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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보다 충실하고 활발한 조선왕조 ‘빅 데이터’
실록보다 충실하고 활발한 조선왕조 ‘빅 데이터’
  •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한국사
  • 승인 2015.12.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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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고전 번역 50년 기념 ‘『日省錄』 정조대 완역 기념 학술대회’ 개최

정조는 1760년부터 『일성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왕실 중심의 국가론이 강화되던 당대 정치적 분위기는 세손에게도 감고의 중요성에 대한 일깨움을 주었다. 그래서 정조는 세손 시절 원래 개인적인 반성의 기록이었던 『존경각일기』를 공적인 기록인 『일성록』으로 전환시켜 이를 제도화해 나갔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이명학, 성균관대)은 지난 4일(금)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한국 고전번역 50년 기념으로  ‘『일성록』 정조대 완역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는 제2회 방은 고전번역상 시상식도 함께 열렸다. 이날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성록』이 왜 중요한 사료인가?」를 기조강연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조광 교수의 기조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조선은 ‘책의 나라’였다. 프랑스의 서지학자 모리스 꾸랑은 그의 저서인 『조선서지』 머리말에서 조선을 ‘책의 나라’라고 말하며 조선의 기록문화에 감탄했다. 특히 조선후기 사회에 이르면, 당대에 산출된 연대기적 기록은 그 종류와 수량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충실하고 풍부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흔히 서양사의 경우, 방대한 단일성격의 자료를 예로 들 때는 영국의 ‘의회문서’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의회문서’도 내용의 풍부함이나 양의 방대함에 있어서 조선왕조의 연대기적 사료들과는 비견될만한 자료가 못된다.

조선왕조가 산출한 기록물 중에서는 조정에서 편찬한 각종 기록들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여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과 같은 역사서와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과 같이 각 관서에서 작성한 등록·일기류 등 연대기적 자료들이 있다. 이러한 관찬 사서들 가운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같은 자료는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세계유산 중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이 기록문화유산은 조선왕조의 산물이었다. 문치주의를 채택했던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자신의 지도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성리학은 經史一體的 자세를 견지하며 역사를 경전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반영해 조선왕조는 역사기록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鑑戒, 鑑古를 통해 조선을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했으며,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아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역사기록은 왕조 및 지배층의 존립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일로 평가됐다.

조선왕조는 18세기의 사회에 이르러 왕권을 강화시켜 왕실중심의 국가통치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왕 수업을 받고 있던 세손 정조는 1760년부터 『일성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왕실 중심의 국가론이 강화되던 당대 정치적 분위기는 세손에게도 감고의 중요성에 대한 일깨움을 주었다. 그래서 정조는 세손 시절 원래 개인적인 반성의 기록이었던 『존경각일기』를 공적인 기록인 『일성록』으로 전환시켜 이를 제도화해 나갔다.

이렇게 제도화된 『일성록』은 정조가 죽은 이후 세도정권 하에서도 신료들에게도 계속 존중받아 기록될 수 있었다. 『일성록』이 정조의 개인적 자료나 정조 당대의 기록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일성록』 자체가 가지고 있던 감고의 편리함 내지는 효율성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성록』은 18세기 후반기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됐다. 그리하여 『일성록』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기록문화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성록』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통치행위를 중심으로 그에 유관한 각종 사항을 기록한 국왕중심의 기록이다. 따라서 『일성록』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국왕의 국정장악력 여하에 따라 그 기록에는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즉, 정조와 같이 국정 장악력이 뛰어났던 군주의 경우에는 『일성록』의 기록도 충실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그에 반대되는 철종의 경우에는 『일성록』의 기록에 있어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즉, 국왕의 통치권과 관련된 疏箚類를 기록한다 하더라도, 그 축약의 정도에 차이가 있고, 수록할 소차를 선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채택 종류가 다르게 된다. 『일성록』에는 이러한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일성록』은 우선 강목체로 편찬돼 있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기사들이 일정한 형식으로 재정리돼 있다. 그러므로 『일성록』은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전산화에 유리하며, 검색과 활용에 편리한 측면이 있다. 즉, 『일성록』의 인사기록, 각종 회계기록, 인구자료, 형옥관계 기록 등은 일정한 규칙 아래 기술돼 있기 때문에, 쉽게 이를 전산화해 조선후기사 연구에 있어서 일종의 빅 데이터(big data)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성록』은 중세사회 해체기에 해당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사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훌륭한 자료로 평가해 줄 수 있다.

즉, 『일성록』은 당시의 조선사회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원래, 『일성록』은 구체적 민생을 파악하려 했던 정조의 노력을 함축하고 있는 자료였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은 『일성록』이 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유지돼 나갔다. 『일성록』을 통해서 새롭게 성장하는 민들의 동향, 그 민들이 살고 있는 향촌사회에 대한 구체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료다.

『일성록』은 국내문제의 이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19세기 당시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국제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당대의 조선인들은 점차 다가오는 서세동침의 단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과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강들의 움직임까지도 짐작케 해주는 의미 있는 자료다.

한편, 『일성록』은 실록을 편찬할 때 1차 사료로 사용됐다. 그래서 『일성록』은 허술하게 기록된 동시대의 『조선왕조실록』에 비교해 그 사료 분량이나 가치가 뛰어나다. 『일성록』은 실록이나, 방대한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도 포함돼 있지 않은 여러 정보를 가지런히 정리해 전해주고 있다. 『일성록』이 지닌 이러한 특성은 그 사료로서의 중요성을 높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일성록』은 동시대의 『조선왕조실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이며, 난삽하게 모여진 『승정원일기』의 자료보다는 체계적으로 정리돼 특정사건의 검색과 파악에 월등히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비변사등록』보다 더 활기찬 민의 생활을 전해주는 자료다. 이 때문에 『일성록』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선왕조의 역사기록 가운데 『일성록』은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며 19세기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일성록』의 원본은 비교적 정갈한 글씨로 기록돼 있어서 전문적인 역사연구자들은 친근히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타분야의 전공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이 원문 『일성록』에 접근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번역작업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이제 『일성록』은 정조시대까지를 번역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말고 더욱 속도를 내서 『일성록』의 나머지 부분을 정확히 옮겨 주기를 바란다.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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