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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신화가 된 현장의 求法行路, 중국적 판타지 『西遊記』를 낳다
살아서 신화가 된 현장의 求法行路, 중국적 판타지 『西遊記』를 낳다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8.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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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14.『 대당서역기』, 동아시아 천년 상상의 원천

현장 當代로부터 현장 사후 20여 년이 지나지 않는 시점에 이르는 불과 40여 년의 세월 동안에, 현장의 구법여행에 관한 기록들이 점점 신화적인 형태로 덧붙여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현장이 사후 20년이 지나기 이전에 이미 신화적인 존재로서 거듭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로도차투성변상도(勞度叉鬪聖變相圖). 중국 감숙성 安西楡林窟제16굴 소재. 이 변상은『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부처님과 재주를 겨루는 이야기 등 다양한 장면들의 원천 소재로 활용됐다.

지 난 글에서 현장 삼장과 왕현책의 서역과 천축(인도) 방문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야기했는데,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가 초점이었다. 특히 당 태종에게 서역과 천축의 정세에 관한 상세한 정보의 획득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을 통해 당 태종은 대당 제국의 서부 변경 지대의 통치권의 안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치·경제적으로 대당 제국의 절반이 안정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안심하고 동북 변경의 공략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서역과 천축에 대한 상세보고서로 현장이 제출한 『大唐西域記』는 이미 그 자체로서도 즉시 충분한 효과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뮬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대당서역기』가 만들어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대당서역기』와 현장 삼장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당 황실이 불교에 좀 더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당 태종은 집권 과정에는 불교를 깊이 숭상하는 관료 그룹의 지원이 상당한 도움이 됐지만, 막상 집권 후에는 불교보다는 도교를 성장시키는 데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특정 종교 집단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은 부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도교에 대한 지원은 일종의 견제 세력 양성에 초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이 건국 초기에 隋의 전례를 반면교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했던 隋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배경도 존재한다. 곧 태종이 집권한 후 불교세력은 그 성장에 일정한 제약을 받고 있었던 셈인데, 현장과 현장이 제출한 『대당서역기』는 그 제약을 해소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불교도들에게는 이른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 것이 바로 현장이라는 인식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승려들이 현장에게 환호했던 배경에는 현장이 새롭게 번역해서 소개한 방대한 불교전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실적 사정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장이 정세보고서로 작성한 『대당서역기』가 당시에만 반짝 효과를 발휘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의 활동 특히 인도 구법에 관련한 자료는 귀국 직후 직접 작성한 『대당서역기』외에도 『속고승전』에 수록된 「玄奘傳」(647년 전후본/ 664~667년본)과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668년) 등에도 인용됐다. 이 글에서 주제로 삼고 있는 『대당서역기』는 불교 구법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역과 천축의 정치와 경제, 풍속 등을 주요 항목으로 하는 지리지에 가깝다. 이와 달리 「玄奘傳」에는 현장의 구법여행에 호응해 나란타사의 승려들이 대거 현장을 마중 나오는 등의 기록이 추가되고 있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된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문수보살과 관자재보살 그리고 자씨보살(미륵보살)이 등장해 현장에게 『유가론』의 유통을 당부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 같은 변화는 현장 당대로부터 현장 사후 불과 20여 년이 지나지 않는 시점에 이르는 불과 40여년의 세월 동안에, 현장의 구법여행에 관한 기록들이 점점 신화적인 형태로 덧붙여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기 서술의 변화는 현장이 사후 20년이 지나기 이전에 이미 신화적인 존재로서 거듭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급한 전기물들은 현장 생전에 현장과 이미 만난 경험이 있었던 인물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미 현장의 구법신화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또 덧붙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서술 방식이 현장을 신화적인 인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승려 전기의 서술에서 ‘神異’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은 어쩌면 일반화된 서술태도이기도 한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전해지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대중들은 현장 삼장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서역구법을 성취했다는 영웅적 행로에 더욱 주목했다. 그것은 정치적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데, 일종의 영웅담으로서 현장의 구법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강장 극화돼 나타난 것이 바로 명대의 吳承恩에 의해 편찬된 『西遊記』다. 물론 이것은 명대의 오승은에 의해 완성된 이야기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승은의 『서유기』가 획득한 완성도와 관계없이 그의 『서유기』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다양한 스토리들이 선행해 성립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大唐三藏取經詩話』라는 것으로 남송 시대 혹은 명대에 성립된 기담이다. 곧 이야기의 골간은 이미 宋代그리고 송대 이전의 唐代에 이미 다양하게 회자되고 있었고, 그것이 기이하고 영웅적인 이야기로 전승되고 각색되는 과정에서 『서유기』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서유기』는 일조일석에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 원류는 이미 현장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唐代의 사찰은 우리가 오늘날 흔히 마주치게 되는 사찰 혹은 종교사원들과는 다른 많은 기능들을 지니고 있었다. 불교사원은 면세가 되는 대토지를 소유한 장원의 주인이기도 했고, 지역 사회의 중요한 산업시설을 운영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물방앗간과 기름틀 같은 당시 경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산업시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無盡藏’을 소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지역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무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경제주체였던 셈이다. 게다가 당시의 사원들은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숙박업소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일반 여행자들은 물론이고 공무로 여행 중인 관료들 역시 적잖게 사원을 숙박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 시대의 많은 대형 사원들은 지역사회에서 유교를 포함한 외전의 공교육 장소로도 활용됐다. 곧 지방의 대형 사원은 지방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음은 물론 다양한 공공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唐代의 대형 사원에서 대중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정례적인 행사 중의 하나가 講經法會, 곧 불경을 읽고 강의하는 법회 모임이었다. 다른 말로 俗講이라고도 불리는데, 불교 사원에서 대중들에게 불교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의 하나였다. 이 정례적인 강경법회에서는 이른바 俗講師라고 불리는 승려들이 활약했는데, 대개는 특정 경전을 정례적으로 강의하되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다양한 일화들을 곁들이는 방식이 사용됐다. 일종의 주제가 있는 대중 강연이었던 셈이다. 다만 대중강연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노래를 비롯한 음악과 다양한 몸짓이 곁들여진 부분이다. 아마 제일 비슷한 것 중의 하나가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 정도일 것이다. 속강사란, 일종의 일인극을 시연하는 형태로 경전 혹은 불교의 특정 주제를 전달하는 전담 배역을 가진 승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대중 강연의 대본으로 사용했던 變文이라는 독특한 불교문학의 문헌들이 돈황사본에서 상당수 발견됐다. 이들 대부분은 불교 경전을 매개로 삼아 특정신앙을 강조하거나, 효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혹은 부처의 전기를 영웅담으로 각색해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등의 내용이다. 곧 대중들이 들으면 솔깃할 만한 형태로 일종의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것이 變文이고, 이 변문을 기초로 속강사가 가무를 함께 변주하는 형태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속강법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이 속강법회의 인기를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문숙이라는 승려가 공공연히 사람들을 모아놓고 담설을 할 때, 경론에 가탁했지만 말하는 것이 음탕하고 비천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건달패들은 서로 부채를 치면서 나무에 기대었으며, 어리석은 민간의 남성과 여성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했다. 듣는 사람들이 절을 메우고, 예를 갖춰 그를 숭배하면서 和尙이라고 불렀다. 교방에서는 그 성조를 모방해 가곡을 만들었다. 그것은 백성들을 쉽게 유혹했지만, 불교도들은 진리를 깨닫고 이해가 점차 깊어지면 그것을 대단히 천시했다. 근래의 우매한 승려들은 이름을 功德使에 올리기 위해서 臺省府縣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류들도 그가 하는 것을 즐겨 엿보았으나, 그의 의관을 보는 것은 원수보다 지나치게 여겼다. 이런 것은 문숙이란 승려가 가장 심했기 때문에 여러 번 장배를 맞고 수차례 변방으로 유배를 당했다.”(唐代의 필기소설인 『因話錄』중에서)

내용은 문숙이라는 승려를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꼼꼼히 훑어보면, 문숙이라는 승려의 대중적인 인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기생집에서도 그의 성조를 모방해 노래를 만들 정도였고, 민간의 남녀가 모여서 이야기를 듣고 즐기는 모양새가 묘사돼 있다. 몇 차례 유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것도 문숙이라는 속강사가 인기가 많은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말투가 공공연히 대중 속에서 유행하고, 그의 노래 부르는 성조가 기생방에서 따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니, 요즘의 대중 연예인 못잖았던 모양이다. 그 모양새가 점잖았든 아니면 좀 더 비속한 형태가 됐든 간에, 唐代의 사원에는 이 같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속강법회가 적잖이 이뤄졌던 모양이다.

그런 대중법회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아무래도 효자이야기와 부처의 전생담과 현생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문의 대다수를 이 부류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현재 현장의 구법전과 관련된 직접적인 변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변문들 중 많은 것들이 宋代와 元代를 거치면서 희곡으로 정착했음을 생각하면, 현장의 구법전을 매개로 하는 『서유기』역시 그런 일반화된 과정을 거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아있는 변문 중에서 『서유기』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降魔變文」, 「祇園因由記」등이다. 두 변문은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다룬다. 불교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부처에 반대하는 外道들의 대표자인 勞度叉(Raudra ̄aks.a)와 부처의 제자 舍利弗(´S ̄ariputra)가 法術과 幻術로 서로 경쟁하는 환상적인 鬪法대결이 주된 내용이다. 로도차는 변신술을 부려서 몸을 여럿으로 나눠 사리불을 공격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환술을 사용해서 사리불을 공격하지만, 결국 사리불의 굳건한 禪定의 상태를 넘어서지 못하고 패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온갖 술법을 써서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려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굴복한다는 이야기의 원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변문은 불교석굴의 벽화로도 그려져 돈황 막고굴 등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데 이들 변문은 『서유기』에서 다양한 재료 중의 하나에 해당할 뿐이다. 『서유기』는 나약하고 보통 사람일 뿐인 ‘唐三藏’(현장을 캐릭터화한 인물)이 손오공과 사오정 그리고 저팔계의 도움을 받아 西天에 이르고, 마침내 부처의 가르침을 성취해 되돌아오는 과정을 담는다. 이 과정에서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기록한 다양한 지방과 그 지방의 자연 환경들이 무대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 하나하나 『서유기』의 등장인물이 돼 ‘당삼장’의 구법행로를 돕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당삼장’은 고난을 거듭하지만 결국은 목적을 성취한다는 인간 승리의 영웅담이기도 하고, 보통의 나약한 인간이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해 정신적인 스승으로 거듭나는 수행담이기도 하다.

곧 오승은이 지은 『서유기』는 현장의 구법행로가 담긴 『대당서역기』와 현장의 구법과정과 의지를 하나로 엮어낸 걸작인 셈이다. 그 이야기들의 원형 대부분은 이미 唐代의 사원들에서 행해진 속강법회에서 다양하게 발상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그런 이야기들의 스토리가 덧붙여지고, 결합되면서 좀 더 큰 이야기로 모양새를 다듬어간 결과물이 『서유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를 흘러내려갈수록 현장의 구법전기는 좀더 신화적으로 각색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오늘날의 문학에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그것은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의 상당 부분을 이 판타지라는 장르가 차지한다는 이야기이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서구 전래의 전설들을 묶어 하나의 판타지 장르로 만들어낸 걸작이라면, 동아시아에서 그에 비견되는 것이 『서유기』일 것이다. 다만 『서유기』는 『반지의 제왕』과는 달리 현장의 『대당서역기』라고 하는 좀 더 직접적인 원형이 존재한다. 『대당서역기』라는 정치, 경제, 풍속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방대한 지리지이자 여행기가 직접적인 연원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거듭나는 것은 불교 사원의 속강법회를 통한 『대당서역기』의 대중화 혹은 민담화와 함께, 현장의 서역구법에 대한 신화화라는 과정이 내재한다. 이것은 唐代의 대중들에게는 거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다. 우선 서역과 천축에 대한 관심이 이전의 어느 중국 사회보다도 훨씬 더 증폭돼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 사회의 이민족에 대한 개방성이 전후의 어느 나라보다도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당대는 불교가 완연하게 일반 민중들의 신앙으로 자리 잡은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에, 현장이란 승려의 장대한 여행이 또 다른 세계 혹은 불교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 현장의 인도 구법 이후, 당나라와 신라 승려들의 인도 구법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증거일 것이다.

곧 불교세계와 이민족 그리고 이민족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증폭되는 계기를 현장과 『대당서역기』가 당대 사회에 제공했던 것이고, 그것은 다시 중국 민간의 호기심과 결합되면서 『서유기』라는 거대한 중국적 판타지를 낳았던 셈이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동아시아의 많은 기이괴담들은 『서유기』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일례로 우리의 대표적인 무가인 오구굿의 핵심 스토리인 바리데기 공주의 서천서역국 이야기의 상당 부분 역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당대 서역과 인도 문화에 대한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다양한 경험들은 동아시아인들의 상상력에 또 다른 원천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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