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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아닌 학문 그 자체에 복무하는 역사가의 자세
정치 아닌 학문 그 자체에 복무하는 역사가의 자세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1.16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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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동아시아 역사 논쟁』 김한규 지음|소나무|623쪽|35,000원

“이 두 논쟁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근사성은 논쟁 당사자들이 모두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무문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 시대의 ‘中國’과 ‘韓國’은 국가의 명칭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공동체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특정 국가의 명칭이었으니 이들을 서로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두 논쟁은 모두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구별하지 않은 채 국가 간의 관계와 역사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일치시키려는 방향으로 진행됨으로써 논쟁 쌍방이 모두 논리적으로 치명적인 동일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책의 쪽수는 623쪽. 제본술이 좋아져서 그리 두껍게 보이지 않지만, 이 책은 단연 문제적이다. 문제적일뿐만 아니라, 학술서로서 갖춰야할 세세한 미덕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다.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쓴 책 『동아시아 역사 논쟁』이다.

책의 구성은 서론과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 역사 논쟁’, ‘티베트와 중국의 티베트 역사 논쟁’, ‘베트남과 중국의 중월관계사 논쟁’, ‘타이완과 중국의 統獨 논쟁’, ‘위구르와 중국의 동투르키스탄 역사 논쟁’, ‘몽골과 중국의 몽골사 논쟁’, ‘일본과 중국의 역사 논쟁-釣魚島 쟁의’, ‘동아시아 역사 논쟁의 비판적 이해’ 등으로 이어진다.

대개 동아시아 역사 논쟁을 한·중·일의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논쟁 범위를 훨씬 더 넓혀 나감으로써 역사를 보는 독자들의 시야를 더 확장시켜 준다. 특히 74쪽에 이르는 참고문헌은 각 논쟁별로 빼곡하게 정리돼 있으며, ‘찾아보기’ 색인까지 갖췄다. 김 교수는 “기존 연구 성과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초 자료를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됐다”라고 말했는데, 역사 연구자의 지적 치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일 뿐만 아니라, 관련 주제에 관심을 둔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길안내 역할을 하는 자료로서도 값지다.

또한 10쪽에 걸친 ‘책을 펴내며’는 역사 연구자로서, 학자로서 ‘김한규’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좋은 텍스트다. 역사학이란 학문의 길에 들어선 장면들, 그 긴 지적 여정을 짧게 정리했는데, ‘역사 연구’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는 곳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사 연구란 개인적 체험이 불러일으킨 지적 호기심으로 인해 현재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그 문제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현실 문제 이해하기 위해 역사 연구”

저자는 ‘역사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는 “현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한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설명한다. 책의 제목이자 주제가 되는 ‘역사 논쟁’에 대한 그의 설명도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역사학도에게 던져진 숙명적 과제의 하나다. 현재는 당연히 과거의 결과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지식이 현재에 대한 이해로 직접 이어질 수는 없다. 과거에 대한 지식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시도한다. 대부분의 역사 논쟁이란 것이 바로 역사를 통해 현재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비록 역사 지식의 불완전성을 전제했지만, 그는 ‘역사학적 인식’의 의미만큼은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 “역사학적 인식은 비록 제한된 자료에 대한 선입견과 정서 등이 작용한 불완전한 해석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대한 이해의 한 방법으로 영원히 포기되지 못할 지적 행위임이 분명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책 『동아시아 역사 논쟁』의 저술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아무래도 진지하고 무거운 ‘학술서’임에도 특정 주제에 더 눈길이 가닿을 수밖에 없는데, 제1장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 역사 논쟁’, 제8장 ‘동아시아 역사 논쟁의 비판적 이해’가 관심을 끈다. 실은 이 두 논문을 읽으려면 저자가 쓴 ‘서론’을 먼저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김 교수는 최근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역사 논쟁 두 가지를 예의 주시했다. 하나는 티베트 귀속의 역사적 근거를 둘러싼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사 귀속에 관한 논쟁이다.

티베트-중국의 역사 논쟁을 눈여겨 본 저자는 “티베트측이나 중국 측은 모든 쟁점에서 상반된 주장을 내놓았지만, 양측 모두 전통 시대의 국가 관계를 통해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를 규정함으로써 현재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거를 확보하려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라고 읽어내면서, 고구려사 중국 편입 문제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마침내 저자는 ‘慧光’을 발휘한다.

“이 두 논쟁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근사성은 논쟁 당사자들이 모두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무문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 시대의 ‘中國’과 ‘韓國’은 국가의 명칭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공동체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특정 국가의 명칭이었으니 이들을 서로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두 논쟁은 모두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구별하지 않은 채 국가 간의 관계와 역사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일치시키려는 방향으로 진행됨으로써 논쟁 쌍방이 모두 논리적으로 치명적인 동일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이르면, 저자가 균형적이면서 가치중립적인 역사 연구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음을 쉬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학문 그 자체에 복무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는 중국이 주변 국가들과 벌이고 있는 역사 논쟁에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함께 ‘김한규 역사 인식’의 한 줄기인 ‘중국적 세계 질서’의 정리로 이어진다. 그가 보기에 동아시아 역사 논쟁에는 역사공동체와 국가 개념의 혼용이나 책봉-조공관계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무차별 적용, 역사의 귀속과 역사공동체 귀속의 혼동 등이 내재해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중국적 세계 질서’의 유산 또는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책을 펴내며’에서 밝혔듯, 이 책은 저자의  ‘중국적 세계 질서’에 대한 ‘마지막 정리’가 될 수도 있다.

‘중국적 세계 질서’의 유산에 관한 학문적 정리

‘중국적 세계 질서’는 저자의 말대로 모호하고 난해해서 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주제다. 그것이 현재의 국익 문제와 연결돼 있으니 논쟁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이 격렬한 논쟁의 분석에서 저자는 두 가지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에서 현실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순수한 논리적 구조를 잘 분석하면 ‘중국적 세계 질서’의 모호함과 난해함을 극복하고 그 본질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전통 시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부수적 소득에 대해서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당 기간 우리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준 ‘동북공정’에 의한 역사 논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고구려사 논쟁을 논리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저자는 이런 기대의 끝자락에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역사 해석에 개입하고 역사 교육을 독점하려는 유혹을 이겨내는 데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덧붙였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현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동북공정’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 또한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환기해준 장점이 있다고 저자가 지적했을 때조차, 그의 진의는 ‘역사학자의 기본적인 책무’에 있지, 현실 문제 해결에 있지 않다. 그의 말대로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우리에게 ‘동북공정’이 던진 충격은 ‘고구려사=한국사’의 자명성에 대한 객관적 논거 찾기라 할 수 있다. 역사 논쟁은 이렇게 새로운 지적 경험의 확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비생산적 소동과 소란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한국의 학계에서도 스스로 자신을 객관적 위치에 놓고 철저하게 학문적 논리에만 순종하는 학자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라는 문장이 이 책의 마지막에 놓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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