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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환자 향한 편견과 싸운 의학계 시인 … “생각하는 인간으로 잘 살았다”
정신질환 환자 향한 편견과 싸운 의학계 시인 … “생각하는 인간으로 잘 살았다”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5.09.07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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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116. 故 올리버 색스 교수

 

▲ 故 올리버 색스 교수사진출처: www.oliversacks.com

의학계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올리버 색스 교수(Oliver Sacks, 뉴욕대 신경학과)가 세상을 떠났다. <뉴욕타임즈>는 ‘뇌의 기이한 현상을 연구해 온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가 지난 8월 30일, 82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올리버 색스의 홈페이지와 SNS계정에는 그를 애도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한 네티즌은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좀더 민감하도록 해준 진정한 학자였다”고 적었다.

올리버 색스는 뇌 일부가 잘못됐을 때 인간에게 나타나던 현상들을 탐구했던 신경학자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 여러 베스트셀러 책으로 엮어낸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책은 자신의 환자들이 가진 여러 질환을 토대로 인간의 상태와 의식을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책을 통해 일반인들도 쉽게 여러 정신질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미국 뉴욕 맨해튼의 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신경학자보다 작가로 유명세 떨쳐

올리버 색스는 1933년 영국 런던의 유대인 의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올리버 색스는 모험소설을 좋아했으며 그러한 소설 속 이야기들을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이던 감수성 넘치는 아이였다.

올리버 색스의 가족은 의사인 부모님을 비롯해 야금학자, 화학자, 선생님들로 가득했다. 색스의 어머니는 열여덟 남매 중 열여섯째이고, 그런 어머니에게서 난 네 자식 가운데 색스는 막내였다. 사촌들은 거의 백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런던에 모여 살아 집안일이 있으면 수시로 만났다.

색스의 엄마는 해부학자 겸 외과의사였다. 과학도 집안에서 자란 엄마 덕분에 색스는 어린 시절 내던졌던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쉽고 재미있게 들었다. 색스의 아버지는 집에 자신만의 서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직 주말에만 가족끼리 체스, 탁구 같은 게임을 즐기도록 공간을 비워줬다.

색스는 어렸을 때부터 대가족 품에서 많은 책을 읽으며 과학자다운 태도를 익히며 자랐고, 그로인해 신경학자로 진로를 생각하게 됐으며 글쓰기 능력도 더불어 가진 과학자가 됐다.  

색스가 화학에 본격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데이브 삼촌 덕분이었다. 1943년 여름에 열 살이 된 색스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들렸던 데이브 삼촌(가느다란 텅스텐 필라멘트를 가지고 백열전구 만드는 일을 해 ‘텅스텐 삼촌’이라 불렀다)의 공장을 찾아 많은 것을 배웠다.

백열전구를 만들던 삼촌의 공장에는 오래된 백열전구와 중금속, 광물을 모아놓은 진열장이 있었고, 삼촌은 어린 색스에게 금속학과 화학의 원리를 직접 보여주며 가르쳤다.

색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 중에 금속이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어머니의 결혼 금반지를 빼서 만져보고 입술에 대보는 것을 유독 즐겼다고 했다.

의사이자 작가였던 색스는 과학자들 가운데서는 드문 수준의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책은 미국에서만도 100만 부 이상 인쇄됐고, 책은 영화나 무대에 맞게 다시 편집돼 상영되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잘 살아온 인생’

색스는 그의 책과 에세이를 역사, 병력, 임상 이야기, 신경학 소설 등 다양한 글로 작성했다. 기면증에 걸린 환자와 그를 치료하는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책 『소생』(1991)은 영화 「사랑의 기적」(페니 마샬 감독, 1990)으로 제작됐다.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뇌염을 앓은 주인공 레너드가 열한 살 때부터 손이 떨려 글을 쓰지 못하게 돼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병원에서 살면서 시작된다.

소년은 후기뇌염 기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정신은 잠들고 근육은 강직돼 갔다. 그러다 레너드가 있는 병원에 세이어 박사가 와서 아이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이름을 불러주거나 음악을 들려주고 살을 맞대며 쓰다듬는다.

우연한 기회에 레너드는 치료약을 먹게 되고 증세가 나아져 깨어나 말을 하고, 글을 읽으며 움직이며, 자신을 돌본 세이어 박사를 기억하고 감사를 전한다. 이처럼 색스는 희귀병 환자의 삶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달해 대중으로 하여금 여러 정신 질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해와 편견을 떨치게 했다.

올리버 색스는 지난 4월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의 성 정체성과 말년 생활을 적었다. 어린 시절 색스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색스는 자신은 항상 혼자 살아왔으며 일과 결혼했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색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고 알고 있지만, 말년에 동성작가 빌리 헤이즈를 애인으로 두고 사랑을 했다. 색스는 77세에 만난 헤이즈와는 죽기 얼마 전까지 약 6년 간 함께 했다.

지난 8월 15일 색스는 <뉴욕타임즈>에 ‘안식일(Sabbath)’라는 에세이를 썼다. 에세이에 따르면 색스는 죽음이 다가오기 며칠 전까지도 피아노를 치고, 수영을 하고, 훈제연어를 즐기고, 친구들에게 글을 쓰고, 몇몇 기사를 썼다.

그는 잘 살았던 자신의 삶에 감사했고, 여러 병원과 거주지에서 환자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특권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색스는 남은 몇 개월을 어떻게 보내야 가장 풍성하고 생산적으로 살았다고 스스로 여길 것인지 매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고, 다른 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많은 것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색스는 몇 권의 책과 방대한 편지, 원고, 잡지들을 남겼다. 색스는 죽기 전 비영리 기관인 ‘올리버 색스 재단’을 설립했다. 색스는 자신의 재단이 사람들에게 인간 뇌와 정신을 이해시키는 기관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의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그곳에서 연구하고 있다.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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