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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겨울밤 소년 형제의 南行과 ‘기억의 역사학’
1947년 겨울밤 소년 형제의 南行과 ‘기억의 역사학’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8.11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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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어떤 越南 기록의 무게

『그해 겨울밤』은 ‘해방공간’ 당시 김화읍과 철원이라는 작은 공간의 삶의 풍경, 거기에 드리운 이데올로기의 그늘까지도 짚어내는기록문학적 의미를 획득했다.

 

▲ 『그해 겨울밤』 신동철 지음|중앙books|303쪽|15,000원

오는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광복의 기쁨은 곧이어 냉혹한 국제정치의 셈법에 따른 38선으로 토막나버린다. 이 38선은 이후 남북의 허리에 박힌 가시철조망이 돼 무수한 분단의 아픔을 만들어낸다.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이 38선의 형성과 문제점을 조명해줄 수 있지만, 이 가시철조망에 걸려 찢어진 보드라운 살의 상처와 그 감각을 짚어내거나, 읽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역사의 틈을 살아낸 기록문학의 진가가 발휘된다.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의 원로 저널리스트 신동철(77세)의 회고록 『그해 겨울밤』에 새삼 눈길이 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 책은 ‘회고록’의 속성상 두 소년 형제의 월남행만 품고 있진 않다. 월남 전후 가족사와 그 후일담까지 껴안고 있지만, 현대사의 한 이면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으로도 손색이 없다. 회고록은 「그때 한탄강 물은 明鏡止水였다」, 「아버지의 考終命, 그리고…」, 「天地不仁 春來不似春」, 「권말부록」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회고록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소년 형제의 월남과 가족사에 비친 격동의 시절’로 요약해도 좋을 것 같다. 회고록의 서술 주체인 ‘나’는 끊임없이 시간을 교차해가면서 1947년 겨울밤 그 운명적 순간을 한 가운데 놓고 역사의 순간을 복기해낸다.

“경원선 남행열차가 어둠을 뚫고 종착역인 연천역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깜깜한 암흑세계였다. 플랫폼에 띄엄띄엄 서 있는 촉수 낮은 가로등과 역 앞 광장 일대를 밝혀주는 등불만 깨어 있을 뿐, 온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신동철의 회고록은 바로 이 첫 문단으로 시작한다. 1947년 겨울 어느날 밤, 열두 살 먹은 작은 형과 열 살인 ‘나’가 아버지와 어머니, 큰형이 먼저 올라가 있는 남쪽 서울을 향해 먼 길을 떠난다. 저자는 이날 밤 소년들이 감행했던 월남 행로를 이렇게 말한다. “그해 겨울 우리 형제는 전곡에서 성재 아래편 함밭이 쪽으로 강을 건너 오르막길을 넘고 다시 서쪽으로 걷다가 국도를 만나 38선을 돌파했다. 이는 최근 필자의 현장 답사 결과 확인된 것으로 그날의 나루터는 흐르는 세월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림 참조)

확실히 『그해 겨울밤』은 노련한 저널리스트의 감각이 그대로 묻어나는 회고록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이 매력을 견인하는 힘은 두 가지다. 첫째는 서울대 문과대학 사학과 출신의 이력을 살려낸 문체. 둘째, 평생을 신문 기자로 살아온 저널리스트로서의 시선과 감각이다. 문장이 정돈돼 있고 굉장히 깔끔하고 속도감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서로 얽혀 많은 경우, 서로를 보완하기까지 한다.
예컨대 이런 대목. “맨 먼저 연단에 오른 사람이 개회 선언을 하자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이 터졌다. 이어진 연설 때도 옳소! 옳소! 하는 소리가 군중들 사이에서 연달아 나와 말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낡아빠진 마이크 때문에 목이 쉰 것처럼 들려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이날 연단에 선 사람들은 대충 ‘김일성 장군의 영도 하에 일치단결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자’고 촉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동네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혹시 아는 얼굴이라도 있는가 싶어 군중 속에 파고 들어갔다. 4줄로 서 있는 사람들의 맨 앞쪽부터 끝까지 가며 얼굴을 훑어보았으나 낯익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불쑥 ‘해방’이 찾아온 김화읍의 해방공간 어느 때 쯤의 풍경이리라. 김화읍이라는 마을이 탄생한 후 가장 큰 규모의 군중대회라고 저자는 회고했는데, ‘김일성 장군 만세!’를 연호하는 마을 군중대회를 바라보는 열 살 소년의 시선은 결코 이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그토록 열광하는 군중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 들어간 차비와 밥의 문제를 따진 소년은 이 풍경(군중대회)이 하나의 눈가림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 소년 신동철이 그의 형과 월남한 이동 경로(붉은색 화살표)

근현대사 연구가 일종의 ‘기억의 정치학’을 지향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독자들은 분명 저자의 회고 속 풍경과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개별적 체험으로부터 경험의 전체 풍경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기억의 정치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공식 문서와 연구자들의 논문이 놓친 무수한 틈들과 조각난 경험의 존재는 당대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척도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해 겨울밤』은 ‘해방공간’ 당시 김화읍과 철원이라는 작은 공간의 삶의 풍경, 거기에 드리운 이데올로기의 그늘까지도 짚어낸다.
“달리는 전차의 창문을 통해 보면 높은 산과 비교적 넓은 벌판이 시냇물과 숨바꼭질 하듯 나타났다가 숨어버리는가 하면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협곡도 있었다. 좀 더 가다 보면 끝 간 데 없이 푸르게 펼쳐진 철원평야가 유년 시절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거기엔 군청, 경찰서, 금융조합, 우체국, 병원, 방송국, 각급학교, 제사공장 등이 버티고 있고, 우리 고장엔 한두 채밖에 없는 2층집도 많이 보이는 등 제법 큰 도시 같아서 우리네 꼬마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소소한 풍경의 일상적 묘사는 회고록에 반복해 나타나지만, 다음 대목과 같은 긴장감에 의해 적절히 조율되고 있다. “전곡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여전히 세상은 깜깜하고 언제 밝을지 몰랐다. 하긴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해서 한탄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뛰어서라도 가야 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전곡에 가면 한탄강 물이 흐르고 그걸 건너면 부모님이 살고 계신 자유의 땅이 있는데, 문제의 전곡은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그 한탕강 역시 암흑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여전히 세상은 깜깜하고 언제 밝을지 몰랐다.’ 이 문장 하나가 어쩌면 『그해 겨울밤』 전체를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 소년 형제가 서 있었다.

형제는 연천에서 전곡을 거쳐 다시 동두천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듬어 따라간다. 어느 순간 밤하늘은 구름이 벗겨져 별이 빛나고 있었으며, 산 넘어 먼 곳까지 별똥별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년 형제는 여전히 말없이, 남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일제 99식 장총을 든 18세도 채 안 돼 보이는 마음씨 착한 소년병(38경비대 소속 보초병)에게 발각되지만 그의 도움으로 한탄강 나룻배에 승선한다. 우여곡절 끝에 형제는 마침내 38선을 넘는다.

“남쪽으로 걷던 나그네 중 누군가가 우리 형제에게 들으라고 ‘여기쯤이 바로 38선이야. 이젠 38선을 넘었으므로 안심해도 된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길목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38선을 넘었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조금 더 가서 조그만 산모퉁이를 돌자 검은색 제복을 걸친 경찰관들과 함께 키가 큰 미군 MP들이 길을 막고 한탄강을 건너 남하하는 실향민들에게 일일이 DDT를 뿌려주고 있었다.”
그날 밤 그렇게 밤을 도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형은 훗날 한국능률협회 컨설팅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고, 2014년 6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 ‘나’는 한국방송개발원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신문은 죽어서도 말한다』가 있다. 『그해 겨울밤』은 이렇듯, 개인사를 중심으로 한 기록물이지만, 공식 역사의 빈틈을 메워나갈 수 있는 ‘기억의 역사학’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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