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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 … 예술의 비은닉성 통해 진리 접근 모색
‘존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 … 예술의 비은닉성 통해 진리 접근 모색
  • 교수신문
  • 승인 2015.08.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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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 25강.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숲길』’
▲ 하이데거사진출처= hannaharendtcenter.org

무덥고 눅눅한 한 여름, 시원한 바람이 그리운 시간이다. 청량한 바람 한 점을 맛볼 수 있는 책이 없을까. 지난달 25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시즌2 고전읽기 강연이 마침 그런 바람 소리를 들려줬다. 다른 저작에 비해 눈길이 그다지 덜 미쳤던 하이데거의 『숲길』이 『존재와 시간』과 함께 조명됐기 때문. 이날 강연자는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과)였다.

박찬국 교수는 서울대에서 석사학위까지 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에 관심이 많으며, 서양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것도 주요한 연구 관심사 중의 하나다. 그가 대한불교진흥원 원효학술상 운영위원회 운영위원 등을 역임한 것도 이런 지적 이력 때문이다.

저서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하이데거 읽기』,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 등이 있고, 그 가운데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라는 저서로 ‘청송학술상’을, 『니체와 불교』로는 ‘원효학술상’을 각각 수상했다. 역서로는 『니체 1·2』, 니체의 『유고』와 『비극의 탄생』, 카시러의 『상징형식의 철학 1』,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 등 다수가 있다.
이날 강연에서 박 교수는  「예술 작품의 근원」(1936), 「세계상의 시대」(1938), 「헤겔의 경험 개념」(1942~1943),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1943),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1946),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1946) 총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는 『숲길』을 가리켜 ‘궁핍한 시대’ 예술 작품을 통해 진리의 ‘알레테이아’를 환기하는 작품이라고 의미를 매겼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독법과 함께 『숲길』에 대한 해설의 주요 대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현대의 지성계를 뒤흔든 기념비적인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은 미완성으로 끝났음에도 1927년 출간되자마자 당시 38세에 불과했던 하이데거를 일약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존재와 시간』은 분석의 치밀함과 내용의 일관성 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책이다. 아울러 서양 철학의 전통 전체와 대결하면서 철학에 새로운 기초를 놓으려는 하이데거의 야심과 박력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근본 물음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경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같은 실존적인 물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실존적인 물음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물음이다. 인간이 이렇게 존재 이해의 장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現存在(Dasein)라고 부른다. 현존재가 자신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심려(Sorge)의 방식으로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뇌하며 그것을 구현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나는 존재한다’는 사태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세계-내-존재라는 데서 찾는다. 개개의 존재자들을 접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들이 무엇이고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세계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이러한 존재 성격을 세계-내-존재라고 부르고 있다. 현존재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하려고 하면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하면서 존재한다(Sein-bei).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객관적인 지각이나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자가 우리에게 드러나며 이렇게 존재자가 드러나고 나서야 그것과의 실천적인 관계가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자를 눈앞의 대상으로 지각하는 것이나 그것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과 관계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 철학이 제기한 인식론적 문제 제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항상 의식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기보다는 자신이 태어난 특정한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따라서 산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인(uneigentlich) 실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비본래적인 삶이란 내가 나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구현하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비본래적인 삶과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단순한 결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비본래적인 삶과 세계의 자명성이 붕괴되고 이러한 삶과 세계의 공허함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한계 상황과의 대면을 통해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안도하고 죽음이 자신들에게는 아직은 먼 사건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죽음에서 도피한다. 이에 반해 죽음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용기 있게 직면하면서 일상적인 가능성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로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감’, 즉 ‘죽음에로의 先驅(Vorlaufen)’라고 부른다.

죽음에로의 선구는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시간성(Zeitlichkeit)으로서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 역할을 한다. 현존재는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 즉 자신의 장래에로 나아가는 동시에 탄생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거를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현존재가 자신의 과거를 근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본래적 현재를 하이데거는 순간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자신의 고유한 장래를 향해 나아가고 자신의 과거를 근원적으로 반복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순간으로서 경험하는 것이 본래적인 시간성이라고 한다. 전통 형이상학은 최대의 전체로서의 존재를 생성 소멸하는 존재자들의 궁극적인 근거로부터 이해하려 했지만, 하이데거는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존재자들도 이러한 최대의 전체인 존재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전통 형이상학이 이른바 보편적인 이성의 입장이라고 생각한 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 각자가 갖는 고유성과 독자성을 제거하는 세상 사람의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숲길』

하이데거의 초기 사상에서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에 대한 분석과 그것에 입각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정태적이고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행해진 반면, 후기 사상에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초기 사상에서는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현존재의 결단이 존재의 근원적인 개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된 반면, 전회 이후의 사상에서는 존재 자체가 시대마다 다르게 자신을 개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함께 후기의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 대신에 각 시대마다 자신을 다르게 개시하면서 각 시대를 여는 ‘존재의 진리’에 대해서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마저도 자신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내놓도록 혹사당하는 현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존재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 이해가 개시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존재자들의 지배자가 아니라 존재의 파수꾼이 되는 것을 통해서만 현대 기술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나 하이데거는 20세기를 세계가 황폐해지고 신들은 떠나 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 버린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부른다.

고향 상실의 시대를 『숲길』에 실린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에서는 궁핍한 시대라고도 부르고 있다. 현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모든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무게가 사라져 버린 궁핍한 시대라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모든 존재자를 계산 가능한 에너지의 담지자로 보면서 존재자들의 진리를 은폐한다. 존재자들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예술에서 드러난다. 현대인들은 과학자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과학자들의 이성이란 시적인 이성의 퇴락한 형태이며 우리는 과학적인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진리에 더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에서 개시되는 진리를 비은닉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아레테이아(aletheia, Unverborgenheit)로부터 사유한다. 비은닉성은 진리가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존재자와 판단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은닉으로부터 자신을 내보이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 못지않게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존재의 진리를 생각하게 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작품을 주관적인 체험 안으로 끌어들이지도 않고 체험의 유발체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진리에 진입하면서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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