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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그저 ‘예송의 시대’이기만 했을까?
17세기는 그저 ‘예송의 시대’이기만 했을까?
  • 이선열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박사후연구원·한국철학
  • 승인 2015.08.12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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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17세기 조선, 마음의 철학』 이선열 지음|글항아리|360쪽 | 18,000원
▲ 우암 송시열의 학단이 탐구한 것은 무엇일까.

우암학단의 성리학적 사유에는 ‘16세기 담론의 후계자’와

‘18세기 담론의 선구자’라는 두 가지 면모가 혼재한다.

그 가운데 후자의 면모는 특히 마음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학계에서는 조선 시대의 양대 학술논쟁으로 16세기의 ‘四端七情論爭’과 18세기의 ‘湖洛論爭’을 들곤 한다. 혹은 여기에 17세기에 치열하게 논의됐던 ‘禮訟論爭’을 덧붙여 3대 논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때로는 양대 논쟁이 되고 때로는 3대 논쟁이 되는 이유는 예송논쟁이 다른 두 논쟁과 내용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단칠정논쟁과 호락논쟁은 사변적인 논리전개가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이론철학적 성격이 강한 논쟁이었다. 그에 비해 예송논쟁은 예법의 적용 및 실천과 관련된 문제라는 점에서 논변의 주제와 방향이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됐든 조선의 지식인 사회를 들썩이게 한 거대 쟁점을 시대별로 나열할 때 16세기의 사단칠정논쟁, 17세기의 예송논쟁, 18세기의 호락논쟁을 꼽는 것은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물론 당대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해 외형상 크게 논란이 된 쟁점을 위주로 기술할 때 이 같은 서술은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조선중기 사상사의 흐름을 위와 같이 정형화할 경우 16세기에서 18세기로 이어진 성리학적 사유의 연속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16세기 사단칠정론의 등장은 조선의 성리학이 주자학의 수용과 착근을 넘어 마침내 독자적인 발전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흘러 18세기에 본격화된 호락논쟁은 서양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방불케 할 만큼 복잡하고 치밀한 이론적 심화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그 시기에 이르러 조선이 동시대의 중국,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원한 주자학의 성채를 구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성리학이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 16세기부터 독보적인 수준을 확보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 사이에 놓인 17세기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사상사적으로 볼 때 17세기는 16세기의 사칠논쟁을 계승함과 동시에 18세기 호락논쟁을 선도하는 가교적 위치에 놓인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임병양란을 거친 후 正學을 추구해야 한다는 학계의 요구가 강렬해지고 아울러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간의 학문적 헤게모니 경쟁이 격화돼 간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처럼 복잡다단한 시대적·사상사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17세기를 그저 ‘예송의 시대’로 명명할 때, 우리는 자칫 이 시기를 성리이론의 측면에서 특색이 결여된 시대 혹은 성리학의 침체기로 간주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를테면 이론철학의 맥락과 다소 떨어져 있는 예송논쟁이 17세기의 지성계를 대표하는 논쟁이었다면, 18세기에 등장한 호락논쟁의 심도 깊은 성리학 논변은 전 시대의 사상사적 흐름과 무관하게 갑자기 튀어나온 셈이 된다. 다시 말해 17세기에 전개된 성리학 사유의 심화과정이 설명되지 않는 한 16세기에 발원한 사칠논쟁이 어떤 전변을 거쳐 18세기 호락논쟁으로 이어졌는지 밝힐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칠논쟁과 호락논쟁을 잇는 17세기 성리학의 내재적 연결고리를 밝히는 작업은 기존의 한국철학사 서술에서 결락돼 있던 부분이다. 이에 필자는 이 책에서 16세기 사칠논쟁으로부터 발원한 문제의식이 어떤 내적 논리를 따라 18세기 호락논쟁의 쟁점으로 전개돼 갔는지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염두에 둬야 할 것은 호락논쟁이 퇴계학파-율곡학파 간의 논쟁이 아니라 율곡학파 내부에서 전개된 논쟁이었다는 점이다. 즉 사칠논쟁에서 호락논쟁으로의 전개는 율곡학파가 퇴계학파와 차별화되는 그들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다져가는 과정과 연동한다. 이는 달리 말해 ‘주자학의 율곡학적 정당화’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처럼 율곡의 관점에서 주자학을 해석하고 이를 道統의 위치에 올려놓는 작업에 앞장섰던 인물이 우암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렇게 볼 때 송시열과 우암학단의 성리설은 16세기 조선성리학의 문제의식이 18세기 호락논쟁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에서 필자가 사칠논쟁과 호락논쟁을 잇는 17세기 율곡학파의 키워드로 주목한 것은 마음(心)이라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왜 ‘마음’의 문제가 중요한가. 성리학에서 말하는 마음(心)은 대상세계를 느끼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마음은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저절로 주어진 본성(性)과 대비된다. 본래 주자학은 주체의 도덕성 확립을 종지로 삼는 사유체계이기에 마음의 문제가 우암학단에 이르러 새삼스레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암학단의 心論은 학파의 분기가 본격화됨에 따라 율곡학의 내적 정합성을 확립해가는 과정과 맞물려 전개됐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당시 퇴계학파와의 대결 구도 속에서 사단칠정에 대한 견해는 율곡학파 안에서 대체로 일치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처럼 사칠론이 쟁점으로서의 효력을 상실함에 따라 학파 내부에서 마음의 구조와 역할에 관한 논의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이 책에서는 이이의 철학적 유산을 계승해가면서 虛靈, 未發, 知覺, 明德 등과 같은 심론의 중심개념을 검토하는 우암학단의 다양한 논변을 소개하고 분석했다. 이 때 사칠논쟁을 통해 이이가 제시했던 일련의 명제들이 마음 개념을 이해하는 바로미터로 기능하는데, 이처럼 율곡학의 관점에서 주자학의 심론을 재구성한 점이 바로 17세기 우암학단의 이론적 특색이다. 이처럼 우암학단의 성리학적 사유에는 ‘16세기 담론의 후계자’와 ‘18세기 담론의 선구자’라는 두 가지 면모가 혼재한다. 그 가운데 후자의 면모는 특히 마음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호락논쟁에서 심도 깊게 논의된 마음에 관한 담론은 18세기의 개막과 함께 갑자기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전 세대 학자들이 다져놓은 지적 토양 위에서 자라난 결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심론이라는 문제틀은 그동안 단절적으로 인식돼왔던 17세기와 18세기 율곡학파의 사상적 연속성을 규명하는 데 유효한 논의범주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기존의 정형화된 논점을 탈피해 17세기 조선을 읽는 새로운 독법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선열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박사후연구원·한국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7~18세기 조선성리학의 발전과 전개에 관한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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