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5:45 (일)
“이것은 우리시대의 요청 … 자율성·체화성·초월성 원리삼아 새롭게 활성화하자”
“이것은 우리시대의 요청 … 자율성·체화성·초월성 원리삼아 새롭게 활성화하자”
  • 이영의 강원대 HK교수·철학
  • 승인 2015.08.11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향_ 인문치료를 넘어서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테라피’들은 균형, 평형, 항상성과 같은 삶의 긍정성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부정성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인문치료는 고통, 곤경, 아픔, 슬픔, 절망, 미움으로 표출되는 삶의 부정성과 그것에 대한 인내, 극기, 수양이라는 덕을 중시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류는 역사상 유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52년에 출판된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 1(DSM-I)』은 106 종류의 정신장애들을 분류하고 있는데 비해 2013년에 출판된 『DSM-V』는 무려 300여 종류의 정신장애를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DSM에서의 정신장애의 증가가 현실을 실제로 반영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현대인들이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현대인의 감기인 우울증은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라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들이 적게 분비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 신경전달물질들의 분비를 촉진하는 신약들이 개발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항우울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프로작(Prozac)이다. 중증 우울증 환자들이 프로작을 복용하면 우울 상태로부터 한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만 그 약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신경생리적 원인 때문에 발생하지만 심리적 원인이나 가치적·사회적 이유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병이 심리적 원인이나 가치적·사회적 이유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면,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제대로 규명해야만 관련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햄릿의 고민을 하고 있는 젊은이나 사랑과 출세의 길목에서 방황하고 있는 줄리엣이 있다면 진정한 치료사는 그들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전을 작성해야 한다. 누가 그런 진단을 하고 처방을 내려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은 옛부터 그런 일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지혜를 제공해 왔다. 예컨대 플라톤은 영혼의 집은 3층으로 지어져 있다고 봤다. 맨 위 층은 이성, 그 아래층은 용기, 더 아래층은 욕구가 거주한다. 행복은 맨 위층에 거주하는 이성이 아래층의 거주자들을 적절히 통제해 조화가 이뤄질 때 얻어진다. 우울증 환자는 플라톤을 읽고 거기에서 지혜를 얻고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병을 자가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는 마음의 병이 세상사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마음의 해석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고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플라톤이나 에픽테토스를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지혜를 니체에게서 발견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나 예이츠의 시 「버드나무 정원아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프로작과 같은 약에 못지않게 ‘인문학 약국’이 제공하는 ‘지혜의 약’의 효능이 매우 좋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점을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그 점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집 근처에 있는 약국을 찾아갈 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는 인문학 약국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사람들의 잘못만은 아니고 인문학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마음의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플라톤이나 니체를 읽고 혼자 힘으로 그 사상을 소화해 지혜의 약을 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에게 플라톤,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예이츠의 약초를 처방하고 지혜의 약을 조제해 그것을 잘 섭취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치료사가 필요하다. 그들이 바로 인문학 약국의 약사들이다. 마음의 병 환자들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니체 약국’, ‘도스토예프스키 약국’, ‘예이츠 약국’ 등이 즐비한 동네로 인문산책을 해야 한다.

 

‘인문학 약국’이 제공하는 ‘지혜의 약’

마음의 병은 통상적인 병과 다르기 때문에 질병이라고 볼 수 없고 따라서 그 병에 걸린 사람은 ‘환자’가 아니다.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앓게 되는 정상인의 병이다. 그러나 마음의 병에 걸린 사람은 의학적 의미에서의 환자는 아니지만 심각한 실존적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치료가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환자’다. “마음의 병이 신체의 병보다 더 위험하고 그 종류도 더 다양하다”라는 키케로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음의 병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종종 한 사회가 사회적 건강을 잃고 광기, 독선, 폭정 등과 같은 병리 현상을 보인 경우를 보아 왔다. 그 대표적인 예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정권 하의 독일사회다. 1933년에 제정된 단종법에 의해 정신장애를 포함해 유전적 결함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 40여만 명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했다. 또한 1935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독일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직으로부터 추방됐고, 1938년 이후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뤄졌다. 칸트, 괴테, 하이네,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인문학자들을 배출한 독일사회가 그 당시는 심각한 ‘이성마비병’에 걸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의 병은 의학치료만으로 치료될 수 없다. 우울증은 다양한 원인들, 즉 뇌의 이상, 알코올 부작용, 어릴 적 정신외상, 도덕적 딜레마 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이 이처럼 다양하다면 그것은 여러 차원에서 치료돼야 한다. 『Plato, Not Prozac』의 저자인 철학상담 이론가인 메리노프에 따르면 뇌의 이상이나 알코올의 부작용으로 인한 우울증은 신경정신과의 치료 대상이고, 정신외상으로 인한 우울증은 심리치료와 철학치료의 대상이며, 도덕적 딜레마로 인한 우울증은 철학치료의 고유한 대상이다.

그렇다면 인문치료의 원리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문치료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첫째 원리는 “마음이 몸과 세계에 체화돼 있다”고 보는 체화성 원리(principle of embodied mind)다. 체화성 원리에 따르면, 마음이 몸과 세계에 구현돼 있으므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뇌를 포함한 몸뿐만 아니라 환자의 삶의 세계를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정신적 문제들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마음의 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로 인한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 상담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미혼모 상담의 경우 그들이 처한 사회적·경제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인문치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인문치료의 둘째 원리는 “인간은 현상태를 유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존재다”라고 주장하는 초월성 원리(principle of transcendence)이다. 초월성 원리는 인간이 다른 유기체와 달리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런 맥락에서 빅터 프랑클은 인간이 신체, 마음(Psyche), 영혼(Noos)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고 봤다. 신체는 생물학 법칙의 지배를 받고 마음은 심리학 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비해 영혼은 그런 법칙들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프랑클은 특히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를 강조했는데 그것은 삶의 목적을 이해하려는 욕구로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이다. 프랑클이 영혼을 신체 및 마음으로부터 구별한 것은 인문치료를 의학치료와 심리치료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논거를 제공한다. 인문치료는 마음의 병의 신경생리학적 원인이나 심리적 원인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를 추구하며, 인과성이 아니라 자율성과 초월성에 의존한다는 점을 중시한다.

 

인문치료의 진정한 목표

여기서 초월성은 항상성(homeostasis)의 대척점이다. 항상성은 생명 현상에 필요한 균형을 유지하려는 본능이다. 인간은 다른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체온을 유지하고 음식을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통해 항상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성 유지가 생명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며, 더욱이나 그것은 인간 삶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의학치료는 본질적으로 항상성 유지와 회복을 목표로 한다. 의학치료는 환자의 상태를 질병 이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심리치료도 예외는 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항상성 유지를 목표로 하는 치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향상성 유지가 삶의 본질은 될 수 없으며 그런 이유로 그것이 인문치료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테라피’들은 균형, 평형, 항상성과 같은 삶의 긍정성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부정성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간의 삶이 긍정성만으로 구성될 수 없으며 설사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긍정성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인문치료는 고통, 곤경, 아픔, 슬픔, 절망, 미움으로 표출되는 삶의 부정성과 그것에 대한 인내, 극기, 수양이라는 덕을 중시한다. 초월성은 다른 한편으로 신속성과 일상성의 반대 개념이기도 한다.

현대정보사회는 시민들로 하여금 삶의 여유와 깊이를 깨달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문명의 급류 속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기술이 제공하는 신속성을 즐기면서 삶의 일상성에 매몰돼 가고 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체화성과 초월성을 주요 원리로 갖는 인문치료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인문치료는 우리 시대의 요청이다.

 

이영의 강원대 HK교수·철학

필자는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인지과학철학, 베이스주의, 인문치료 등을 연구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