분위기가 형성됐고, 2015년 겨울 파리에서 어렵사리 기후변화 합의문이 마련되면서 기후변화를 토대로 세계위험공동체가 형성되리라던 그의 전망이 현실에 한 발짝 가까워진 듯이 보였다.

벡은 다작이 돋보였던 50대를 넘기면서 세계시민주의 사회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그러면서 동북아시아에 유독 애정을 보였다. 이것은 물론 쌍방향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앞 다퉈 그의 저작들이 번역됐고, 2010년 그는 런던정경대학에서 발행하는 British Journal of Sociology에 아시아특집 출간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경섭 서울대 교수의 ‘압축적 근대성’ 이론에 상당히 고무  으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방법론적 세계시민주의’가 차츰 형태를 갖출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성찰적 근대성과 압축적 개인화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필자는 벡과 다소 이견을 갖게 됐다. 필자는 장경섭 교수의 ‘압축적 근대성’ 이론에서 벡 사회학의 핵심인 ‘성찰적 근대성’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렇기 때문에 장 교수의 ‘압축적 근대성’ 개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말하자면 ‘압축적 근대성’이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시공간적 압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경섭 교수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전근대성, 근대성, 탈근대성 모두의 동시성’을 일컫는 개념이라면, 한국의 근대성에서 사실상 벡이 구분하는 ‘단순근대성 대 성찰적 근대성’ 또는 ‘산업사회 대 위험사회’의 대립구도는 성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위험사회’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었다.
이 책에서 필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벡의 개인화 이론을 설명하고, 장경섭 교수의 ‘압축적 근대성’ 이론에 대해 자세하게 논의했다. 특히 필자는 ‘압축적 근대성’ 이론의 ‘개인주의 없는 개인화’ 개념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구했는데, 이 개념은 장경섭 교수뿐만 아니라 심영희 한양대 교수, 신경아 한림대 교수, 김혜경 전북대 교수 등의 가족사회학 연구와도 상당히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한국의 근대성과 관련해 이러한 가족사회학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사회 특유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사회계급에 맞먹을 만한 사회연대의 구조가 부계제 가족과 친족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부계제 가족과 친족이 근대화 과정에서도 여전히 ‘호혜성’의 근간으로 작용했던 시기와 그 기능을 상실한 시기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봤다.

부계제 가족과 친족이 그 호혜적 기능을 상실한 계기는, 벡이 서구에서 계급연대가 기능을 상실한 계기라고 설명한 바와 다르지 않은 ‘근대성의 성공’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경우 유교적 전근대성과 자본주의 근대성이 압축되는 과정을 통해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서구에서 나타나는 ‘계급연대로부터의 개인화’보다는 ‘전통적 가족/친족 유대로부터의 개인화’가 두드러진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개인화’를 축으로 한 이러한 시기구분을 통해 개인화 이전의 근대성을 ‘압축적 근대성’으로, 그 이후의 근대성을 ‘압축적 개인화’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논구했다. 벡이 서구사회에서 ‘단순근대성’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한국의 경우 ‘압축적 근대성’에 해당되고, 벡이 ‘성찰적 근대성’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압축적 개인화’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기구분은 동시에 두 시기의 공존을 의미한다고 벡이 말했듯이,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가족주의와 개인화의 공존은 이와 같은 시기구분에 기초한 두 시기의 공존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압축적 근대성’의 개념은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모든 역사적 특성을 한 군데로 융합시키는 용광로 같은 속성을 잃고, ‘근대화된 유교 가족·친족원리의 지배’라는 특성을 보이는 시기로 한정된다. 즉, 필자는 장경섭 교수의 ‘압축적 근대성’ 개념을 1990년대 이전까지로 한정시키자고 제안한다.

타자의 소멸을 설명하는 또다른 방식
이렇게 보면 압축적 개인화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형 ‘성찰적 근대성’의 시기는 유교적 가족·친족원리가 근본적으로 도전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과정이 산업화의 성공에 기초한 여성지위의 변화에서 기인했다고 설명했다. 산업화의 성공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도화했던 부계제 친족제도(중국식 종법제도)의 약화를 초래하고, 다시 고려시대와 같은 형태의 선계제로 회귀하는 듯한 양상을 연출했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이것을 ‘양계제로의 경향’이라고 설명했으나, 필자는 이것을 ‘압축적 개인화’의 양상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과정을 필자는 특히 한국의 1980~90년대 저출산 현상과 1990년 전후 여성운동의 역할을 통해 분석했다.

이와 같은 필자의 관점을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 이 책의 앞부분에서 필자는 벡의 개인화 이론에 내재한 변증법적 특성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설명하고자 시도했고, 뒷부분에서는 서구에서 관찰되는 개인화의 다양한 유형들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장경섭 교수와의 공동연구 하에 일본 교토대의 오치아이 교수 연구팀이 출판한 책(Transformation of the Intimate and the Public in Asian Modernity)을 꼼꼼하게 분석해 필자의 논지를 정리했다.
연구대상이 서구사회가 아니라 한국사회라는 사실, 그리고 ‘압축적 근대성’ 이론에 대한 시각 차이와 함께, 이 책에서 벡과 필자의 차이가 또 한 번 드러나는 부분은 ‘타자의 소멸’에 대한 관점이다. 벡과 달리 필자는 ‘타자의 소멸’ 가능성 속에서 ‘타자화에 의한 지배의 가능성’ 역시 동시에 강화되리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의 문제를 다루는 장을 이 책의 앞부분에 배치했기 때문에, 서문에서 벡과 필자의 이러한 ‘차이’를 밝혔고, ‘마무리’ 부분을 통해 다시 한 번 그것을 설명했다.

 

홍찬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교수 
독일 뮌헨대에서 울리히 벡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세계화 시대의 권력과 대항권력』 『장거리 사랑』(공역) 『자기만의 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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