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盛世와 몰락의 교훈 … 무엇이 미래를 만들어내는 힘일까?
盛世와 몰락의 교훈 … 무엇이 미래를 만들어내는 힘일까?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12.23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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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23(마지막회). 어제의 장안, 오늘의 서안, 내일의 중국
▲ 대안탑에서 바라본 서안의 대로. 중국 정부의 서부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각종 건설공사가 진행중이다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장안은 그저 그런 역사도시가 아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인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각인된 두 개의 나라가 바로 한나라와 당나라였다. 그리고 장안은 그런 두 나라의 왕도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장안은 자신들의 역사를 낳은 도시이자 자신들의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문화 관광지를 둘러보면 쉽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표기 중에서 유독 자주 사용되는 것이 ‘漢代’라는 표현이고, 중국을 다니다 마주친 고성들의 이름 중 상당수는 ‘唐城’이다. 漢代에 시작되고, 唐代에 지어진 성을 그 원형으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秦 그리고 漢은 중화적 국가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진과 한은 많은 점에서 다르다. 진이 첫 번째 통일국가이기는 하지만, 흔히 말하는 소중국의 테두리를 벗어나기에는 지나치게 역사가 짧았기 때문이다. 반면 한은 소중국의 테두리를 벗어나 외부세계에 중국의 존재감을 알린 첫 번째 국가였다. 그리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밀고 밀리는 접전 속에 외부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를 개척한 첫 번째 국가이기도 했다. 외부세계와 접촉하고 경쟁했다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漢族’, ‘漢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 연유한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문자는 ‘漢字’로 불리고,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문장은 ‘漢文’이라고 불리며, 그 한자와 한문을 통해서 한나라 시대에 축약해간 사회질서의 축이 바로 천자 중심의 중국적 통치 질서를 강조한 ‘儒家’였다.

 

오랑캐가 만든 평화와 ‘盛唐’의 기틀

중국인들의 역사서에 주변의 이민족들이 오랑캐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 또한 이 시기였다. 이전에도 오랑캐에 대한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의 오랑캐는 막아야 할 대상이었지 관심을 가질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漢代의 한인들의 이민족에 대한 생각은 이전과 달랐다.

“만약 선물로 이익을 주어 유인하면 입조하게 될 것이며, 여기에서 더해 신의로서 그들을 신속하게 한다면 영토를 만 리도 넓힐 수 있다. 통역을 거듭해서 풍속이 다른 나라들을 오게 한다면, 천자의 위덕이 두루 四海에 미칠 것이다.”(『史記』 「대완열전」)

서역을 개척하고 돌아온 장건이 제안한 말이다. 여기에는 이웃과 접한 나라와 교통한다는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곧 주변의 이민족 국가를 대등한 국가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같은 인식은 좀 더 오랜 사고방식에서 나왔다. 제나라의 대신인 관중이 환공에게 “戎狄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아서 욕심이 끝도 없습니다. 諸夏는 친근한 사이이기 때문에 내버려서는 안 됩니다.”(『좌전』 閔公 원년 조)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의 이민족을 오랑캐이고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은 중국인들에게 뿌리 깊은 것이었다. 문명인과 야만인, 아니 사람과 짐승이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던 셈이다.

그 결과가 이웃 나라와 통교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웃의 야만인들을 복속시킨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華夏의 테두리는 인정해도 夷狄의 테두리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며, 따라서 夷狄은 정복과 개척의 대상이 될 뿐 통교의 대상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등한 국가도 대등한 인간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을 복속시켜 한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을 하나의 시혜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곧 복속할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천자의 위덕이 미친 일이라는 해석이다. 여기서 천자의 위덕이 사해에 이른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로마제국의 평화를 위해 오랑캐를 전쟁으로 정복한 것과 다르지 않다. 팍스로마나가 정복전쟁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것처럼, 한의 평화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 말기부터 남북조 말에 이르는 동안의 혼란은 그런 漢人들의 오만한 생각을 무너뜨리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족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오랑캐들에 의한 평화가 강제됐기 때문이다. 한족이 혼란기라고 부르는 시기가 사실은 오랑캐들에게는 전성기였다. 결국 고대 시기의 평화라는 것은 전쟁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것이었으므로, 오랑캐의 평화는 한족의 참상이고 한족의 평화는 오랑캐의 참상일 수밖에 없었다. 공존이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대등한 국가가 아니라 정복자와 피정복자, 문명과 야만이라는 우월의식이 지배하는 한 갈등은 사라질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한인들이 서슴없이 폄칭했던 오랑캐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唐人이라는 이름을 낳고, 그 당인들의 국가 唐이 세계제국으로 거듭나고 무너지기까지. 누누이 이야기한 것처럼, 당은 한인들의 국가가 아니었다. 胡와 漢이 대등하게 결합한 국가였다. 당인들은 한인들과 달랐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문명과 야만, 화하와 이적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차별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개념이 아니었다. 당이 성장하고 강성해진 배경에는 오랑캐 역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족단일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다민족 국가라는 개념이 당의 지배층에는 완연하게 존재했다. 황제라는 호칭과 동시에 사용된 ‘천가한’이라는 칭호가 그것을 증명한다. 당의 통치자는 한족의 천자이면서, 오랑캐의 천가한이기도 했다. 두 가지 호칭을 동시에 사용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당의 지배층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당을 구성하는 이민족들 간에 서로의 대등한 관계가 허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가 어떻게 해석해서 수용했던 간에 그것이 용인된 현실은 부정되지 않았다. 제도적인 용인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던 시대가 또한 盛唐 시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이웃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文軌는 混同이요, 천지는 交泰라. 언어는 初服으로 돌아왔고 □□의 옛 여막 입구는 가리어 버렸다. 八狄을 왕래하며 九譯으로 보배를 날랐다. 이에 옛 덕을 보태고 간절하게 답하며 정성껏 관대히 대했다. 무덕 5년 임시로 通直散騎侍을 받아 旌節을 받고 신라국으로 가게 됐다. 벽해를 거슬러 건너고 丘를 넘어 책력을 반포하고 관대를 바꿔 입혔다. 이를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겼다.”(「大随故司隶刺史李君墓志之铭」)

▲ 서안의 도심. 장안성의 종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현대 서안의 시가지 모습

강성한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무덕 5년이면 624년이다. 당이 건국하고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고, 당은 돌궐의 눈치를 보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런데 먼 신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서쪽의 돌궐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시기에 동쪽의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저극적인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직후인 정관 원년(627년), 당태종이 백제 무왕에게 보낸 璽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신라 왕 金眞平은 짐의 번국의 신하요, 왕의 이웃 나라인데 매번 들으니 군사를 보내 정벌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군사를 믿고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은 바라는 바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신라의 사신에 대해 함께 조칙을 내려 화해하도록 해 모두 화목하게 만들었다. 왕은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을 모름지기 잊고 성심으로 짐의 본뜻을 알아, 이웃 나라와의 정을 함께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그치라.”

건국 초기 약소국이었을 때인 당의 입장이 반영돼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국가 간의 외교관계라는 입장이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전래의 번속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은 여전하지만, 내용을 보면, 다자간 외교에서 자신의 이니셔티브를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적 사고가 내재돼 있다. 단순히 당이 약소국이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당은 태종의 정관연간부터 현종의 개원연간까지 성세를 구가했지만, 그 성세를 구가하는 대당제국의 이웃에는 언제든지 대당제국 그리고 그 왕도인 장안을 위협할 수 있는 강대한 적이 존재했다. 토번이 바로 그 목구멍을 위협하는 서방의 강대한 적이었다. 동쪽 역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새롭게 등장한 발해와 통일신라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사방이 연계해 언제든지 당을 위협할 수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주변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강성일변도의 정책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주변 국가 간의 강온 양면 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내부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민족들이 내부의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주변과 내부의 상황이 이전의 국가들과 달리 명리를 동시에 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곧 당의 평화는 어떻게 보면 당 자체의 호한통합이라고 하는 정치문화적 국가체제의 특성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당 못지않게 강성했던 이웃국가와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하는 한계와의 타협점에서 기인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호한통합이라고 불리는 당의 정치체제, 경제체제, 문화체제, 민족구성의 체제는 주변국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당 제국이 제국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돌파구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명목은 기미정책을 추구하되, 실질은 이익을 공유하고, 공존하는 체제를 내외에 구축하는 것이 당 제국의 해결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 한인은 더 이상 화하와 융적이라는, 문명과 야만 그리고 중화와 四夷라고 하는 대립적 구도에서 말해지는 중화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胡風에 열광했던 당인은 그 결과로서 등장한 것이다. 천 년 전에 오랑캐의 기마를 도입하기 위해서 온갖 변명과 미사여구를 동원해야 했던 중화 한인이, 전 년 후에는 오랑캐의 문물과 습속에 열광하는 당인으로 거듭났을 때, 거기에 오랑캐와 화하인의 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 제국에 자연스레 정착됐던 호한통합 체제, 아니 다민족 공존의 연합국가 체제는 내외의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장안은 그 전성기를 대표하는 고유명사였지만, 후대에는 중국과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다시 한 번 구가하고자 했던 시대를 표상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했다.

오늘날 장안은 서안으로 불린다. 장안은 당의 멸망 이후에는 다시 장안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중국의 중심이 황해 연안으로 그리고 동북방으로 옮겨갔던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내륙의 동서교역로가 원활하지 못했던 반면, 남아시아를 거치는 동서간 해상교역로는 나날이 번창했기 때문에 일면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서북의 이민족들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된 결과이기도 했다. 동서교역의 중심 교통로는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초원을 가로지르는 카라반이 아닌 아라비아에서 중국 동남 연해에 이르는 해상로에 줄을 잇는 선박들에 의해 대체됐다. 게다가 아시아 대륙 동쪽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동북의 이민족에게 장안은 이제 더 이상 당대만큼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그저 방어기지로서의 변경도시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장안이 영원한 성세를 꿈꿀 때의 이름이었다면, 서안은 서쪽 변경의 안정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一帶一路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세계 전체를 중국과 연결하려는 전략에 의해 제시된 정책이다. 그 정책의 첫 머리에 앞세워진 도시가 바로 서안이다. 대당제국이 장안을 기점으로 동서를 아우르는 세계국가로 거듭났듯이, 현대 중국 역시 해상로와 육로를 아울러 전 세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 네트워크의 첫 번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바로 서안이다. 서안에서 감숙성, 신강위구르자치구를 지나 파키스탄을 관통해 인도양에 이르는 고속도로와 통신망 그리고 송유관이 동시에 건설되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을 관통해 파키스탄을 가로질러 중동과 유럽으로 연결되는 교통망과 에너지망 그리고 통신망을 동시에 건설하고 있다.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 그리고 또 다른 도시의 발흥

아마도 이것이 당나라 이후 중국을 통일한 국가 중에서 원나라를 제외하면, 첫 번째로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서안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지는 내일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강렬한 중화적 사고는 한족만의 소중국을 낳았다. 반면 중원을 지배한 이민족들이 건설한 것은 대중국이었다. 현대의 거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이 대중국의 외형적 위상을 갖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대중국을 낳았던 것은 거대한 영토가 아니었다. 그 중화의식을 누르고 문화의 다원체제, 민족의 다원체제를 중국인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만 대중국이 등장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공존과 공영 그리고 외부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팍스차이나를 꿈꾸는 것은 한계를 스스로 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역사는 일방통행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강렬한 중화의식은 일방통행식의 사고에 다름 아니다. 만약 주변 강국을 인정하고 호풍에 주저 없이 열광했던 장안의 당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동아시아 세계가 성립될 수 있었을까. 주변의 존재를 부정하고서 과연 중심부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기나 할까. 현대의 중국인들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만약 일방통행의 중화주의적 사고였다면, 거대한 동서교역로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도시 장안의 탄생은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주변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방적으로 당에 기대기만 한 신라였다면, 저 멀리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가능했을까. 신라인들은, 그리고 고려인들은 거대한 동서교역의 세계에 편승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동서교역로의 한 축을 움직이는 주체였고 개척자이기도 했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문화적인 강성은 결코 중국에 기대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동서교역로 다시 말하면 당시의 글로벌 세계에 능동적인 주체로 참여해 쌍방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능동적으로 다자간의 공존을 만들어내고 추구하는 세계인, 그것이 중국인들이 가야 할 길이고 한국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선적이고 일방통행적인 사고 안에서 내일은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이 될 것이다. 다자간의 공존은 꼭 국가 간의 문제, 민족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부의 다양한 계층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부의 타자를 인정하고, 내부의 다른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만 한 집단의 내일이 존재할 수 있다.

장안의 번성은 그 내외의 다양성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았을 때 얻어진 것이었고, 장안의 몰락은 나와 다른 타자를 부정했을 때 어김없이 다가온 결과였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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