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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유혹하는 은밀한 제안 ‘해외논문출판 사기’
교수 유혹하는 은밀한 제안 ‘해외논문출판 사기’
  • 이재 기자
  • 승인 2015.07.14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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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위촉에 논문 편당 100~200만원 요구도

수도권 사립대 공학계열의 A교수는 지난해 말못할 고초를 겪었다. 이름 모를 해외학술지의 편집위원직을 덥석 맡았다가 뒤늦게 사퇴한 것이다. 이메일을 통해 접촉해온 이 학술지는 A교수의 최근 연구업적을 추켜세우며 편집위원직을 부탁했다. ‘국제학술지 편집위원’이라는 자리욕심에 A교수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학술지 측은 곧 본색을 드러냈다. 편집위원 자격으로 논문 3편을 제공하라고 한 것이다.

A교수가 더욱 놀란 것은 1편당 100만~200만원에 상당하는 ‘논문게재료’ 때문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논문게재를 거절했지만 학술지 측은 이를 무시했다. 또한 편집위원 명단에 A교수의 이름을 빼지 않고 다른 교수들에게 논문게재를 요구하는 메일을 보내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A교수는 급히 편집위원직 사퇴의사를 전달했다. 사퇴가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또다시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 일러스트 돈기성
A교수는 전형적인 ‘해외논문출판 사기’의 피해자다. 해외논문출판 사기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해외 유령출판업체가 해외학술지를 만들어 6개월~1년 이상 걸리는 해외학술지의 기존 심사과정을 생략한 채 논문을 빠르게 발표하고 저자에게 고액의 게재료를 요구하는 수법이다.

앞서 미국에서는 이 같은 해외논문출판 사기가 비정상적 출판으로 이익을 취한다고 보고 ‘약탈출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런 유령출판업체는 최근 해외학술지 논문게재 실적에 목마른 국내 교수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교수들은 하루에도 6~7통에 달하는 해외논문출판 사기 관련 이메일을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대부분 메일을 바로 삭제했지만 일부 교수들은 이 업체를 실제로 이용하고 있었다.

지난해 창원대에서 보직을 맡았던 B교수는 “상당수의 교수들이 유령출판업체를 이용하고 있다. 메일을 받는 순간 저급 학술지라는 것을 알지만 해외논문이 교수업적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 쉽게 유혹에 노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대학의 교수업적평가에서는 SCI와 SSCI, A&HCI 등에 게재된 논문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다. 국내 학술지 중에서는 한국연구재단이선정하는 등재지·등재후보지의 점수가 높다. SCI급에 못 미치는 해외학술지는 ‘기타 해외학술지’로 분류돼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수준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통과가 힘든 SCI급 논문이나 국내 등재지 논문보다 다수의 해외학술지 논문이 평가에 유리하다. 일부 대학은 평가와 관계없이 ‘다작’을 한 교수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는 규정도 있어 유령출판업체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구조다.

해외논문출판 사기 벌이는 출판사를 짐작해볼 단서는 있다. 이들 업체는 주로 중국이나 인도, 스리랑카 등 아시아 지역에 사무실을 열고 광범위한 분야를 다룬다. 가장 눈여겨볼 점은 ‘빠른 출판’이다. 6개월~1년 이상 소요되는 해외학술지 게재과정과 달리 유령출판업체는 수주일 내 논문을 출판한다. 한 업체가 발송한 메일을 보면 ‘사흘 이내 제출 승인’ ‘동료평가 21일’ ‘개정 14일’ ‘온라인 출판 승인 뒤 7일 이내’ 등 짧은 소요기간이 유독 강조됐다. 또 다른 업체는 동료평가에 사흘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고, 출판 뒤 사흘 이내에 출판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이 점이 해외 학술지 논문실적을 요구받는 국내 교수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령출판업체가 활발하게 국내 교수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아직 피해사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개인이메일로 접촉해 당사자가 피해사실을 밝히지 않는 한 확인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상당히 만연해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대학의 연구·교무를 담당하는 보직교수들은 이미 ‘다작의 중견교수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아주대 C교수는 “1년에 5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다작교수'들이 있다. 연구를 열심히 했겠지만 유령출판업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까 의심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해외학술지 선호가 높은 국내 학계의 풍토도 실태파악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학계에 만연해 유령출판업체를 이용하는 동료교수를 보고도 쉽게 지적할 수 없다. 서울과기대 D교수는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유능한 교수의 척도가 해외발표논문인데 이를 유령출판이라고 섣불리 지적했다가 자칫 모함으로 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논문실적 위주의 현행 교수업적평가 제도 탓에 교수들이 유령출판업체의 수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학회나 학술단체들이 나서 교수들이속지 않도록 유령출판업체의 목록을 만들 필요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이 같은 문제가 처음 지적된 미국에서는 콜로라도대 도서관 사서인 제프리 비얼이 유령출판업체의 리스트를 작성해 공개하기도 했다. 창원대 B교수도 “학술단체들이 공동으로 리스트를 만들거나 한국연구재단과 공조해 대응지침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가 논문의 양을 평가하는 현행 제도에서 출발한 만큼 평가기준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는 고민도 필요하다. 이동철 용인대 교수(동양철학)는 “논문은 연구의 부분적인 성과이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엮은 저술이 연구성과물로서 의의가 더 크다”며 “연구를 완성하고 대중이나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성과를 종합적으로 알릴 수 있는 저술에 대한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 기자 jae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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